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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신의 검(2)
“···어떻게, 내 앞에서 무기를!”
용인이 거멓게 죽은 피를 토해내며 소리쳤다. 그 말에 댈런은 루시아의 검을 힐끗 쳐다봤다.
적당한 폭과 길이의 양날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새하얀 검면을 따라 새겨진 선명한 물결 문양은 이 검의 비범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성검이군. 세 번째 성검. 레레도나텔.”
“예. 단장님께서 평소에는 결코 사용하지도, 꺼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단지?”
루시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의 선물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줄 거라고······.”
뒷말을 얼버무리며 검끝을 들어 두 악마를 견제하는 루시아.
댈런은 다 헤진 웃옷을 벗어 옆구리의 상처를 싸매며, 그녀가 남긴 말을 되새겼다.
‘과연 인도자. 그 머나먼 과거에서 이 순간을 내다본 건가.’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머쥔 미래의 편린과는 별개로, 전쟁신이 그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초점 흐릿한 두 눈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
한쪽 팔과 두 눈을 잃고서도 6위계에 닿은 초월자의 권능과 시야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그런 상념을 흘러넘기면서, 댈런은 대악마를 가리킨 채 타오르는 성검을 바라봤다.
단장이 예비해둔 저 성검은 루시아가 개방한 영역의 이능과 완벽한 조합이었고, 더불어 용인과 맞서는 이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검 레레도나텔. 벼락을 부르거나 하는 신적인 권능은 없지만, 검을 다룬다는 개념에 한해서는 그 어떤 방해나 훼방도 허락하지 않지. 거기다···.’
레레도나라가 남긴 비검의 정수를 다룰 수도 있었고.
뛰어난 전사이자 술사였고, 동시에 성기사단에도 적잖은 공헌을 한 영웅 레레도나라.
게임에서도 설정상의 전설 정도로 표현되는 존재이지만, 그 유산은 대륙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댈런이 시체를 통해 회수한 스킬이 그런 유산이었고, 전쟁신이 직접 하사했다는 저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성검은 레레도나라가 평생을 사용한 검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녀가 창시한 비검의 정수를 품은 강력한 유품이었으니까.
“기사단의 문헌에 의하면, 세 번째 성검은 전쟁신이 레레도나라에게 비검의 깨달음을 하사한 매개체라고 한다네.”
허공에 황금빛 파문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곁에 내려앉은 노인이 말했다.
댈런은 펠버를 쳐다봤다. 노인의 안색은 살짝 창백했지만, 그 눈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광채는 여전히 선명했다.
“성기사단 쪽에도 해박했었소, 노인장?”
“본단에 연구차 한동안 머물지 않았었나. 나이가 들면 귀동냥으로 쌓이는 지식이 많아진다네. 푸근한 인상의 골방 늙은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꽤나 적절한 상대거든.”
“그렇군. 성벽은?”
“우리의 열혈 기질 동료들이 아주 잘 맡아주고 있지. 내가 손을 거들 게 없어 보이더군.”
펠버가 웃었다. 그는 댈런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네 혼자서 무리할 건 없다네.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도 홀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야.”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미소를 띈 노인이 나직하게 주문을 읊었다.
파아아앗···!
잔잔한 황금빛 물결이 흘러나와 상처를 적신다. 용혈의 기능이 복구되며 찢긴 근육과 피부에서 펄펄 끓는 증기가 뿜어졌다.
왈칵거리는 출혈이 멎고, 흉터 하나 없이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
“···끌끌, 여전히 자네의 시간선에는 손을 댈 수가 없구먼. 자네의 운명을 쥔 건 누구인지 모르겠어.”
“그럼 이건 어떻게 한 거요?”
“자네의 육신을 파고든 저주에만 손을 댔다네. 강력한 저주이긴 하지만 시간선을 다루는 입장에서는, 생명의 역동성보다야 뻣뻣한 기물이 만지기 수월하지.”
