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전선(2)
달칵.
적막한 응접실 안.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댈런은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돌려 원탁의 상석을 바라봤다.
원탁에서 가장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자리.
귀금속 장식이 반짝이는 의자에 앉은 노년의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반쯤 빈 찻잔을 감싼 채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구려. 환영하오, 성채를 구한 영웅들이여.”
왕실 특무대의 집행관이자 이곳 성채의 경비대장이 되었다는 크레이그의 손에 이끌려, 응접실로 들어온 지 무려 10분만에 듣는 인사말이었다.
“괜찮소이다, 성주. 그 누구라도 전선의 동쪽 끝에서 악마의 침공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거요.”
“고맙소, 엘가이아 탑주. 나도 젊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작은 이변에도 심신이 쇠약해지는구려.”
“악마의 침공은 작은 이변이라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않소이까. 충분히 잘 해주고 계시오.”
펠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인을 위로했다. 성주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세월의 풍파를 맞고 갈라진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자글자글한 주름 위로 백발이 희끗한 노인의 모습은, 전장의 일선에 나서기는커녕 방어선을 지휘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 노년의 귀족이 북부 전선의 성주로 임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차르국의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할 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심상 너머 진룡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댈런에게 물었다.
[내 근간의 기억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차르국은 나름 제국의 반열에 든다 하지 않았느냐?]
‘맞소. 영토로만 치면 남부 제국보다도 더 넓지.’
[허면 어찌 그런 제국의 최전선에 이런 지휘관이 앉아있을 수 있느냐? 현 차리나 또한 문무를 겸비한 강력한 군주라고 하던데.]
‘그 강력한 군주가 수백 년 동안 지금의 차리나뿐이었으니까.’
[···그렇군.]
적창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의 차리나가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탁월한 군주인 건 사실이었다.
그녀가 즉위한 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사백 년 전 차르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차르 비즐로프에 견주는 목소리들까지 심심찮게 나올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처럼 강력한 군주라도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부딪히는 부분이 있는 법.
차르국의 경우에는, 바로 인적 자원이 그러했다.
‘말단 병사야 모집하고 훈련하면 수 주만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만들 수 있다지만···지휘관의 자리는 그렇지 않지.’
타고난 자질과 오성이 어지간히 탁월하지 않고서야, 숙련된 지휘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 년에서 십 년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온 전대 차르들의 끝없는 향락으로 인해, 차르국의 귀족들 역시 대부분 술과 여색에 절여진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백 년의 혼란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제 본분을 다해오던 몇몇 충성심 강한 가문이 존재했다는 것.
그 가문들을 중심으로 현 차리나는 빠르게 국력을 회복시켰고, 실력 있는 지휘관을 양성하는 중이었다.
다만 지난 십여 년간 실력 있는 지휘관을 아무리 많이 양성했다 하더라도, 지금의 숫자로는 왕도 에클라힘과 북부 전선 중앙부를 지키기에도 빠듯하다는 게 문제였지.
‘결국 이 양반도 전대 차르가 통치하던 시절까지 백성들 등골이나 뽑아먹던 인물이라는 거지. 원체 북부 전선에 사람이 부족하니 외곽 지역 끄트머리에라도 일단 앉혀놓은 거고. 노쇠한 만큼 적어도 허튼 생각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한 마디로 답도 없이 무능력한 지휘관이지만, 배신할 여력조차도 없기에 임시로라도 인력 구멍을 막아놓는 데 써먹었다는 이야기.
본인의 취급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구려. 왜 쑴이 이곳으로 악마를 둘씩이나 돌린 건지. 서리고원 너머에 소환된 악마가 스물에 달한다는 건 들었으나, 그럼에도 이런 변방의 방어선에 전력의 1할 이상을 투사할 가치가 있는 건지······.”
푹 내쉬는 한숨에 수염이 흩날린다.
성채의 주인으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맞는 이야기였다.
원래라면 이런 변방에 악마가 무려 둘씩이나 쳐들어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성채는 기나긴 북부 방어선의 가장 끄트머리.
거기다 배후 지형이 워낙 험지인 터라, 대규모 군대로 여길 함락시켜봐야 방어선을 우회하기도 전에 새로운 방어선이 구축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계륵 같은 이 요새에 악마가 둘씩이나 쳐들어온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에 대한 대책 역시도.
