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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궁전의 왕(1)
영역을 개방할 수 있는 초월자의 경지.
모니터 너머에서 수백 회차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곳에 닿은 캐릭터의 숫자는 채 열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초월의 자리에 오른 캐릭터를 위해 각각 소모된 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무려 백수십 시간 이상.
모니터 너머에서 보낸 시간이 그만큼이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아간 인물의 입장에서는, 족히 수십 년에 달하는 세월이었겠지.
“크아아아악!”
한순간에 여기저기 우그러져 걸레짝처럼 변한 묵빛 갑주가, 고통스레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댈런은 자리에서 천천히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를 휘감는 바람의 감촉. 신선했다.
“이런 느낌이군.”
같은 하루, 동일한 한 시간이라도 사람마다 사용하는 밀도가 판이하게 다르다던가.
난세를 보내는 영웅이 보낸 수십 년은, 어쩌면 범인의 수천 수만 년과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어마어마한 인고의 시간을 통해 빚어진 심상의 정수. 원래라면 댈런이 그 극치의 깨달음을 넘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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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댈런
레벨 : 37
[근력 : 55] [기량 : 48] [체력 : 43]
[감각 : 42] [지능 : 43] [마력 : 45]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고유 스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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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사실상 반신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의 능력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권로를 읽을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읽혔는데···힘을 숨기고 있던 건가?”
“글쎄.”
“아니야. 그럴 수는 없다. 이토록 완벽한 위장은 불가능해. 그것도 본인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서, 대체 어떻게···아니, 왜?”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투구 사이의 안광.
댈런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영웅이 쌓아올린 수십 년의 무게. 일반적으로 그 과정과 밀도를 온전히 감당해내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허나 능력치로 표현된 댈런의 잠재력은 일반적인 궤를 한참이나 벗어났고.
한술 더 떠서 그의 영역에는, 초월자 본인에게서 직접 전수받은 심상의 결과물이 펼쳐져 있었다.
‘이쯤이면 흉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생각을 갈무리하며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회명(回冥)」
「팔연답산(八聯踏散)」
잿빛 그림자가 일렁이는 동시에, 댈런의 거체가 흐릿해졌다.
찌지지지직─!
공간이 찢어지고, 댈런의 모습이 증발하듯이 모습을 감춘다.
다음 순간 갑주의 전후좌우 여덟 방위를 모두 점한 댈런의 신형. 각각의 공세를 뻗어내며 팔방위의 급소만을 노린다.
두두두두두두―!
“카아아아악!”
갑주를 중심으로 수십 번의 충격파가 터져나오고, 변형되다 못해 찢어진 판금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새어나온다.
“타, 타알마드 공···!”
성큼 다가온 죽음의 예감에 필사적으로 창을 찌르며 동료를 부른다.
댈런은 뻗어오는 창을 가만히 보다가 그냥 잡아버렸다. 우뚝 하고 멈추는 창대.
“무···커억!”
콰앙!
흉부 판금이 완전히 우그러진 갑주가 저 멀리 튕겨나가고, 용살창을 빼앗은 댈런이 손안에서 그걸 한 바퀴 돌렸다.
“뒈져라!”
동시에 갑주의 부름을 받고 내달린 용인의 신형이 코앞이었다. 묵빛 갑주의 창을 뺏어든 탓에, 용인의 권능으로 팔다리가 급격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적창.’
그러나 댈런은 창을 놓지 않았다. 격돌 직전의 순간. 아득하게 늘어나는 시간 감각 속.
[···그래.]
댈런은 심상 너머의 고룡을 불렀고, 설산의 절벽 위에 걸터앉은 용이 몸을 일으켰다.
[네 본신의 능력이 이 정도까지 향상되었다면, 심장의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서도 잠깐 정도는 가능하겠구나.]
용이 운을 뗌과 동시에 나른해지는 근육에 새로운 활력이 흘러든다.
혈관을 태워버릴 듯한 힘의 밀도가 대악마의 권능에 저항해냈다.
[한 번 보여줄 테니 잘 기억해두거라. 최대한 네 전투 방식에 알맞게 가르쳐주마.]
그리고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울리는 것과 함께, 팔다리의 주도권이 누군가에게 넘어갔다.
***
저벅.
허상인 듯한 발소리.
그와 함께 나타난 건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인영이었다.
조금 흐릿한 형체로 나풀거리는 묵색의 도복. 붉은 기가 뒤섞인 검은빛의 머리칼.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장면 속에서, 적창은 고개만 살짝 돌려 댈런을 쳐다봤다.
