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69화 (169/288)

북부 전선(1)

휘이이···!

창문 안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창밖으로 펼쳐진 북쪽의 동토, 그 너머 서리고원에서부터 불어오는 한풍이었다.

빳빳하게 굳은 수염을 움찔거리며, 특무대 집행관 크레이그 비드로프는 썩은 동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이거 악마가 아니라 추위에 뒈져버리겠군.”

“푸흐흐, 따뜻한 남쪽에서 반평생 계시다가 올라오시니 그런 것 아닙니까. 그나저나 남쪽 여자들 중에 미인이 많다던데, 피난민 중에 어여쁜 처자는 없었습니···끄아악!”

“야 이 미친 새끼야. 악마 새끼들 침공이 코앞인데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오냐?”

군홧발에 걷어차인 부관이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소변을 보고 오겠다고 했지만, 보나 마나 경계 중인 병사들과 시시덕대러 가는 것일 테였다.

“쯧, 군기 빠진 새끼. 병사들 관리만 못했으면 진작에 잘라버렸을 것을. 능력은 또 좋아요.”

크레이그는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중얼거렸다.

성벽 위 망루에 마련된 개인실은 비좁았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가 이 성의 임시 경비대장이며, 차르국 왕실 특무대의 집행관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할 혜택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곳 북부 전선의 추위가 조금이라도 가시는 건 아니었다.

부관의 말이 맞았다. 동남부에서 오래도록 첩보 작전을 이어왔던 그는 따뜻한 공기가 익숙했다.

그래서 반란 진압의 공로로 전선 동쪽 성채의 경비대장 자리를 받았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쑴의 악마 군세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특무대 요원에게 보직 거부는 곧 명령 불복종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남부 마을은 여관 음식도 나름 먹을 만했는데······. 제대로 된 사슴 스튜 먹어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군.”

크레이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차르국 동남부에서 반란군들이 봉기를 일으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다.

정당한 왕홀의 주인이니 뭐니 하던 반란군 집단은, 결국 차르국 백성들까지 악마의 제물로 바쳐대다가 파멸하고 말았다.

원혼의 밤 사태 이후 몰락했던 놈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선택했던 방법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 주민들을 꾀어서 악마의 힘을 끌어오는 것.

동남부에서 몇 개의 마을이 불타올랐고, 천 단위의 주민들이 악마의 힘에 오염되어 괴물이 되어버렸다.

차리나의 시의적절한 지원 요청과, 그 요청에 즉시 병력을 북진시킨 성기사단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남부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을 터.

그건 자칫 차르국이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도 있었던 위기였고, 크레이그는 그 위기 속에 있던 증인이었다.

성기사단이 변이된 마을 주민들의 무리를 쓸어버리고, 특무대와 함께 반란군의 뿌리까지 제거해내던 바로 그 자리에.

“······.”

그 공로로 집행관의 자리에 앉았고, 비교적 안전한 전선 동쪽의 성채 경비대장이 되긴 했지만.

어째서일까. 크레이그는 하루하루가 좀처럼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추위나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몇 주째 스스로에게 그 핑계를 대보긴 했지만, 삶의 의욕이 사그라든 게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보다는···낭만이지.’

스스로도 미친 건가 싶지만 사실이었다.

적진 한가운데에 잠입해 정보를 캐내고, 피 튀기는 전장에서 적에게 총구를 겨눴을 때 느껴지는 낭만.

젊을 시절 특무대에 몸을 담기로 결단했던 결정적인 이유. 지금의 무기력증은 그 낭만이 없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차르국 동남부에 정보원으로 잠입해 있을 적에는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동남부는 현 차리나가 즉위했을 때부터, 반란군 세력이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이곳은 어떻던가. 북부 전선 중에서도 동쪽 끄트머리.

전략적인 목표도 뭣도 없는 변방일 뿐이었다. 자신이 악신이었어도 이쪽으로 군대를 진격시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윗선의 의중은 이해했다. 부상을 입어가면서까지 왕실에 공헌했으니, 모든 전력을 최전방으로 돌리는 와중에도 그나마 안전한 곳으로 빼준 것이겠지.

크레이그는 책상 위에 올린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전선 중앙으로 보내달라고 요청을 넣어야 할까?

그쪽은 보름 전부터 긴장의 연속이라던데. 그동안 잘 요양한 덕에 부상의 후유증도 다 나았으니 조심스럽게 한 번······.

쿠당탕탕!

“경비대장님! 대장니임!”

문밖의 소란에 상념이 끊겼다. 크레이그는 이마에 힘줄을 빡 돋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쾅!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며 부관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평소의 장난기가 싹 지워진 다급한 표정. 얼굴에 줄줄 흐르는 식은땀.

