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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0화 (21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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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2)

깡···! 깡···!

골짜기 사이사이를 아스라이 메아리치는 망치 소리.

널찍한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튼 댈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설산의 산봉우리들 사이로 높게 치솟은 불기둥을 올려다봤다.

쿠구구구···.

숲 너머에서 시작된 불기둥은 일대의 눈보라를 죄다 걷어내고 붉게 타오른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솜사탕 핥듯 훑어대는 새빨간 화염의 기둥.

저건 용살자 댈루카힘의 영역,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의 굴뚝에서 치솟는 불길이었다.

“그 대장장이, 믿을 수 있겠느냐?”

적창이 나무 사이로 다가오며 물었다. 약간의 불신이 깃든 눈빛.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실력에 대해서는 나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만···되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다짜고짜 숨결부터 뿜었소?”

“···놀리지 말거라. 이전번의 전격술사 때와 같은 상황인 줄 알고 바로 달려온 것 아니냐.”

살짝 찌푸린 채 흘기는 용의 눈동자. 그녀는 낮게 웃는 댈런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역의 저 반대편에 있던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댈루카힘이 항복을 선언하고 싸움이 정리된 이후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적창은 본신의 형상으로 다짜고짜 숨결을 뿜었고, 다행히 대장장이는 방패 하나를 희생해 이를 막아낼 수 있었다.

‘플레이타임 다섯 시간을 들여 만든 방패였나.’

제작한 목적 자체가 용의 숨결을 막아내는 것 하나뿐이었지.

그걸 한 방에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였으니, 적창의 열선은 확실히 규격 외의 무언가였다.

“그나저나 용의 가죽과 뼈로 지어 올린 대장간이라···생전 듣도 보도 못한 건축물이구나.”

적창이 숲 너머에서 치솟는 불기둥을 보며 중얼거렸다.

“용골로 짠 화로에 용심장의 힘으로 열기를 불어넣는 발상이라니. 저 대장장이 가문의 선조가 어느 용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했느냐?”

“글쎄.”

설산에서 시작한 캐릭터에게 가문이 있기나 할까. 다만 저 영역을 만들고 나서 지저룡에게 잡아먹혔으니, 시간 순서만 바꾼다면 나름 일리 있는 추측이기도 했다.

대장장이의 갑작스러운 항복 이후, 성검과 지저룡의 이빨을 넘기며 시작된 작업은 한참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다.

먹구름 가득한 설산의 하늘은 낮과 밤의 개념이 없었고, 감각으로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추정할 뿐.

그마저도 완벽하게 정확하지는 않은 셈이었다.

무투가와 전격술사의 시체를 회수할 때 모두, 영역에서 흐른 시간과 현실에서의 시간은 꽤나 큰 차이를 보였으니까.

“역천의 우물은 이야기했지. 이 세계의 닫힌 결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허나 수많은 시간선들의 가능성을 모아, 그 결말을 타파할 존재를 선택하리라고.”

휘이이······.

설산의 꼭대기에서 불어 내린 찬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댈런은 손을 들어 콧잔등을 긁적였다.

“들어봤소. 차리나에게서.”

“맞다. 그 아이도 그리 이야기했었지. 헌데 알고 있느냐?”

적창은 눈을 살포시 감고서 말을 이었다.

“인간의 세상에는 다소 뒤늦게 알려진 듯하나, 역천의 우물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그리 말해왔다는 걸.”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대륙에 떨어진 지 10년도 안 됐는데.

예상한 반응이었던 건지, 퉁명스런 대답에도 적창은 별 대꾸 없이 몸을 좌우로 천천히 기울였다.

“그 예언의 진의가 궁금했던 건 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귀자, 선각자, 혈통을 매개로 하는 빙의자···무수한 추측이 있었고, 예언의 주인공을 찾고자 하는 시도도 많았지. 허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었느니라.”

좌우로 왔다갔다하던 몸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다른 시간선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

“너는 수많은 시간선의 종말을 흡수하고 있는 게다. 내가 이 설산에서 눈을 뜬 것 역시도, 네가 어느 시간선의 가능성을 흡수한 연유겠지.”

검붉은 눈이 이쪽을 향한다. 세로로 찢어진 용의 눈동자는 잔잔히 물음을 건넸다.

“그렇지 않으냐?”

***

잠깐의 침묵 이후, 댈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언젠가는 그녀가 이 이야기를 꺼낼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심상으로 빚어진 세계인 영역. 그 일부를 오롯이 차지하고 있는 존재다.

댈런 본인을 제외하고서, 그의 심상에 그녀보다 밀접한 존재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와서야 말을 꺼낸다는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적창이 댈런의 비밀을 파고드는 데 조심스러웠다는 이야기고, 또 그를 배려했다는 소리도 되겠지.

“그 시체는 하수도에서 주웠소. 에낙사구스를 숭배하는 사교도들에게 납치당해, 재생력을 촉진하는 실험을 당한 용병의 결말이었지.”

댈런은 역행의 사도들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납치했고, 인신공양과 실험으로 세력을 불리며 악신의 수족이 되어갔는지를.

“용혈에 깃든 재생의 마력을 인간에게 주입했단 말이냐?”

“그런 셈이지.”

“용신···흡수하지 못한 잔여물을 에낙사구스에게 넘겨줬다고 하더니. 그걸 깨워내어 인간에게 접목시킨 놈들도 대단하구나. 용혈은 근본적으로 필멸의 존재에게 맹독일 터이거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적창.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행의 사도들은 다른 숱한 위기의 주동자들에 비해 그리 강력한 편은 아니지만, 초반에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중후반에 어마어마하게 큰 위협으로 돌아왔으니까.