붉은 기가 조금 감도는 새하얀 얼굴 위로, 두 가지 빛깔로 번뜩이는 눈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심장이 꽤 빨리 뛰는구나. 오랜만에 본 내 형상에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더냐?]
쿵. 쿵. 쿵. 쿵.
심장이 요동친다. 댈런은 헛웃음이 나왔다.
적창은 역사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최강의 진룡 중 하나.
아무리 진룡의 심장으로 만들어낸 용심장이라고 해도, 그 힘을 감당하면서 요동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억지로 심장을 뛰게 만들어놓고 그런 소리라니. 어디서 도끼병이라도 걸려 오셨소?’
[도끼···뭐? 뭐라 했느냐?]
‘고향 말이니 신경 끄시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제 임자 있는 몸이라.’
[쯧. 고리타분하긴. 뭐, 상관없다.]
미간에 주름을 만든 여인이 성큼 다가오며 발끝을 들어올렸다. 가까워지는 얼굴. 가벼운 접촉.
팔다리의 주도권이 이미 넘어간 상태에서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적창이 낮게 속삭였다.
[인간으로서의 네 일면은 그 아이든 마녀든 아무나 가지라 하거라. 네 용의 면모는 내가 가져갈 터이니. 어차피 우린 이미 하나된 몸 아니더냐?]
‘···헛소리는 됐고 앞이나 좀 봐주시오.’
[풋, 알겠느니라. 시간이 없으니 잘 익혀보거라.]
시간 없다면서 헛짓거리는 잘도 하는군. 어이가 없어서 내심 고개를 젓는 사이, 창을 든 손이 저 혼자 움직였다.
다시 빨라지는 시간감각.
창 든 손이 간결하게 앞으로 내뻗어진다.
핏━
용인의 손톱과 창끝이 만나고, 가벼운 소음과 함께 두 신형이 교차된다.
쩌적─ 쿠구구구구!
창을 휘두른 궤적을 따라 지면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지하의 암반 깊은 곳까지 갈라진 땅.
뒤를 돌아보니 용인은 왼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감싸쥐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놈의 오른팔은 손가락 두 개와 어깨의 살덩이 한 움큼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적창! 어째서 필멸자에게 힘을···용신의 처분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
[웃기는구나. 이름마저 빼앗기고 영락한 이가 뭘 더 두려워할 수 있겠느냐?]
피를 토하며 외치는 용인과, 댈런의 입을 빌려 코웃음을 치는 적창.
명색이 용인에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타알마드의 육신은 제대로 재생되지 못하고 있었다.
용살창의 저주를 담은 창과 그 위에 이글거리는 검붉은 화염까지.
용의 피가 섞인 놈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기 때문이겠지.
“···제기랄!”
불리함을 깨달은 용인이 피막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시간을 끌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나저나 요정족의 창술이라···댈런, 네 육신은 재미있는 기술을 꽤나 알고 있구나.]
그러나 날개 정도로 노룡의 손을 벗어날 순 없었다.
스가각─
허공을 딛는 발걸음. 공중에 연달이 일어나는 파문을 따라, 댈런의 팔과 다리가 우아한 호선을 그린다.
두 팔에 번갈아 쥐어지며 검붉게 허공을 수놓는 창의 궤적. 그 자취를 따라 셀 수 없는 꽃봉오리가 피었다 사라졌다.
용인이 대처하기도 전에, 그 궤적은 놈을 지나치며 꽃을 피웠다.
「적화주란(赤華株亂)」
단단한 비늘이 저항 없이 녹아내린다.
질긴 가죽을 가른 열기가 용인의 전신에 붉은 꽃을 수놓았다.
본디 머나먼 동방에서 건너왔고, 시체를 통해 회수한 스킬 ‘화영창술’.
적창은 요정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창술의 극의를 소화해,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스파파파팟─
흐드러진 꽃의 향연을 맺으면서도 과도한 소음이나 충격은 없었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은 유려한 춤사위 속에 묻혀갔고, 충돌의 여파마저 검붉은 화염의 열기에 녹아버린다.
“타알마드 고···컥!”
우그러진 갑주를 추스르고 하늘로 날아오른 대악마. 지옥불에 천 년이 넘도록 연단된 투르 아라둔의 육신까지도 부드럽게 갈라버리는 창끝.
