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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탑(3)
조금은 억측에 가까웠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과, 지구에서 건너온 자신을 같은 선에 놓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왔다는 전설이나 교리는 전에 살던 세계에도 빈번하게 존재했다.
“···그건 의외의 질문이로구나.”
하지만 어째서일까.
전사의 입꼬리가 미미하게나마 말려올라간 것은.
“아득한 전설과 눈앞의 인생을 연결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너와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아냈느냐?”
“세상이 멸망할 때 나타났지. 태어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나타났소. 악마와 악신을 대적했고, 그리고···.”
“싸울 때 검과 도끼를 주로 사용하지. 뭐, 너는 그것 외에도 이것저것 섞어 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만. 좋은 통찰력이었다.”
···무기를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상관없으려나.
“내가 원래 살던 곳은 지금 네 육신이 밟고 선 대륙이 아니니라. 그러니 이계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럼 당신이 원래 있던 세계는 어디요? 나처럼···.”
“지구였냐고? 글쎄. 부정에 가깝겠구나. 허나 이 땅을 고향으로 두지 않은 사람으로서, 내 삶의 궤적이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사는 천천히 뒷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는 뒷마당에서 이어지는 오르막 너머, 산꼭대기에 내리꽂히는 빛의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은 허리띠에 손을 꽂고 물었다. 왠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은 신이오?”
“네가 그렇게 믿고자 한다면.”
전사가 웃었다. 그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신으로 믿고자 한다면 신. 친구로 사귀고자 한다면 친구. 형제나 전우로 여기고자 한다면 역시 그렇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 이 대륙에 목숨을 불태웠느니라.”
“······.”
“무슨 이름으로 부르던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렇지 않느냐? 뭐라 불리던 너는 너 자신이고, 나 역시 나 자신일 것을.”
썩을. 어지간한 북방인 저리가라 할 풍채로 하는 말은 여느 주문쟁이 뺨도 치겠네.
남의 생각도 곧잘 읽어대는 전사는 조금 더 걸음을 느리게 했다. 그가 묘한 박자로 마지막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세상은 주문쟁이스러운 것들 투성이지. 그렇지 않느냐?”
자박.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전사가 마지막 걸음을 내디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댈런은 반사적으로 감각을 넓혀 주변을 훑었다.
쿠구구구······!
두 사람이 선 곳은 설산 정상이었다.
정확히는 수십 수백의 산봉우리 한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와 거기 내리꽂히는 빛의 기둥 앞.
육중한 소음을 내며 쏟아지는 빛의 기둥은 흰색이었다. 그 빛깔은 왠지 게임 시작 때 화면을 가득 채우던 흰색 배경을 연상시켰다.
그 빛의 일렁임을 올려다보던 전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온 이유는, 네 선택이 머지않았음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선택?”
“나는 많은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야. 지금까지 네 결정을 존중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로 했으니까.”
전사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0에 수렴했다.
“······!”
툭. 툭.
단단한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는 주먹. 댈런은 도끼 쥔 손에서 힘을 서서히 풀었다.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그의 손은 저도 모르게 도끼를 반쯤 뽑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짓은 그보다도 더 빨랐다. 심지어 힘을 많이 준 것도 아닌 가벼운 손짓이었는데도.
“두 번째로 방문한 르비바흐 숲에서 품었던 결심을 기억하거라. 어떻게 지금의 위계에 올라왔는지 잊지 않으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거다.”
“그게 무슨···.”
“조만간 보자꾸나. 다음 만남은 미궁에서겠구나.”
쿠구구구──!!
빛의 기둥이 내뿜는 광채가 거세졌다. 아득해지는 오감과 육감. 꿈에서 깨어나는 감각이었다.
댈런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명확한 이유나 근거는 없지만 그는 알았다.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하던 내가, 대체 왜 이 대륙에 떨어진 건지.
지금 손을 뻗어서 붙잡아야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
─────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궤리감. 어긋나는 시공간의 이질감.
어지러움 속에서 손끝에 무언가 닿는다. 댈런은 움켜쥐며 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번쩍 하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었다.
“······댈런?”
눈이 조금 부셨다. 댈런은 눈살을 찡그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시야의 반을 채우고 있었다. 나머지 반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비단처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
웃을 때 예쁘게 휘어지곤 하는 긴 속눈썹.
검은 눈동자. 조각 같은 코. 촉촉한 입술. 약간 붉게 달아오른 뺨.
감각이 되돌아오며 좋은 향기가 훅 들어왔다. 마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댈런, 조금 아픈데.”
댈런은 그제야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그의 곰발바닥 같은 손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시에나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긴 속눈썹이 조금 모이며 미간에 옅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놔 주겠어?”
“···그러지.”
댈런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놓아주었음에도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시에나는, 이내 댈런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약간 가빠진 숨을 고르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말 없이 방에 들어온 건 사과할게.”
“괜찮소.”
“이유가 있었어. 금강궁에서 전령이 왔거든.”
전령? 얼마 전까지 흡혈귀가 다스리던 이 변방 도시에?
“백안의 선각자가 보낸 전령이야.”
“그렇군.”
