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191화 (19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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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궁전의 왕(2)

[히히.]

광기에 물든 웃음.

그 웃음을 본 댈런은, 이 땅에 떨어진 이래 처음으로 지독한 무력감을 느꼈다.

‘이길 수 없다.’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은 수십 가지 가능성들. 그 모든 걸 더해도 이길 수 없었다.

5위계에 올랐음에도 또렷한 형체조차 볼 수 없다. 아마 성벽 위의 병사들 대부분에게는 저 일그러짐을 목도하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겠지.

[응? 왜 그래. 왜 망설여? 아까 그 재미난 불꽃 좀 꺼내보라니까? 아니면 번개라도?]

격양된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일그러진 형상 위로 불꽃과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공간을 짓이겼다.

댈런이 반응하지 않자 놈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치···어쩔 수 없지.]

이리저리 구르던 두 개의 눈동자가 댈런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루시아와 펠버가 있는 곳이었다.

[할 수 없다면 하게 만들어줄게. 인간들을 소중한 게 망가지면 강해지더라구. 그러니까···.]

[거기까지다.]

전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전성.

차리나의 목소리였다.

쨍강─

하늘 높은 곳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직후 일대에 어떤 전조도 없이 눈폭풍이 불어닥쳤다.

극한의 한기에 공간이 이지러지는 듯한 감각이 지나가자, 불현듯 나타난 건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술사들의 부대.

댈런과 악신 사이를 가로막은 채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이들은, 차리나를 필두로 한 왕실 마법사단의 정예들이었다.

“제 발로 모습을 드러냈구나, 파멸궁전의 왕.”

마법사들의 선두, 차리나가 말했다. 쑴을 향해 뻗어진 그녀의 손에는 새하얀 왕홀이 들려있었다.

마치 눈과 얼음을 조각한 듯한 왕홀. 거기서 꿈틀대는 마력은 서릿발 왕좌의 권능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녀의 뒤에 도열한 마법사단의 전력 역시, 한 명 한 명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수준급의 실력자들이었다.

전원이 4위계 이상. 독자적인 주문을 연구할 수 있는 수준의 고위 마법사들이다.

개중 뚜렷하게 남다른 존재감이 느껴지는 마법사 세 명은, 5위계의 벽을 넘어선 대마법사이자 마법병단의 지휘자들이겠지.

[흐음······.]

4위계 백여 명, 5위계 세 명과 6위계의 술사들.

마음 먹기에 따라 대악마의 진체까지도 토벌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그러나 쑴은 그런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턱을 쓰다듬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긁적이는 건지 일그러짐이 이리저리 비틀리더니.

[이러면 재미없는데. 난 너희들이랑 싸우러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어딘가 뾰로통한 목소리를 툭 내뱉었을 뿐.

[그러니까 죽어.]

꿈틀.

일그러진 형상의 얼굴 부분. 그 위에 붉은 색채가 또 하나 길쭉하게 늘어났다.

그게 죽 찢어진 입이라는 걸 눈치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것만으로.

구우우웅━━━━

세계가 찢겨나갔다.

형언할 수 없는 파공성은 귀로 들리는 대신 눈으로 보였다.

추락한 천공요새의 폐허 위, 발걸음을 따라 으스러진 공간이 부채꼴을 그려내고.

“스타티아···카학!”

“으아아아!”

일선에서 재빠르게 주문을 빚어내던 4위계 마법사들의 절반 가까이가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급하게나마 보호막 주문을 끌어올린 이들도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이도 다수.

[물러나세요.]

부채꼴로 으스러지는 공간을 가로막은 건 차리나였다.

새하얀 예복 아래, 양팔에 빽빽하게 새겨진 룬 문자가 한순간 빛을 발하고.

[에펠.]

[카스타.]

[스타티아.]

중첩된 전성으로 영창을 읊조리며 팔을 뻗은 순간, 왕홀 앞의 공간이 통째로 얼어붙기 시작한다.

쩌저저저적─!!

“댈런, 말씀드렸죠. 제 운명을 걸고 믿겠다고.”

으스러지고 얼어붙으며 폭발한다. 의지로 세계 자체를 덮어씌우는 초월적인 힘의 교차.

마력과 공간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광경 앞에서, 차리나는 댈런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간을 끌겠습니다. 힘을 회복하든, 아니면 뭔가 다른 수를 쓰든 하세요.”

“······.”

“차르국의 결말이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신형이 대답도 듣지 않고 흐릿해졌다.