수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반으로 갈라진 묵빛 갑주와, 심장이 꿰뚫린 용인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이미 한참이나 힘을 소모한 대악마의 화신체에 불과한 놈들이다. 시간을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더 이어가면 네 몸의 주도권을 되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적창이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창이 지금처럼 전면에 나서는 건 물론 숨겨진 강력한 한 수이지만, 그 힘에 취해 용심장이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상으로 내려간 댈런은 용인의 몸뚱이 곁, 잿빛 네 구의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용인에게 씹어먹힌 궁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기량 +2, 요정의 결목궁]
[한입거리 용병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시산혈해에 파묻힌 성기사의 시체를 회수했···.]
[붉은 주문의 계승자의······.]
네 구의 시체를 회수하며 능력치를 비롯해 보검과 엘프제 활 한 자루, 그리고 새로운 염열계 술식 하나를 얻었다.
적 하나 쓰러뜨리고 얻은 것치고는 나름대로 짭짤한 보상. 댈런은 남은 시체 하나로 시선을 돌렸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
- 멸망에 저항했던 전격술사의 시체다. 수많은 기연으로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으며,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홀로 대륙 곳곳에서 멸망에 맞섰다. 최후에는 쑴의 파멸궁전에 직접 쳐들어가 악신 간의 내분으로 힘이 약해진 쑴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 탓에 주군에게 충성스런 대악마였던 투르 아라둔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저건 나중에 회수해도 되겠지.’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
저 전격술사는 악신을 소멸시킨 단 두 번의 성공 시도 중 하나였다.
수많은 노하우와 공략법이 정리되어가던 플레이 중후반의 끝자락.
댈런은 정석적인 마법사 캐릭터로 어디까지 키울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사전 기획만 수십 시간을 투자해가며 철저하게 준비해서 하나의 캐릭터를 육성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전격술사는, 전 회차를 통틀어 세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한 존재.
‘회백의 투사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면···이번에는 정말로 답이 없으니까.’
회백의 투사와의 싸움도 결코 쉽지 않았다.
단순히 능력치로만 따지면 그를 손쉽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쌓아온 세월과 그에 따른 심상이 생각 이상으로 깊고 넓었기 때문.
초월자 간의 싸움은 단순한 능력치의 우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초월자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이미 범인을 한참이나 넘어선 잠재력의 보유자라는 의미.
쑴의 갑옷만 구긴 회백의 투사도 그러했을진대, 아예 파멸궁전에 쳐들어가서 쑴을 족친 이 전격술사는 어떻겠는가.
아무리 악신 간의 내분으로 약해진 상태였다고는 하나, 악신 하나를 소멸시키는 건 그 어떤 초월자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돌대가리 오크들이랑 수십 년 같이 산 댈버랑은 달리, 정상적인 주문쟁이면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기는 한데···아니, 오히려 더 안 통할 확률이 높겠군.‘
그나마 남은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해보던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문쟁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상식적인 대화가 통할 리 없지.
성벽 쪽에서는 아직 싸움이 다 끝나지도 않은 상황. 우선은 펠버와 루시아를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가, 남은 전투를 마무리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이 있는 남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그래. 내 시험을 잘 통과했군.]
공기가 얼어붙었다.
[박수를 보내지.]
자박.
작은 발소리.
등 뒤. 북쪽이었다.
펠버를 치료하던 루시아가 이쪽을 돌아보고, 펠버 역시 고개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어붙은 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씩 밀리는 듯하던 새까만 먹구름이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며 서로 소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흐─]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속삭였다.
[미안. 기다리려고 했는데···너무 재밌어 보여서 주체할 수가 없었어.]
“······.”
[대신 우리 둘만의 전장을 만들어줄게. 다른 건 다 잊고, 우리 둘만.]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사악한 기운이 전장을 뒤덮었다. 다음 순간 수만에 달하는 마물의 군세가 한 줌 핏물로 변했다.
무너진 두 성벽과 그 거리 위에 홍수처럼 넘쳐흐르는 검붉은 핏물.
삽시간에 벌어진 무참한 살육의 현장에, 성벽 위의 모두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바라봤다.
[이러면 서로 더 힘을 뺄 필요도 없지. 안 그래?]
댈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 이제야 여기를 봐주네.]
그건 일그러진 검붉은 형상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맞은 것 같아. 그래서 난 너무 기뻐.]
유일하게 또렷한 두 개의 눈동자, 선명한 핏방울의 색채가 호선을 그렸다.
[예언의 주인공···우물이 쥐어짜낸 모든 가능성의 집합이라는 존재···다른 네 명의 머저리들보다 내가 너랑···가장 먼저 싸울 수 있다니. 히히.]
악신이 웃었다.
사악하도록 순수한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