그러나 댈런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품속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아르보르가 쪽쪽 빨아먹고 있는 정수 파편을 빼앗아 들었다.
‘뱉어.’
[예?]
‘다시 줄 테니 뱉으라고.’
[으븝! 악!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먹던 걸 가져가시면···아악!!]
항변하는 악마의 입을 꿀밤 한 방으로 닫아버린 뒤, 슥슥 닦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정수 파편.
스아아아···.
파편뿐이라도 지옥 마력의 집약체인 만큼, 사특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테이블 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힘없이 반쯤 감겨있던 성주의 눈이 거의 반 배쯤 커지고, 원탁의 나머지 신하들 역시 희미하게 얼굴을 꿈틀거렸다.
사악한 마력에 홀렸다기보다는, 그저 두려움에 가까운 반응들이었다.
저 정수의 주인인 악마에게 죽을 뻔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악마를 단칼에 썰어버린 존재에 대한 두려움.
펠버와 달리 댈런은 성주에게 위로 따위 건네지 않았다.
때로는 적당한 두려움이 곁들여져야 효과적인 대화가 오가는 법이니까.
적당한 순간에 필즈의 바람 결계를 응용한 술식으로 지옥 마력을 억누른 그가 입을 열었다.
“오로바스의 정수 파편이오. 대공도 아닌 하급 악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름 없는 악마는 아니지.”
***
순간이지만 원탁을 휩쓴 지옥 마력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침묵을 지키는 성주와 신하들.
댈런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심문관 카스타챌드가 처치한 머리 다섯 개짜리 도마뱀 악마의 이름은 리플롭스. 역시 이름을 얻어낸 하급 악마지. 이런 악마를 둘이나 보냈소.”
“알고는 있소. 하지만···대체 어째서요?”
“간단하오. 그만큼 전력이 많다는 소리요.”
방어가 탄탄한 중앙부 대신 머나먼 방어선의 끄트머리를 손에 넣은 뒤, 그렇게 얻어낸 계륵 같은 이득으로 어떻게든 유리한 돌파구를 찾아내는 건 에낙사구스의 행동 방식에 가까웠다.
쑴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악신이 아니었다. 놈은 전장의 큰 판을 짜는 전략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싸움에 미친 그 악신이라면 차리나가 전력을 집중시킨 전선 중앙부를 보고, 신나서 자신도 대부분의 병력을 투사할 터.
그런 와중에 이런 변방까지 악마가 둘씩이나 흘러나왔다는 건, 그만큼 전체적인 전력 자체가 기존의 관측을 아득히 상회한다는 의미였다.
“쑴이 소환한 악마는 스물 언저리가 아니오. 못해도 두 배. 아마 그 이상이겠지. 머지않아 전선의 중앙부에서 큰 싸움이 있을 거요.”
거의 예언가처럼 내뱉는 말. 허나 근거 없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내분으로 멸망한 경우를 제외하고, 쑴의 군세에 의해 차르국이 멸망했을 회차는 언제나 같은 양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쑴의 공세는 언제나 가장 두꺼운 방어선 한 곳으로 집약되었다.
아무리 차르국이 강성한 제국이라 한들, 수십의 악마가 동원된 대공세를 막는 건 쉽지 않은 일.
방어선이 무너진 뒤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버텨내곤 했지만, 시간만 벌었을 뿐 열에 아홉 회차는 결국 멸망하곤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변방 성채의 안위가 아니오. 성채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당장 전선 중앙부로 지원을 가야 하오.”
“잠깐. 지금 당신의 말 한마디로 방어선을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무리 그대의 명성이 높다 한들, 어디까지나 용병일 뿐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하오만.”
성채에서 병력을 빼내야 한다는 말 때문일까.
지금껏 침묵을 유지하던 신하 중 하나가 발끈했다.
“거기다 오십이 넘는 악마가 소환됐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우리 차르국은 수백 년간 북부의 악마와 싸워왔소! 그래서 흑마법사가 아님에도 최소한의 상식 정도는 알고 있지. 악마를 소환하려면 그만한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거 말이오.”