놈들은 성공적인 여러 번의 실험과 의식을 거치며, 에낙사구스의 축복을 거듭 받아 성장하는 대기만성형 조직이었다.

댈런이 초반 플레이 때부터 놈들을 때려잡기 위해 수많은 회차를 갈아 넣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지저룡의 말이 맞겠구나. 이 시간선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겠어.”

“유감이오.”

“내 주체됨을 상실하고 정말로 용신의 일부가 되었겠지. 으스러진 자아의 찌꺼기만이 에낙사구스의 옥좌 근처에 불완전한 형태로 내버려져 있을 터.”

비통한 일이로다. 후 하고 내쉬는 한숨.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라 찬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댈런은 그 흩어짐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용신에게는 왜 맞선 거요?”

“맞서다라···그보다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여겼던 게지.”

몸을 슬쩍 비튼 적창이 가부좌 튼 다리를 자연스럽게 베고 누웠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검붉은 단발의 머리칼.

문득 떠오르는 성기사의 금발에, 댈런은 그녀의 머리를 밀어낼까 잠시 망설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적창이 물 흐르듯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용신은 우리 모두의 심상에서 태어난 존재였느니라. 우리가 낳은 존재이기에 우리 모두가 책임지기로 하였지. 각자의 힘을 조금씩 나눠주었고, 가장 강한 열셋은 그의 일부로서 두 번째 이름을 새겨넣었다.”

허공을 더듬는 검붉은 눈동자. 그 시선의 끝자락은 오래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고대의 대전쟁 당시 용신과 용족들은 중립을 지켰느니라. 수십 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악신들을 몰락했고, 인간을 위시한 필멸자들은 승리를 거머쥐었지.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용신은 태도를 바꾸었다. 중립을 끝내기로 선언한 것이지.”

“악신이 되기로 한 거군.”

“맞다. 허나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느니라. 고귀한 용족의 심상이 모여 깨어난 존재이니···설령 마음이 기울었다 해도 역겨운 악신들과 같아지지는 않았다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의 호출에도 응했던 것이고.”

하지만 신뢰에 대한 보답은 선의가 아니었다.

백검과 용신의 합공에 치명상을 입고, 수하이자 동료였던 권갑에게 목숨을 잃은 비참한 결말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

“용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느니라.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지. 물론 에낙사구스에게 내 힘의 파편을 팔아넘겼다고 하니···나 역시 그저 과거의 미련에 사로잡혔을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는 입술. 굳이 거듭 되새길 생각은 없는지, 적창은 누운 채로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그녀는 이내 장난스레 눈꼬리를 만 채로 물었다.

“필멸이 그 무엇보다 반짝임을 아느냐?”

“또 주문쟁이처럼 말하는군.”

“어느 용도 왕국을 건설하고 수십 수백만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허나 인간은 해냈지.”

“······.”

“어느 용도 수천 년 전의 유물을 역사라 부르며 캐어내고, 북방을 틀어막는 성벽을 쌓아 올리며 온 대륙에 거미줄 같은 도로를 깔지 못했다. 허나 인간은 해냈지.”

적창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댈런과 눈을 맞췄다. 흥미와 경탄으로 물든 시선.

댈런은 문득 그녀를 지구에 떨어뜨려 놓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고 바다 건너편까지 1초 만에 편지를 보내는 세계. 기술이 마법과 큰 차이가 없는 세상.

언젠가 집으로 갈 수 있다면 혼자가 아니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적창은 몸을 일으켜 바위에서 내려왔다.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도 그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지고한 존재에 가깝게 창조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왔다라···그거 성기사단 교리 아니오?”

“수천 년 역사의 기사단이 맨땅에서 자라났겠느냐? 대전쟁 때 활약한 대영웅은 실존했느니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적창. 댈런은 무심코 턱을 쓰다듬었다.

신이니 뭐니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저도 모르게 한 전사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이 오크의 비처에서 처음 마주친 뒤, 댈타리온과의 싸움에서 알 수 없는 힘을 건넸던 남자. 차리나의 요청에 따라 역천의 우물로 그를 이끌었던 존재.

“···대선조.”

두 신화와 전설이 모두 한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는 건 과연 우연일까.

악신에 맞서 싸운 대영웅

“상념이 길었구나. 슬슬 돌아가자.”

적창이 끼어들었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아득한 망치질 소리에 눈길을 돌려보니,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기둥은 어느새 색이 바뀌어 있었다.

쿠르르릉······.

푸른 불기둥에 맺힌 전격의 이지러짐. 불기둥에서 시작된 서리 폭풍이 뇌성을 흘리는 기이한 정경.

악신을 죽이기 위한 검의 단조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깡!

“마무리 작업 중이다.”

깡!

“하늘의 힘을 다루기 위해, 지저에 사는 고룡의 뼈를 기초로 둘렀지. 상성이 잘 맞더군.”

깡! 까앙!

대장간의 정경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담한 크기의 오두막은 어디 가고, 탑처럼 높게 솟은 건물 곳곳에서는 용광로를 비롯한 복잡한 장비들이 스스로 작동하는 중이었다.

수만 정의 무구 사이를 메아리치는 망치질 소리가 거듭 중첩되고, 귀를 때리는 소음마저 하나의 화음처럼 기이한 조화를 이루는 광경.

따지자면 대장간보다는 정교한 마도공학의 공장에 가까울까.

그 한가운데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골검의 주인, 댈루카힘의 영역.’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이 모든 시설과 열기는 저 대장장이가 일평생 품은 심상의 결정체겠지.

댈런은 곳곳에 널브러진 장비들을 가만히 훑어보다 물었다.

“저 무구들은 사후에 만들 것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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