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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1)
구슬땀이 맺힌 머리칼. 가슴께까지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
구릿빛 피부는 대장간의 열기에 매끄럽게 번들거리고, 푸른 눈은 미동도 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댈런은 오른손에 쥔 짧은 망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덩치 큰 난쟁이 댈루카힘.”
“···어디서 그 별명을 주워들었는지 모르겠군. 예언의 주인공이면 정말 전지하기라도 한 거냐?”
용골검의 주인. 천룡(千龍)의 대적자.
열일곱 진룡을 떨어뜨리고, 대룡 셋의 목을 꺾은 용살자.
휘황찬란한 위업이 그 인생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사실 댈루카힘은 처음부터 클리어를 위해 작정하고 키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처음 얻은 별명이 덩치 큰 난쟁이였을 정도로, 그저 무구 제작에만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던 회차.
허나 그렇게 시작한 캐릭터는 끝내 수십 마리의 아룡과 진룡을 쓰러뜨리고, 얻어낸 부산물을 이용해 초월의 벽마저 아득하게 넘어섰다.
단순히 일신의 무력만 막강한 게 아니었기에, 만들어낸 유물급 장비들로 영웅들을 무장시켜 미궁도시의 방어에 크게 일조하기까지 했고.
다른 초월자 캐릭터들의 회차와 비교해도, 댈루카힘의 회차는 유독 인류의 결사항전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댈런이 오래 전부터 미궁도시에서 르베론을 도와준 것 역시, 빠르게 성장한 미스릴의 제련자가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
“빨리 끝내지.”
물론 르베론이 있다 해서 눈앞의 대장장이가 남긴 유산이 필요없다는 건 아니었다.
지금쯤 미궁도시에서 한창 몸값을 올리고 있을 대장장이, 르베론 아하킴의 이명은 어디까지나 미스릴 제련자.
온갖 금속과 재료들을 다루는 데 통달한 그마저도, 용의 부산물을 다루는 데까지 실력이 닿지는 못했었으니까.
온몸이 신비 그 자체인 진룡의 부산물은, 미스릴을 한참 상회할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한 재료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그 재료를 다루는 비전을 이어받을 수만 있다면, 댈런은 물론이고 인류가 종말에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될 건 자명한 일.
찌직···.
손바닥에 박힌 단검을 뽑아낸다. 뼈와 근육에 난 구멍이 순식간에 메꿔지고, 그 위로 질긴 피부가 빠르게 덮인다.
대장장이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했다.
“용혈의 보유자군. 아니···반쯤은 용이나 다름없어.”
“눈썰미 좋은데.”
“필멸자가 용혈을 온전하게 흡수했다는 기록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서 진룡의 심장이라도 달여 먹었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말을 이어가는 중간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망치.
댈런은 그 희미한 까딱임을 놓치지 않았다.
쉭─
오감이 아닌 육감을 통해 들려온다. 공간을 가르는 미세한 소음은 댈런이 도끼를 던져낼 때와 유사했다.
재빠르게 휘둘러낸 단검 끝에서 어떤 이질감이 걸려들고.
까아앙!
직후 공간이 천처럼 벗겨지며 드러난 건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비수.
“···거기에 감각도 좋군.”
난쟁이의 룬 문자가 새겨진 비수는, 번뜩이는 날을 품고서도 존재감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어느새 착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대장장이. 댈런은 그 앞에서 실금이 쩍쩍 간 단검을 툭 떨어뜨렸다.
“단순히 초월자라 부를 수 없는 존재야. 한없이 이질적이고···또 방대하군. 우물이 예언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겠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선의 가능성을 삼켜왔느냐?”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악역 같잖나.”
피식 웃으며 대장간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수백 정의 무구가 번뜩이는 비좁은 출입문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 성문과도 같았다.
댈런은 어깨를 슬쩍 풀었다. 한 바퀴 원을 그린 손끝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내려앉았다.
‘성문의 직접적인 공략이 요원하다면, 요새의 성벽 자체를 부숴버리면 되는 일이지.’
짧은 상념의 끝에서, 허리띠에 머물던 댈런의 팔이 도끼와 함께 흐릿해진 순간.
대장장이의 짙은 눈썹이 팔자를 그리고, 그 입에서 우렁찬 시동어가 터져나왔다.
“엑시!”
순식간에 백수십으로 갈라진 유물도끼.
그에 맞서 빗발치는 수백 정의 창칼들.
고즈넉한 대장간의 지붕 아래, 두 갈래 무구의 폭우가 정면으로 교차하고.