공간의 틈바구니를 억지로 열어내는 걸 넘어서서, 스스로의 권능 하나만으로 공간과 세계를 완벽하게 주무르는 경지.

쯔가가가가각━━

동시에 쑴의 신형도 사라지면서, 붉고 푸른 두 기운이 나선을 이루며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냉기와 한기가 충돌하며 폭발한다. 서릿바람 속에서 불과 번개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소용돌이쳤다.

수십 명의 왕실 마법사들이 주문을 공명시키며 그 여파를 아슬아슬하게 무마시키고, 5위계의 술사 세 명은 중간중간 기회를 노리며 차리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뇌성과 함께 하늘이 이지러진다. 어느새 창공으로 치솟은 나선이 먹구름과 얼어붙은 하늘을 오가며 치고받았다.

[어쩔 생각이냐.]

적창이 물었다. 댈런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천천히 떨궜다.

쑴을 쓰러뜨린 건 단 한 번뿐이지만, 놈에 대한 공략법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연구했었다.

‘쑴의 가장 핵심이 되는 권능은 크게 두 가지다.’

놈의 끝없이 파멸궁전에서 용솟음치는 지옥불. 그리고 예측불허의 폭력성을 대변하는 붉은 번개.

놈의 휘하 대공들 중에서도 가장 최측근인 두 대악마가, 각각 전격과 화염에 어마어마한 내성을 가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만한 저항력이 아니고서야 쑴의 곁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

문제는 완벽하게 싸움에 미친 결투사인 악신 쑴의 특성상, 가장 정석적인 공략 루트는 오히려 놈과 동일한 속성으로 정면에서 치고받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하주염이나 청뢰가 알맞겠지만···그것만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적창의 흑염이라면 적어도 지옥불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텐데.’

다만 그러고서도 기껏해야 쑴의 권능 중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일 뿐.

붉은 번개에 육신과 영혼 모두 으스러지는 결말은 피할 수 없었다.

[도망치거라. 차리나가 시간을 끄는 지금이라면 벗어날 수 있다. 내 권능으로 너를 도울 터이니, 우선 물러나서 다음 기회를 엿보거라.]

적창이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짙게 묻어나는 제안.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격의 폭력 앞에서, 그 제안이 달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댈런은 여전히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어째서냐? 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딛기 위해 스스로를 한없이 영락시킨 상태야. 대륙의 절반을 불태울 수 있을지언정, 미궁도시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니···.]

“적창. 그렇게 살아남으면 뭐가 남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죽는 건 누구나 두렵소. 거기서 도망치는 건 너무나도 쉽지.”

스릉.

아공간에서 검과 손도끼를 꺼내들어 양손에 쥔다.

천천히 발을 옮겨 반토막난 대악마의 시체 곁으로 향했다.

“허나 살아있음의 소중함은 내 폐가 숨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

잃어본 이는 알 수 있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피자와 치킨의 느끼함. 목구멍을 톡톡 건드리던 탄산의 상큼함.

에어컨 아래에서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쓰잘데기없는 대화들. 뜨끈한 장판의 열기와 알코올의 취기.

기억에 남는 건 그런 시간들이었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족적들. 일상이라는 미명 하에 가려진 진짜 소중함들.

“한 번 물러서면 다음에도 또 물러서겠지.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쉬우니까.”

[······.]

“그렇게 물러서고 물러서서, 끝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지옥이 된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으면 뭐가 남소?”

초월의 자리를 거머쥐었던 회차들 중 하나.

수백 번의 실패로 클리어에 목말랐던 댈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세계가 멸망한 이후까지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고 무너지며 썩어버린 세계. 사자들이 울부짖고, 원혼의 비명이 끊임없이 메아리치던 살아있는 지옥도.

결말을 보고자 살아남았지만 엔딩 크레딧 따위는 올라오지 않았다. 허무함에 캐릭터를 지우고 게임을 종료했다. 그리고 매일 습관처럼 하던 게임을 무려 한 달이나 접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겪은 공허함이 그 정도였는데, 실제로 겪게 된다면 과연 어떨 것인가.

이미 일상을 한 번 잃어본 댈런이기에, 감히 그 느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잃었소. 두 번 잃을 수는 없지.”

그렇기에 다시 잃지 않겠다 결단한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과 후의 극명한 차이는, 창칼에도 상하지 않는 단단한 몸뚱이만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살아서 숨 쉰다는 것만으로는 삶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댈런은 물러나지 않고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시오.”

[···쑴을 상대하는 걸 말이냐?]

“아니.”