“쯧쯧. 어리석은 소리 말게나. 대륙의 음지에 숨어든 악은 자네의 생각보다 많다네.”
신하에게 대답한 건 댈런이 아닌 펠버였다. 노인은 황금빛으로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상식이라···얼마나 악마들에 대해 잘 아는지 확인해볼까. 보아하니 자네의 기억 속에 악마와 싸운 경험이라고는, 외조모가 남긴 흑마법의 술식서를 갈등 끝에 몰래 폐기한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만.”
“그, 그게 무슨···!”
“물론 악마의 유혹에 저항한 것은 대단한 일이나, 좁은 우물에서는 경험할 수 있는 일들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는 말이네.”
갈색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흘리는 웃음. 가문의 비사를 들킨 신하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신하에게서 시선을 뗀 펠버가 눈을 돌려 원탁을 훑었다. 하나둘씩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신하들.
노인의 황금빛 안광을 마주하려는 이는 없었다. 펠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주에게 말했다.
“성주, 예로부터 악신들이 서로 반목하는 존재였다는 것 정도는 알 거요. 허나 까마득한 과거, 역사에서 지워진 고대의 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소이다.”
“······.”
“남부의 성기사단이 라필렘의 공격을 받았고, 에낙사구스는 미궁도시를 포함한 대륙 전역을 노리고 있소이다. 테모므론이 오래 전부터 제국 동쪽에서 인간의 영토에 눈독을 들이고 있음은 잘 알 것이오.”
한층 더 깊은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여전히 성주에게만은 부드러운 목소리.
허나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의 이면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어떤 기묘한 울림이 담겨있었다.
원탁 위의 공기를 장악해가는 황금빛 울림.
사람의 심신을 뒤흔드는 초월자의 마력.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타인의 시간선을 들여다보고 조작할 수 있는 권능이 은밀하게 개방되며, 각 사람의 인생에서 심적으로 가장 약해지던 순간을 파고들어 이 순간에 고정시킨다.
어느 정도 감각이 뛰어난 초인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날 때부터 손에 쥔 권력만 있을 뿐 일반인에 가까운 이들은 저항은커녕 눈치챌 수조차 없는 이능.
사실상 설득이라기보다는 집단 세뇌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댈런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몸을 슬쩍 뒤로 젖혔다.
“얼마 전 미궁도시에서는 에낙사구스와 라필렘이 협력을 했다더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소이다. 쑴이 북부에 이 정도의 전력을 투사한 건, 악신들의 연합이 구성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오.”
“그러면···어떻게 해야···하오?”
“전선 중앙에서 지원 요청이 왔을 때는 이미 늦소이다. 당장 지원군을 파병해야 하오.”
“알···겠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성주.
원탁에 앉은 신하들도 다르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것마냥,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의의 말만을 반복할 뿐.
당장에는 저렇게 멍청해 보여도, 권능에서 벗어나고 나면 전혀 어색함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물론 지금 ‘설득당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을 테고 말이다.
“······.”
살짝 힘에 부친지 옷깃으로 식은땀을 닦아내는 펠버를 보며, 댈런은 묘한 감상에 잠겼다.
군주의 명령 없이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 대한 책임이나, 심지를 뒤흔든 뒤 세뇌에 가까운 방식으로 지휘관들의 결정을 유도한 것에 대한 가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단촐하고, 짧은 단상.
‘내 주문쟁이 캐릭터들은 왜 저런 거 못 했냐.’
그건 이전 회차에서 비슷한 시도를 할 때마다, 성주들의 경비대와 본의 아닌 싸움을 벌여야만 했던 과거에 대한 한탄이었다.
썩을.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라고.
***
출정 준비는 빨랐다. 병사들은 한나절 만에 든 짐을 챙기고 성문을 나섰다.
지휘관이 무능하다고 병사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차리나가 개편한 철혈군대의 방식대로 모집되고 훈련된 병사들은, 그 능력과 규율에 있어서 다른 어떤 나라의 군대들보다도 뛰어났다.
성채를 운영하고 경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천에 달하는 병력이 좁다란 계곡길을 따라 오와 열을 맞추고 진군했다.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진형의 한가운데, 훈련된 사냥개들이 끄는 썰매 위.
댈런의 옆자리에 앉은 루시아가 문득 말했다.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