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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탑(2)
“찌이익, 찍······.”
룩시시투카는 무의식중에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당장에라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위압감. 하지만 이대로 입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에 암월단장과 같은 꼴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하, 하얀 빛···빛의 기둥이었나이다.”
[빛의 기둥?]
“예에. 똑똑히 봤나이다. 눈 덮인 산과 그 정상에 내리꽂히는 빛의 기둥···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먹구름을······.”
[설산과 먹구름이라···.]
팔 몇 개를 느릿하게 휘적거렸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몸짓.
조금이나마 풀어진 중압감에 룩시시투카는 가까스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일이 여기까지 왔는지. 그녀의 머릿속이 지난 몇 달을 더듬었다.
도시연합 남부의 약초도시 르비바흐에서 퇴각했을 때, 그녀의 텔레포트 스크롤은 제대로 오작동을 일으켰다.
마지막에 봤던 설산과 빛기둥의 영향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떨어진 곳은 암월단의 본거지에서 한참 떨어진 대수림 한복판이었다.
룩시시투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달에 걸쳐서 헤멘 끝에 암월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는 오직 한 가지였다.
암월단의 주요 목표물이 반신의 위계에 접어들었음을 위쪽에 보고하는 것.
물론 그 위쪽은 암월단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암월단장의 머리통을 던졌다 받았다 하는 신의 화신체가 아니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암월단장은 죽었고, 여섯 손가락을 포함한 본거지의 암월단원도 몰살당했다.
사실상 암월단이 해체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 도망쳐야 하나? 그러기에 눈앞의 화신체는 너무 압도적이었다.
이미 한 번 오작동을 일으킨 텔레포트 스크롤이다. 그런 기물 따위로 신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고대 문헌에도 위압감에 대한 묘사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라고는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초월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중압감이라니. 그러고 보니 외형도 미묘하게 달랐다.
수십 개의 팔. 창백한 손과 갈고리 같은 손가락들. 반쯤 부정형에 가까운 몸뚱이까진 전당에 조각된 우상과 동일했다.
하지만 몸을 느슨하게 휘감은 새까만 사슬과, 그 사슬에 꿰인 수백 개의 해골은 고대의 벽화나 우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애당초 검은 사슬과 붉은 해골은 악신 쑴의 상징 아니던가?
북방의 멍청한 야만족이 아니고서야 신도가 거의 전무할 정도로 싸움에 미친 악신. 얼마 전 차르국을 침공했다가 대패했다는 그 악신 말이다.
[6위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혈령과 뱀파이어 백작을 동시에 쓰러뜨린 존재라. 과연 예언의 주인공은 어떤 정경을 품고 있을까.]
“······.”
[테모므론에게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혈령이 소멸했으니 놈도 칩거에 들어갔겠지.]
룩시시투카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국과 혈귀는 동맹을 맺지 않았던가? 그런데 몇 달 사이에 혈령이 소멸했다고? 백작도?
혼란스러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신은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가 손 하나를 뻗었다. 툭툭. 룩시시투카의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아귀.
[잘했다. 생각 외로 도움이 되었어.]
“가,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그래. 네 머리는 특별히 떼어서 솥구덩이에 넣도록 하마.]
“찌익···?”
솥구덩이? 에낙사구스의 대지옥인 성간옥좌에 있는?
거기 들어간다는 건 죽는다는 소리 아닌가? 그것도 심지어 머리만?
갑자기 목구멍이 화끈하더니 머리가 아득하고 어질해졌다. 핑글 돌더니 공중으로 붕 뜨는 시야.
흐릿해져가는 초점 너머로 머리 잃은 몸뚱이 하나가 보였다. 거울에서 많이 보던 몸뚱이였다.
‘나 지금 죽었···?’
룩시시투카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재료가 꽤 많이 모였군. 암월단은 반쯤 버림패였는데, 예상 외의 수확이야.]
에낙사구스는 주르르 피가 빠져나간 쥐인간의 머리를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강력한 보존 마법이 걸린 아공간에는 쥐 꼬리와 팔다리, 내장과 머리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모두 암월단 본거지를 정리하며 얻은 것들이었다. 고위 초인이나 초월자들에게서 뽑아낸 부위들. 솥구덩이에 넣을 좋은 재료들이었다.
잘 뒤섞인 재료들은 고위 마물이나 악마로 재탄생하겠지. 운이 정말 좋으면 새로운 대악마가 나올 지도 몰랐다.
“주군이시여, 파멸궁전과 옥좌의 합일이 마무리되었나이다.”
그때 소리 없이 열린 지옥문에서 악마가 걸어나왔다.
새의 머리에 사자의 갈기, 인간의 몸과 뱀의 꼬리가 뒤섞인 대악마였다.
“제 심장들이 이토록 요동한 적이 있었는지요. 경하드리옵니다, 주군이시여. 이제 주군께서는 두 개의 대지옥을 통치하시는 신 중의 신이시옵니다.”
[호들갑 떨지 말아라.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이니. 미궁도시에 줄 선물은 잘 준비되고 있느냐?]
새대가리 신하가 머리를 조아렸다.
“낮은 거리를 통해 하수도로 추종자들을 들여보냈사옵ㄴ다. 마도구가 아닌 순수한 화약이니 걸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선각자의 시선이 남부에 쏠린 지금이 기회다. 결계탑을 날려버리면 마지막 변수도 사라지는 셈이지.]