시체 회수. 댈런은 속으로 나직하게 읊었다.

그러자 잿빛 시체가 스르르 흩어지며 빛무리로 변하고, 물 흐르듯 손끝으로 빨려들어왔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받은 대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순식간에 내면을 채우는 충만함. 허나 완전하지 않은 감각.

“지금부터 쑴을 죽인 놈이랑 싸워야 하거든.”

이어지다 만 알림창을 마지막으로 댈런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뜬 순간, 그는 설산에 서 있었다.

***

휘이이······.

거센 바람과 눈보라.

깎아지른 절벽 너머 만년설 덮인 산봉우리들.

대자연의 경이에 압도될 만한 정경이었으나, 방금까지 초월자들의 전장에서 구르다 온 댈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설산의 낡디 낡은 오두막은 여전했다. 그 뒷마당과 사냥꾼의 이런저런 도구들까지도.

지난번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와 다른 점은 딱 하나뿐.

“···때가 되었나.”

바로 오두막의 뒷마당에 선 존재가, 거구의 남자가 아닌 로브를 두른 마법사라는 사실이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야. 정겨운 장소. 내 기억의 시작점.”

회백의 투사가 그랬듯, 로브 차림의 남자 역시 뒷마당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뜯어봤다.

그러면서 턱을 긁적이는 습관 역시 동일했다. 물론 비슷한 건 그것뿐이었다.

2미터가 훌쩍 넘었던 회백의 투사와 달리, 로브를 두른 남자의 키는 기껏해야 댈런의 어깨쯤 올까 한 정도.

얇은 선의 얼굴과 푸른 눈동자는 마법사 하면 흔하게 연상되는 이미지였다. 오두막을 찬찬히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자가 너라는 이야기군.”

살짝 찢어진 듯한 목소리. 댈런은 말없이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도끼는 제자리에 잘 달려있었다. 이번에는 성검도 곁에 꽂혀있었다.

“5위계. 하지만 단순히 위계로 단정 짓기에는 한없이 방대한 심상을 가지고 있군. 이미 벽을 뚫은 누군가를 만나본 모양인데.”

“······.”

“그렇다면 조건은 알고 있겠지. 나를 쓰러뜨려라. 나를 무릎 꿇렸던 절망보다 더 큰 힘을 눈앞에 보이고, 그로써 내 모든 걸 가져가거라.”

남자는 마치 극의 등장인물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야기했다. 설산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바람에 로브 자락이 펄럭거렸다. 길게 기른 머리칼도 흐트러졌다.

그 일장연설을 보며 댈런은 도끼자루를 슬슬 매만졌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의 진짜 육신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이곳은 심상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

이곳에서의 육신은 현실과 같지 않다. 댈런이 완전히 회복된 컨디션에 적응하는 사이,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도와달라는 게 이런 의미였느냐.”

자박.

가벼운 발소리의 주인은 눈앞의 마법사와 비슷한 키와 덩치였다. 짧게 쳐올린 검붉은 머리칼이 시야 언저리에 멈춰 섰다.

“6위계. 그것도 뇌룡을 능히 압도할 만한 역량이구나.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얻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캐릭터 하나 잘 키우긴 했지. 나름 고인물이었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솔직히 말하마. 차라리 돌아가서 차리나와 함께 쑴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댈런은 픽 웃었다. 이 양반 진룡씩이나 되면서 쫄릴 때마다 말 바꾸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댈런의 컨디션이 완전하기만 했다면, 차리나를 돕는 게 더 승산이 높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대악마와 사투를 벌인 이후, 바닥난 체력과 무너지기 직전의 몸뚱이로는 그나마 이쪽이 유일한 가능성.

적창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농담으로 입에 담았을 뿐

“잡소리는 끝났나.”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던 마법사가 말했다. 연설하듯 벌린 두 팔 그대로, 놈의 분위기가 반전했다.

“나는 간 보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선택지는 두 개다.”

쿠르르릉······.

하늘 위에서 울려퍼지는 뇌성. 댈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썩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산의 하늘이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리를 벗어난 적 없는 먹구름이 뭉개지듯 밀려나고, 그 너머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전격의 바다.

「영역 완전개방 :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두 팔을 펼친 마법사의 눈은 어느새 오색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증명하거나, 죽어라.”

“댈런, 조심···!”

적창의 말이 귀에 닿기도 전.

━━━┻┳┻┳┻┳┻┳┻┳┻

하늘을 가르고 붉게 뿌리내린 뇌전에, 세계가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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