그녀라면 납득이 됐다. 선각자는 천구를 통해 저 대륙 반대편이나, 심지어 바다 건너 엘프들의 땅까지도 내대볼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미궁도시를 떠날 때부터 혈령과 한 판 붙겠다고 선포하고 내려왔으니만큼, 이제껏 일행을 예의주시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혈령과의 전투는 나름 대륙의 명운을 건 싸움이었고, 그 싸움이 끝난 걸 확인했으니 전령을 보낸 것이겠지.
물론 그렇다 해도 이 머나먼 남부까지 전령을 보낼 만한 일이 뭐가···.
“미궁도시의 결계탑이 무너졌대.”
“···뭐요?”
이런 시발. 그건 좀 아니잖아.
***
결계탑.
순은 구역의 중앙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구조물이자, 미궁도시의 모든 탐험가들이 거쳐가는 성지.
세간에는 미궁에서 올라오는 마물을 저지하는 데 바로 이 결계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상은 조금 달랐다.
결계탑이 미궁을 억제하는 결계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역할은 바로 미궁으로 들어가는 통로로서의 기능이었다.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미궁으로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통로.
수많은 칼잡이와 주문쟁이들이 거액의 통행료를 내고 순은 구역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 결계탑의 공간 전이 마법진을 통해 미궁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런 결계탑이 무너졌단 말이지.”
톡. 톡.
댈런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택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도 폭탄 테러라니.”
“예. 저희도 예상 못한 일이었습니다.”
백안의 선각자가 보낸 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뻔한 이야기였다. 누가 맞을 걸 예상하고 쳐맞겠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니터 너머에서 결계탑이 폭탄 테러를 당한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테러는 수백 회차 중에 단 한 번뿐이었고, 그마저도 댈런이 악신의 밑에 들어가 직접 테러범이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주인공 캐릭터가 움직여야만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았는데도 벌어졌다.’
그만큼 이번 회차의 전개가 겉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는 의미겠지.
이미 한참 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점이었으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올 때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끌끌···휴전 협정을 맺은 게 엊그제 같은데, 금강궁에서도 고생이 많소이다. 용의자는 잡으셨습니까?”
“예, 탑주. 제국의 끄나풀들이더군요.”
“···이런.”
펠버가 곤란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말마따나 도시연합과 제국이 휴전 협정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타이밍에 미궁도시에 직접 테러를 벌였다는 건, 대놓고 엿 먹어보란 거나 진배없지 않나.
물론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현 시점에, 이런 중대사를 단순히 외교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제국의 소행이라 보기는 어렵겠군.”
“음? 왜 그런가?”
비요른이 물었다. 난쟁이의 수염과 얼굴은 검댕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젯밤에도 새벽까지 임시 공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지. 5위계에 오른 뒤로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연구에 몰두하는 난쟁이였다.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소. 선각자의 눈이 남부에 집중된 시기를 교묘하게 틈탄 것도, 술식적인 수단이 아닌 화약을 사용해 감시를 피한 것도.”
전 대륙을 굽어보는 선각자의 눈이라도, 근 몇 달간은 남부에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댈런과 일행은 혈령을 때려잡겠답시고 뱀파이어 백작령을 활보하고 있었고, 성기사단은 용신이 직접 이끄는 용군단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대륙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이다. 그런 실정이니 테러범들이 도시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단지 여기까지였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테러범들은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결계탑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바로 결계탑을 방어하는 술식체계가, 마법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위주로 설계되었다는 것.
온갖 술식과 이능으로 튼튼하게 세워진 결계탑인만큼, 순수한 물리력으로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5위계 이상의 초월자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초월자가 순은 거리를 대놓고 활보하게 둘 정도로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 정도 폭약이면 대체 아공간 주머니를 몇 개나 사용했을지 감도 오지 않는군.”
“도시 안으로 들여올 때는 몇 달에 걸쳐 통상적인 화물에 섞어서 들여왔고, 순은 구역으로 운송할 때는 말씀하신 것처럼 아공간 주머니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흐음···몇 달씩이나······.”
“그것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4위계 이상의 초인은 관여조차 하지 않고, 아공간 주머니도 미궁도시 내부의 마탑들에서 제작된 물건만 사용했더군요.”
전령의 설명에 댈런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가 모니터 너머에서 저질렀던 테러와 수상할 정도로 유사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테러를 기획했던 배후이자, 댈런의 캐릭터가 섬기던 악신은 다름 아닌 에낙사구스.
이번 테러의 배후 역시, 만신전의 이름으로 제국을 손에 넣고 주무르는 놈이 분명했다.
“금강궁의 입장 역시 댈런 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건 단순한 외교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악신의 소행이겠지요.”
전령의 생각도 비슷한 듯했다.
그 역시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 하나로, 수백 년 이상 살아오며 악신의 진면목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허나 선각자께서는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결계탑은 미궁으로 출입하는 입구일 뿐, 미궁도시 자체가 결계로 동작하도록 설계되었기에 마물이 올라오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오.”
“···허면?”
“미궁의 출입구가 막혔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톡. 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짓이 멎었다. 댈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결정해서 미안하오만, 우리 바로 움직여야겠소. 자세한 이유는 가면서 설명하겠소.”
“예?”
“지금 바로 말인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빠르게 무장을 점검한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목적지는 성기사단 본단이오.”
“성기사단···?”
“에낙사구스 그놈, 아무래도 우리가 소원의 돌을 얻는 걸 막으려는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