“···역시 노인장도 주문쟁이군.”
“응? 무슨 소린가?”
펠버가 고개를 기울였다. 댈런은 대답 없이 픽 웃었다.
“···성벽 위의 그 마법사인가.”
그때 용인이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댈런은 놈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성검에 꿰뚫렸던 놈의 상처는 겉보기에 어느정도 아물어 있었다.
비늘이 다시 자라지는 않았으나, 피가 굳고 딱지가 앉은 모습.
물론 고통에 표정이 순간순간 일그러지는 걸 보아하니, 내부는 여전히 진탕이 되어있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단마의 백염에 성검까지 더해진 루시아의 권능은 대악마의 재생력에도 치명적이었으니까.
“타알마드 공, 어떻게 하시겠소?”
용살창을 꽉 쥐고 이쪽을 견제하던 갑주가 물었다. 용인은 으득 하고 이빨을 갈며 대답했다.
“···성기사만 노려라. 시간선을 다룬다고 해봤자 잔재주지. 저 년만 죽이면 우리가 질 일은 없다.”
“이해했소.”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웃기는 놈들이네. 누가 그렇게 해준대?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전처럼 온몸에 활력이 도는 일은 없었다.
거의 한계까지 몰린 육신. 바닥에 가까워진 체력과 마력.
그럼에도 아직 조금의 여력은 남아있었다. 아까처럼 공격적으로 몰아붙이지는 못하지만, 기사단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에는 딱 맞을 정도였다.
“루시아. 아무 생각 말고 놈들의 심장을 노려주시오. 방어는 내가 맡겠소.”
“나도 함께하겠네. 원래 대지 계열 술식은 방어에 최적화된 편이야.”
펠버가 재빠르게 수인을 맺어내자, 황금빛 파문이 발 아래에서 일렁이기 시작한다.
댈런도 어깨를 풀었다. 그의 의지에 잿빛 대지와 저 위쪽의 먹구름이 다시금 울음을 토했다.
“···전쟁의 신이시여.”
성기사의 육신에서 새하얀 성광이 번뜩이고, 두 대악마의 권능이 꿈틀거린 순간.
━━━━!!
무너진 천공요새의 폐허 위.
두 대악마와 세 초월자가 충돌했다.
***
먼저 내달린 건 용인이었다.
[크아아아아!!]
폐허를 쩌렁쩌렁 울리는 전성과 함께 길게 늘어나듯 솟구치는 놈의 신형.
“엘르― 달타둠!”
쿠구구구구!!
펠버가 주문을 영창한 순간, 폐허를 뚫고 치솟은 거대한 토둔이 그 경로를 막아선다.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답게, 어지간한 성채의 성벽에 필적하는 두께와 중량의 토둔.
“크아아아아!”
그러나 용인이 표효와 함께 내지른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토둔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박살났다.
당연하겠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촤자자자작―
박살난 토둔에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더미들 사이, 수백 가닥의 뿌리덩굴이 자라나며 용인의 앞을 가로막는다.
필로폰에게서 받은 식목계 마법 개론에서 익힌 두 가지 주문, ‘급속 발아’와 ‘살아 움직이는 뿌리’의 조합.
댈런과 펠버는 몇 달간 함께 싸워오며 서로의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바.
5위계에 접어든 두 술사의 협동은, 주문의 잔흔마저 또 다른 주문의 촉매로 삼는 지경까지 닿는다.
“이딴 잔재주를!”
용인이 눈앞을 가로막은 뿌리덩굴을 향해 손을 뻗어냈다. 그 순간 덩굴의 표피가 쩌적 갈라지며 불꽃을 토해냈다.
「발화(發火)」
「성류옥(聖蘲獄)」
순식간에 용인을 둘러싸고 타오르는 성화의 창살.
그 창살 틈으로 파고든 건 한 줄기의 이질적인 기척이었다.
────푸확!