한 소리 하려던 크레이그는 그럴 상황이 아님을 바로 깨달았다. 그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허억, 헉···정찰대의 급보입니다! 마물의 군대가 밀고 내려옵니다! 창밖을 보십시오!”

이런 젠장. 욕설을 짓씹는 입술과는 달리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모순적인 반응에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크레이그는 곧장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스아아아···!

눈에 마력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시야가 급변한다. 아득한 지평선의 눈 덮인 바위까지도 보일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

쓸데없는 자극들을 능숙하게 걸러내자, 지평선 어림에서 뭔가 이상한 게 눈에 잡혔다.

새하얀 대지와 푸른 하늘 사이, 그 틈을 비집고 나오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검붉은 그림자들.

악신의 마력에 오염된 수백의 야만인 전사들과, 그 동수에 달하는 마물들의 무리였다.

‘잠깐. 저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지평선의 일부분을 점거한 그림자들 뒤로, 어떤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갑주를 걸친 건물 크기의 지옥마와, 그 위에 앉아 신전의 기둥 같은 창을 움켜쥔 말머리 거인.

그리고 그 둘을 합친 것과 엇비슷한 크기를 자랑하는, 다섯 개의 머리에서 화염을 날름거리는 거대한 도마뱀.

놈들이 지옥의 악마, 그것도 쑴 직속의 악마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 머나먼 지평선에서부터 압도적인 크기의 존재감이 이곳까지 전해져왔으니까.

‘···젠장. 나는 낭만을 원했지 이런 개죽음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던 5분 전의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크레이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명령했다.

“부관. 종을 울려라. 그리고 성주님께 사람을 보내도록.”

“···예.”

“보고 내용은 악마 둘과 천에 달하는 마물 및 타락한 야만인들이 침공을 개시했다는 것. 그리고···.”

번쩍.

난데없는 낙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지평선 근처에 있던 말의 머리도 같이 잘려나갔다.

말머리 갑주 거인이 말에서 떨어졌다. 크레이그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지평선 동쪽 끝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길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설원늑대를 탄 여섯 명의 인영.

선두의 거한이 뽑아든 검이 햇살에 반짝였다. 벼락을 부르는 성검. 크레이그는 단번에 그 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곁에 있던 부관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비대장님?”

“아, 그래. 아무튼 그렇게 보고드리고, 덧붙여서 낭만이 왔다고 전해드려라.”

“예?”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드리지. 지휘를 맡기겠다. 아마 딱히 할 일은 없을 거야.”

크레이그는 곧바로 군화를 고쳐 신고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부관의 당황한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병사들 지휘는 특무대 출신인 그보다 군에 오래 복무한 부관이 더 뛰어났다. 평소에 농땡이 부렸으니 지금이라도 일해야지.

그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

먼 길을 행차해오신 낭만의 마중을 나가는 임무가.

***

꽈르르릉―!

푸른 번개가 내리꽂는다.

이미 한 차례 번개에 직격당하고 낙마한 악마, 오로바스가 등 뒤에서 방패를 꺼내 치켜들었다.

새빨간 불길로 이글거리는 거대한 방패는, 어지간한 수준의 주문이라면 닿기도 전에 살라버리는 지옥의 기물.

내리꽂는 푸름과 이글거리는 붉음이 충돌했다. 승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정해졌다.

방패를 치켜든 악마의 팔이 검게 탄 고깃덩이가 된 것이었다.

“으하하! 화끈하구만! 벼락 한 방에 팔이 너덜거리는 악마라니!”

비요른이 몰려드는 마물 군세를 향해 수류탄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꽈과광! 콰르르릉―!

공중에서 폭발하며 산탄의 비를 쏟아내는 유탄들.

마구잡이로 던진 듯 보였지만, 탄막의 폭풍은 정확하게 마물들만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설원늑대 위에서 저런 기예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평범한 장인의 수준은 아득히 넘어서는 실력자라는 증거.

댈런을 따라다니며 온갖 싸움판에 휘말려서일까.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비요른의 능력 역시, 그 어느 회차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화약을 제조하고 배합하는 기술이나, 폭약을 활용한 기상천외한 병기들을 만들어내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낸 병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응용력과, 화약이라는 민감한 물건의 화력을 정확히 적을 향해서만 투사해내는 기예 역시 수준급.

스스로의 무위보다는 수제작한 화약에 대해서만 떠들기 좋아하는 그였으나, 일신의 무력 역시 어림잡아 4위계에 근접한 게 분명했다.

수제 도폭선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악마의 아가리에 폭탄을 던져넣는 전성기의 그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으니까.

“전쟁의 신이시여―!”

외눈의 명공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만들어놓은 마물 군세의 공백.