“외람되오나, 혹 마지막 변수라 하오면 어떤······.”
[쯧, 아직도 이렇게 멍청해서야. 새대가리를 좀 더 굴려보라 하지 않았나. 마지막 변수로 소원의 돌만한 게 있을 것 같으냐?]
“아······.”
새대가리의 부리가 살짝 벌어졌다.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뇌가 순간 의문을 품었다. 소원의 돌은 전설 아니었나?
“······.”
아니겠지. 신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주군이 있다면 있는 것이다. 그는 복종의 의미로 한층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오늘도 주군의 혜안에 감복하나이다.”
[쯧쯧.]
“······.”
창백한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악마가 넘어온 지옥문이 닫히고, 새로운 지옥문이 커다랗게 열렸다.
[새대가리.]
“예, 주군이시여.”
[망자의 땅으로 가자.]
화신체가 거대한 육신을 움직였다. 새대가리 신하는 고개를 조아리며 그 뒤를 따랐다.
쿠르르릉···.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당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천 년도 넘게 대를 이어온 암살단이,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는 순간이었다.
***
쿠르르릉······!
나직한 뇌성.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검붉었다. 불과 번개 너머로 오색의 뇌광이 오오라처럼 일렁거렸다.
‘또 꿈인가.’
분명 명상 중은 아니었고, 영역을 개방한 기억도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수련이 끝나고 침대에 몸을 묻었던 장면이었다. 여관의 짚단 침대가 아니라 귀족가의 푹신한 매트리스였다.
뱀파이어 백작과 혈령을 처리한 뒤, 일행은 왔던 길을 돌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제국 접경지 인근의 한 도시에서 보급 및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여관이 아니라 따로 숙박비가 들지는 않았다. 귀족 노릇 하던 흡혈귀를 도끼와 인사시켜주고, 그 소개료로 받아챙긴 대저택에서 머무는 중이었으니까.
생각을 이어가던 댈런은 문득 턱을 긁적였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또 잠을 방해하게 됐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두막 뒷문이 끼익하고 열리며 누군가 걸어나왔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인물이었다.
천옷 위에 낡은 털가죽 외투를 걸치고, 도끼와 검을 멘 전사.
선 굵은 얼굴과 드러난 상체에는 찔리고 베인 흉터가 가득했다. 그건 마치 단단한 바위가 오랜 세월이 지나며 상처입은 것처럼 보였다.
“······.”
댈런은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오늘은 도끼가 잘 달려있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분명 북부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조금이라도 위압감이 덜 느껴져야 정상일 터.
그런데 어째선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걱정 말거라. 위협할 생각은 없으니. 그저 네가 이전에는 목소리를 들을 만큼 성장했고, 이제는 내 존재감을 인지할 만큼 성장했을 뿐이다.”
전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웃음···.
“사람 얼굴을 그렇게 평가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저번에도 내게 부드러운 미소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지?”
그래. 생각도 읽으셨지. 시발 귀신도 곡할 노릇이군.
“귀신은 추잡하니 앞에 한 글자만 떼어주겠나?”
“···한국어도 할 줄 아셨소?”
전사가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올렸다. 댈런은 괜히 목 언저리를 긁적였다.
시발. 설마 진짜 전지전능한 그런 존재는 아니겠지? 중세랜드 떨어진 초창기에는 혼자 있을 때면 한국말로 쉬지도 않고 욕해댔는데. 신이고 나발이고 다 뒈지라는 식의 말을 몇 달은 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던 시기였으니까.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하던 30대 아저씨가 피와 내장 범벅의 용병 업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욕할 사람 없으면 신이라도 욕하면서 버틴 거지.
“그래서···오늘도 누구 만나게 하러 오셨소?”
“아니. 오늘은 다른 이유로 찾아왔다.”
“그럼 드디어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나? 저번에 다음 기회에 알려준다 하지 않았소.”
남자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댈런은 왠지 거북해져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사실 그도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다. 증거도 차고 넘쳤고.
하이 오크들의 성소에서 확인했던, 도끼와 검을 사용하는 대선조의 조각상. 마찬가지로 허리에 도끼를 차고, 등 뒤에 검을 멘 눈앞의 전사.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도 그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지고한 존재에 가깝게 창조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수천 년 역사의 기사단이 맨땅에서 자라났겠느냐? 대전쟁 때 활약한 대영웅은 실존했느니라.’
고대의 대전쟁 이전부터 살아온 고룡이자, 문자 그대로 살아 숨쉬는 역사책인 적창이 흘렸던 이야기.
거기다 북방인들이 타락하기 전까지 섬겼다는 투신 ‘하다쉬’의 전설까지.
많은 전설과 교리들이 고대의 대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에 대해 언급했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골자는 동일했다.
영웅은 검을 들고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적진에 뛰어들었으며, 끝내 스스로를 희생해 악신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도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
그리고 머지않아 죽음에서 부활한 뒤 승천해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갔고, 후대에 이르러 대선조니, 투신이니, 전쟁신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내용이었다.
“약속했으니 알려줘야겠지. 내 이름이 궁금한가?”
“···이름은 됐소.”
어차피 이름이야 많을 것이다. 하나 더 안다고 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고.
그보다 정말로 궁금한 건 다른쪽이었다. 댈런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계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