심장을 꿰뚫고 빠져나온다.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성검의 궤적은, 피할 수도 막아설 수도 없었다.
“끄아아아아아!!”
고통에 비명을 토하는 용인이 우악스런 손길로 창살을 잡아채고.
으지지지직!
비늘이 타들어가는 것마저 아랑곳않고 감옥의 창살을 찢어발긴 순간, 저 높은 하늘에서 거뭇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알마드 공!”
“캬학, 성기사를···죽여!”
하늘에 나타난 건 묵빛 갑주였다. 먹구름을 등지고 떨어지는 육중한 신형.
동료가 부상당했음에도 도우러 가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상대의 유일한 공격 수단을 무력화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나는 지옥 무기고의 열쇠이니―!”
쉬이이이익!!
놈의 의지가 발현된 순간 주변에서 공간이 일렁이더니, 불현듯이 나타난 수백 자루의 창검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하나하나가 지옥 대장간에서 주조된 무기들.
이 세상에 풀려났다면 흑마법사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나섰을 사특한 병기들이었다.
“노인장!”
손 안에서 뇌전을 끌어올리며 소리친다. 말하기도 전에 펠버는 이미 수인을 맺고 있었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황금빛 정광이 발밑에서 일렁이는 동심원을 그리고, 퍼져나간 동심원을 기점으로 구축된 황금빛의 돔.
두두두두두두두!
수백 점의 무구가 황금의 돔을 강타했다. 기괴하게 생긴 병기들이 경계를 넘는 순간 황금빛 마력에 사로잡혔다.
파지지직―!!
이글거리는 지옥불. 공간을 핥아대는 핏빛 마력 줄기.
무구에 서린 수천의 원혼들이 울부짖으며 섬뜩한 한기로 일대를 잠식한다.
마치 당장에라도 자신을 휘감은 황금빛 마력을 떨쳐내고 목표의 피와 살점을 탐하겠다는 듯이.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다시 한 번 전성으로 떨쳐낸 영창이 그 사특한 의지들을 무위로 돌린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깥으로 폭발하는 황금빛 돔.
지옥 병기들의 의지와 그 병기들의 시간을 돌려버리는 권능이 충돌하며, 서로가 서로를 상쇄한 채 단순한 힘의 폭발이 되어 흩어진다.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수백 점의 창칼들. 그 사이를 묵빛 갑주가 뚫고 내려오며 공방이 이어졌다.
파지지지직!
내던지는 뇌전의 줄기. 피하고 받아치는 사이 성검이 빛살처럼 심장을 찌른다.
코앞까지 접근한 용인과 화염 갑주를 두른 댈런이 순식간에 백 합이 넘도록 주먹을 주고받고.
그 틈을 노려 등을 베어낸 용살창의 저주를 황금빛 정광이 무효화한다.
꽈릉─ 쿠과과과과···!!
다섯 인영이 교차할 때마다 언덕이 내려앉고 토사가 파도가 되어 치솟는다.
파괴의 규모만 따지면 수만 군세가 격돌하는 성벽 앞의 전장보다도 더욱 격렬한 싸움터.
시간이 갈수록 백염이 일렁이는 관통상이 두 대악마의 육체에 누적되어가고, 이쪽의 피로와 상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인리를 초월한 괴물들임에도 영원히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서로가 서로의 초월성을 갉아먹는 사투 속에서, 싸움의 향방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꽈릉―!
하늘에서 한 줄기 뇌전을 뽑아내 갑주를 강타한 댈런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말했다.
“노인장. 잠시 시간을 벌어주시오.”
격렬한 전투 사이의 찰나. 대답 없음이 곧 수긍을 의미한다.
앞으로 성큼 나선 펠버가 전력으로 황금빛 장막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반개한 댈런의 의식이 전장을 굽어봤다.
「몽환추적(夢桓追跡)」
「회백전도(灰白全圖)」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흑백 음영의 전장.