그 틈을 비집고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든 늑대 한 마리가 질주해 들어간다.

늑대 위에 탄 루시아의 신성문신이 빛을 내뿜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가른 그녀의 검끝에서 백색의 화염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백하현월(白煆弦月)」

쉬익―!

눈 깜짝할 사이 백 미터 넘게 날아간 백염의 초승달.

신성력으로 빚어진 예기에 도마뱀의 머리 중 둘이 잘려나간다.

촤아아악!

동시에 늑대의 등판을 박차고 뛰어오른 루시아의 등 뒤에서 백색 날개가 솟아올랐다.

성기사단의 고위 기적인 ‘투천사의 날개’. 하이 오크의 내전에서 성소 수호자들과 싸우던 중 하사받은 기적이었다.

캬아아아아―!!

루시아가 하늘을 날며 머리 셋 남은 도마뱀 악마와 싸우는 사이, 댈런은 설원늑대에서 내려 마물들의 군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적당히 두들겨 패서 길들인 설원늑대는 좋은 이동수단이었지만, 악마의 군세와 본격적으로 치고받을 때 쓰기에는 성능이 애매했다.

무엇보다 댈런 본인이 기마전을 그리 선호하지 않기도 했고. 어차피 단거리의 기동력은 답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 상관없었다.

꽈아아앙!

눈 덮인 땅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가고, 댈런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꽈과과광―

허공을 짓밟고 도약하며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좁혀낸다.

그 경로의 끝.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말머리 악마가 소리쳤다.

[성검 든 전사···! 네놈이 시체늪의 대공을 쓰러뜨린 자로구나!]

대답은 없었다. 놈도 그걸 바란 건 아니었는지, 망설이지 않고 창을 내뻗었다.

후우우웅―!

5미터에 달하는 거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일격.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창끝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다.

[어디 받아내보아라! 네놈을 죽이면 신께서 내게 대공의 자리를 하사하시겠···!]

악마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회명(回冥)」

허공에서 훅 꺼지듯 사라진 댈런의 형체가, 놈의 뒤에서 튀어나와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

[어떻···게···!]

댈런은 이번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곤 악마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잘려나간 말머리가 지면으로 떨어지고.

「홍염주(紅炎柱)」

말머리가 땅에 쿵 하고 부딪히자마자, 등 뒤에서 치솟은 불기둥이 머리 잃은 악마의 몸을 집어삼켰다.

“쯧. 이젠 악마를 잡아도 경험치를 얼마 안 주는군.”

쿠르르르···. 콰지직! 우직!

눈 덮인 대지가 입을 쩍 벌린 채, 돌로 된 혓바닥으로 남은 마물들을 싹 쓸어 담는 걸 보며 댈런이 중얼거렸다.

방금 잡은 악마 덕에 가까스로 레벨이 하나 올랐다.

문제는 하이 오크들의 성소를 떠나, 이곳까지 내려오는 수 주간 경험치를 아득바득 모은 결과가 그 정도라는 사실.

설령 혼자서 이 군세를 죄다 쓸어버렸어도 경험치 막대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겠지.

시체 회수로 얻는 능력치가 쏠쏠하긴 했지만, 레벨업이 더뎌지는 걸 보고 아쉬워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

‘···좋게 생각해야지. 그만큼 일행이 강해진 건 맞으니까.’

[저급한 악마 나부랭이! 어머니의 털끝도 건드릴 생각 말아라!]

상념을 이어가는 사이 루시아에게 머리 다섯을 전부 잃은 도마뱀 악마가, 군마 크기로 성장한 청린용의 숨결에 휩쓸려 바스라진다.

나머지 군세 역시 비요른의 폭탄 세례와 발렌티노 사제의 광범위한 대지술식에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일행에게 딱히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걸 확인한 댈런은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능력치를 배분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

북부의 덩치 큰 사냥견들이 끄는 전투용 눈썰매. 대략 열 대쯤이 대열을 이뤄 다가오고 있었다.

차르국 성채에서 출발한 정찰대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턱을 긁적이는데, 선두 눈썰매에 탄 지휘관 복장 남자의 얼굴이 왠지 익숙했다.

어디서 봤는지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남자는 산맥에 오르기 직전, 차르국 동남부의 한 마을에서 만났던 특무대 요원이었으니까.

‘그런데 인상이···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쏙 들어간 배와 단단하게 드러난 팔 근육. 살이 빠지면서 날렵해진 턱선.

그게 끝이었으면 별 생각 없었겠지만, 어째서인지 눈빛이 미묘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게 꺼림칙하다.

크레이그 비드로프였나. 댈런은 사내의 이름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며 생각했다.

대체 두 달 사이에 뭔 일이 있으면 저렇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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