콰아아앙─!!
설산의 숲 한복판에서 장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의 외진 숲 한가운데.
까아앙!
번쩍이는 금속광과 함께 오래된 나무 몇 그루가 단번에 날아간다.
나무가 죄다 쓰러진 작은 공터에는 창 한 자루가 박혀있었다. 댈런은 쇄설검을 들어 발밑의 창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묵직하군.”
땅에 박히고서도 끊임없이 기이한 울림을 토하는 묵빛의 창. 그걸 막아낸 쇄설검에는 실금이 쩍쩍 가 있었다.
“흑철과 미스릴을 섞어 만들었던 기병창. 중반부에 애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무게나 성능 모두 애매해서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인데. 모르는 사이에 개량이라도 했나?”
쉬이이익!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난데없이 어디선가 쏟아지는 무구의 폭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
위에서 내리찍는 뇌전의 태도(太刀). 허리께의 사각지대를 노리는 희끗한 화살.
판금에 수십 가지 술식을 덧댄 갑주가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움직임을 제약하며, 동시에 불붙은 대방패가 전면을 틀어막고 쇄도해 들어온다.
정교하면서도 어느 하나 도외시할 수 없는 공격들. 대장장이로서 초월자의 자리를 거머쥔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걸작들이다.
다른 초월자들에 비해 본신의 무력이 하잘것없음에도, 수십의 용을 떨어뜨린 무구들을 상대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짧은 판단이 지나가고, 댈런은 부러지기 직전인 쇄설검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답보(踏步)」
꾸우우웅─
발밑에서 퍼져나가는 동심원. 오래도록 쌓인 눈이 훅 밀려난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충격파에 쇄도하던 무구들의 공세가 아주 약간 주춤했다.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순차적으로 쌓아 올린 마력이 댈런을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밀려오는 공세에 맞춰 역습을 만들어낸다.
「합투권 : 역률(逆律)」
콰직!
팔꿈치로 갑주의 어깨를 찍어누르는 동시에, 타격점을 중심으로 마력을 회전시켜 반발력을 극대화.
그기기기긱!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하는 갑옷의 두 팔을 움켜쥐고, 그대로 당겨내 뜯어버린다.
「합투권 : 철격(徹擊)」
뻐어어엉!
날개뼈에서 시작된 마력이 주먹을 통해 발산되며, 날카로운 예기가 되어 마법 갑주의 흉부를 꿰뚫는다.
반의반 호흡도 안 되는 찰나에 갑주를 무너뜨린 댈런이, 재빠르게 물러서며 찍어누르는 태도의 일격을 피해냈다.
꽈르르릉···!
피했다고 끝이 아니다. 뇌성과 함께 태도에서 뿜어지는 전격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뇌룡의 뿔을 조각해 만든 손잡이. 오리할콘 뼈대에 미스릴을 덧씌운 검신.’
모니터 너머에서 몇 시간을 공들여 만든 무구에 대한 상념을 스쳐 보내고, 밀려오는 녹옥빛 전격의 파도 앞에 양손을 뻗는다.
「뇌조(雷條)」
파지지지직!
녹색과 푸른색이 뒤섞이며 얽힌다. 두 전격의 파도가 만나 깨지며 조금 남아있던 눈밭마저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호흡을 가다듬을 틈조차 없다. 축축한 땅이 퍽퍽 터져나가는 가운데, 수십 발의 비수와 화살이 사각을 틈타 파고들었다.
「술식갑주(術式甲冑)」
「백풍갑(伯風甲)」
「열풍(裂風)」
스가가가각―!
몸을 휘감은 회오리바람이 암기와 화살의 궤적을 한껏 비틀고.
「적화주란(赤華株亂)」
아공간에서 꺼낸 창으로 불붙은 방패를 부드럽게 가르며, 셀 수 없는 염열의 꽃봉오리를 피워올린다.
투과과과곽!
어디선가 날아든 열두 개의 비석이 공터를 중심으로 꽂히는 것과 동시에, 그 안쪽의 마력풍을 모조리 과부하시키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빙정(氷晶)」
「개화(開花)」
「백향근(百向根)」
손안에서 피어난 얼음꽃이 순백의 뿌리로 사방의 지면을 뒤덮으며, 모든 마력의 흐름과 비석마저 동결시켜 과부하의 의식 자체를 무위로 돌릴 뿐.
“다 끝났나?”
끊임없이 이어지던 공세에 순간적으로 생긴 공백. 댈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우드드득!