성기사단과 하이 오크들의 활약에 대부분의 악마는 쓰러지고 남은 건 수만 마리의 마물들 뿐이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댈런의 시선이, 그 치열한 성벽 주변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찾는 건 알림창이 떠오른 잿빛의 시체들.
전장 곳곳에 흩뿌려진 지난 회차의 유산이었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은빛 투구 기사단 선임기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모두 합해 열 구에 가까운 시체들.
두 대악마에게 죽은 것 외에도, 전장에 흩뿌려진 가능성의 씨앗은 상당한 규모였다.
「칠연답산(七聯踏散)」
「회명(回冥)」
닳고 닳은 집중력을 쥐어짜 사방으로 신형을 퍼뜨린다.
나뉜 신형 하나하나는 그림자인 동시에 실체.
어떤 술식을 이용한 환상이 아니라, 공간을 빗겨내며 원본의 일면을 투영한 분신체다.
늘어난 여섯 체의 육신이 잿빛 음영을 등지고 전장을 휩쓸며, 곳곳에 흩뿌려진 가능성을 회수한다.
[속박된 사령술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마력 +1]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양측. 사력을 다해 유지중인 팽팽한 균형은 언제 어느 쪽으로 깨질지 모른다.
[은빛 투구 기사단 선임기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기량 +1, 실라의 은빛 전신갑주]
그렇기에 아직 닿지 못한 가능성들에서, 최후의 향방을 결정지을 공세의 불씨를 지펴낸다.
[악마의 창끝에 꿰인 사제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지능 +1, 치유의 기도(D)]
[무너지는 성벽을 일으킨 장인의 시체를···.]
[계승 보상 : 기량 +1, ···.]
[고문을 버티지 못한 마법사의······.]
[계승 보상 : ······.]
이미 본신의 힘을 모두 소모한 상태라면, 그에 따른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외부에서 새로운 힘을 들여오면 되는 것.
[악마의 도시락이 된 이름 없는 병졸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근력 +1]
드넓은 전장의 마지막 시체를 회수한 댈런이, 반개한 눈을 떠 앞을 바라본 순간.
와장창―!
“커허···!”
두 대악마의 맹공에 황금빛 장막이 마침내 깨져나가고, 그 역풍에 얻어맞은 펠버가 허공에 붕 떠서 날아왔다.
“쿨럭! 컥, 커헉!”
무리해서 시전한 영역의 권능. 거기에 술식이 박살나며 생긴 여파.
거친 기침소리에 검붉은 핏덩이가 줄줄 흘러나온다. 갈색 수염에는 이미 죽은 피가 한가득이었다.
“탑주님!”
성검의 제어에 집중하던 루시아가 황급히 다가가 신성력으로 그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댈런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는, 그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노인장, 루시아. 고맙소.]
육성이 전성이 되어 울려퍼진다.
쿠웅.
발걸음은 진각이 되어 지면을 내려앉힌다.
열 구에 달하는 시체를 회수하며, 순식간에 축적된 능력치로 극한까지 고양된 육체과 정신.
그건 마치 고열을 앓다가 어느 순간 느껴지는 탈력감, 혹은 수 시간 동안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이었다.
[후우.]
작은 한숨에 열기가 공기를 일그러뜨린다. 숨결 사이로 희끗 내비치는 검붉은 불꽃의 그림자.
공기의 무게마저 가벼웠다.
아니, 정확히는 원래 그게 무거웠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이미 한계까지 체력을 소모했기에, 아마도 이 고양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터.
그럼에도.
[남은 건 내가 마무리하겠소.]
넝마가 된 악마 두 마리의 경험치를 수급하는 데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회백투영(灰白鬪影)」
산뜻한 고양감 속, 댈런의 신형이 불현듯 흐릿해지고.
「이팔지순(二八至瞬)」
───쩌저저저저적!
다음 순간,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묵빛 갑주의 판금에 스물여덟 군데의 권흔(拳痕)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