그러자 손끝에서 무언가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멱살 잡힌 대장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팬탈라군의 주술 부적에 백랑의 털을 섞어 만든 로브. 정면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몇몇 보스몹을 잡을 때 이용하곤 했지.”
“······.”
“초월자의 감각마저 속일 수 있는 암행 술식에, 어지간한 보스몹의 광역 공격 정도는 흘려보내는 방호능력까지. 하지만 광범위한 탐지 능력과 유도성 공격에 특화된 상대에게는 부적절해. 해제당하고 나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점이···.”
“―룩스!”
뻐어어엉!
시동어를 내뱉자 폭발하는 로브.
동시에 대장장이가 낀 반지가 깨져나가며, 내장된 점멸 술식이 발동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벌려놓았다.
“···문제였는데.”
댈런은 폭발에 얼얼해진 손아귀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건 내가 모르는 물건이군.”
“역천의 우물 속에서 예언의 성취를 하릴없이 기다려봐야 무얼 더하겠느냐.”
방금의 폭발로 덥수룩한 수염을 반쯤 태워먹은 대장장이가, 남아있는 불씨를 탁탁 털어냈다.
“텅 빈 공허 위에 다시 대장간을 세우고 물건들을 만들어봤는데···그게 이렇게 먹힐 줄은 나도 몰랐다.”
불을 끈 대장장이는 허리춤의 고리에서 망치를 빼냈다. 작은 망치가 부르르 떨리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무구들이 다시 한번 하늘을 빼곡히 수놓았다.
대장간에서 처음 보였던 무구들의 열 배가 넘는 숫자. 수천에 달하는 병장기의 마력이 서로 반발하며, 극지의 오로라 같은 빛의 굴절을 만들어냈다.
대부분 알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개중에는 특별히 눈에 익은 것들도 존재했고.
창과 도끼를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댈런의 앞에서, 대장장이는 망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마법사의 마력 흐름을 본떠 만든 갑주에는 대(對)술사용으로 만든 듯한 격투술을. 뇌각의 태도에는 엇비슷한 출력의 전격 술식을. 암기에 대처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동무령의 비석에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놈은 처음 보는군.”
“······.”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든 작품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구나. 살아생전에 만든 무구는 능력과 약점까지 전부 꿰뚫고 있다고 봐야겠어.”
불편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발언.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댈런이 멀뚱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유 역시, 시야를 가득 채운 무구들을 분류하고 그 대처법을 세우기 위함이었으니까.
대장장이 캐릭터를 육성할 당시, 댈런의 플레이 스타일은 다채로운 무구로 최대한의 변수를 만들어내는 형태였다.
접전 초반에 변칙적인 공세로 상대를 시험하고, 그에 따라 상성상 우위를 점하는 무구로 승부를 굳히는 방식.
섣불리 영역을 내보이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대장장이가 가진 무구들 중에는, 그의 영역마저도 상성으로 압도할 만한 조합이 존재했으니까.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다르다.’
대부분의 초인이나 초월자들은 한두 가지 능력에 모든 것을 바친 존재들이었다.
싸움 자체에 자잘한 변수는 항상 존재하겠으나, 결국 그 끝에는 힘의 총량을 쏟아붓는 양상으로 흘러가는 이유.
허나 눈앞의 대장장이는 스스로의 무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수많은 무구들로 끝없는 가능성을 빚어낸 명공이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축적해온 수많은 술식과 무리를 총동원하고, 정보의 우위를 발판 삼아 치밀한 수싸움을 벌여야 하겠지.
‘회백의 하늘이나 구름 위의 뇌해를 꺼내 보이는 건 최후의 순간에만. 최대한 많은 고유 스킬로 탐색전에 어울려주면서, 겉으로 드러난 영역들을 활용해 방심을 유도한다.’
스릉···.
생각을 정리하고 허리 뒤춤의 성검을 뽑아 들었다. 반으로 부러진 성검에는 얕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차리나가 남긴 서릿발의 힘. 상태창에 명시되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성.
부러진 검을 들어 올린 순간, 대장장이가 망치를 툭 내려놓았다.
그가 말했다.
“항복하겠다.”
“······뭐?”
“싸워봤자 승산이 거의 없을 것 같군. 대신 하나만 부탁하겠다. 네게 모든 힘을 넘겨주기 전에,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게 해다오.”
“······.”
방금까지 죽일 듯이 달려들어 놓고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댈런의 이마에 주름이 만들어졌다.
대장장이는 그걸 보며 끌끌 웃었다. 그는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검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은 재료가 없어 실패했지만···마침 네가 그 재료를 모두 가져온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