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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불꽃(4)
전투는 오래지 않아 마무리되었다.
댈런이 공중에서 푸른 용 두 마리로 해체쇼를 벌이는 사이, 아카샤는 부상당해 도망치던 녹색 용의 목줄기를 잽싸게 물어뜯었다.
지상에서는 비요른의 폭격이 마물 군세를 빠르게 무력화했다.
시에나의 주문이 남은 마물을 정리하고 생존자들을 구조해낼 즈음, 기력을 회복한 루시아 역시 골짜기로 내려와 병력을 수습해 지휘했다.
“부관. 생존자 보고하세요.”
“성기사 삼십사, 성전사 이백오십오. 분견대 총원 오백 명 중 생존자 이백팔십구 명입니다.”
“···시체는 차후 수습하도록 합니다. 우선 성법결계 안으로 퇴각하겠습니다.”
루시아의 지휘 아래 삼백 명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분견대는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요새를 탈환한다는 임무까지 실패한 상황.
발걸음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지만, 의외로 분위기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때로는 눈앞에 직면한 불행보다 한 줄기의 희망이 더 크게 보이기도 하는 법.
어지간한 고위기사라도 범접할 수 없는 진룡을, 말 그대로 썰어버리는 일행의 무위는 희망의 빛이라고 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폭탄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거 봤나? 여기까지 열기가 느껴지더군. 저 드워프가 그 유명한 외눈의 명공이라지?”
“화약도 화약이지만, 용의 피와 살점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다니···.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처음 봤네.”
“저분이 그 소문의 용살자 아니신가. 몇 년 전 청린의 목을 자르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분.”
“모두 루시아 경의 동료들이라던데. 대륙 북부로 파견 나가셨을 때 사귀신 모양이야.”
희망의 불씨는 전투의 피로도마저도 잊게 만든다.
행군 중간중간 잠깐씩 짬이 날 때마다, 성전사들은 일행의 무력이 얼마나 뛰어나냐를 놓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마물과 치고받는 게 일상인 그들로서도, 이런 식의 전투를 볼 기회는 흔치 않았겠지.
“저 애가 아까 전의 그 용이라고? 하늘에서 녹색 용을 물어뜯던 푸른 비늘의 용?”
“용은 언제든지 원하는 종족의 모습으로 변장할 수 있다더니. 그냥 전설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성기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성전사들에 비해 성기사들은 루시아와 가까운 만큼, 그녀의 일행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온 바.
때문에 성기사들의 시선은 루시아의 이야기에서도 크게 강조되지 않았던 인물, 청린용 아카샤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푸른 비늘이면 청린용 아닌가? 청린의 용굴에서 빈 둥지와 알껍질이 발견됐다던데.”
“어허, 푸른 비늘 용이 어디 한둘인가? 그리고 용살자께서 데리고 다니시는 용이라 하지 않았나. 자네라면 어미를 죽인 원수를 따라다니겠나? 패륜도 그런 패륜이 어디 있다고?”
“······.”
패륜이라니 듣는 용 마음 상할 소리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동료를 타박하는 성기사의 이야기에, 조금 떨어진 선두에서 걷던 댈런은 괜히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카샤가 댈런을 부모로 인정한 건, 다른 생물과는 다른 진룡의 독특한 생태 때문이었다.
알에서 깨어난 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진룡을 부모로 인식한다던가.
심지어 뛰어난 지능으로 자신이 생물학적인 부모가 누군지 아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의지적으로 처음 본 진룡을 부모로 선택한다고 들었다.
[이래서 이종 간 공감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용의 상리는 인간과는 엄연히 다르거늘. 그렇지 않느냐?]
“···미안하지만 나도 인간이라.”
[괜찮다. 댈런 그대는 편견이 없는 편이니까. 우리가 함께할 세월은 우리 종족 사이에 조금 남은 몰이해를 털어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니라.]
썩을. 이거 무슨 말을 못하겠군.
여느 때와 같이 주접을 부리기 시작하는 고룡을 내버려둔 채, 댈런은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는 아카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사자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지만, 진룡인 소년이 저 정도 속삭임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역시나.’
쫑긋거리는 귀. 빙글빙글 돌아가는 애매한 시선 처리.
신경 쓰지 않는 척하고는 있지만, 누구보다 관심 있게 듣고 있다는 증거다.
다행히 뒷담 아닌 뒷담에도 소년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꿈틀거리는 입매를 보면, 오히려 약간 뿌듯한 느낌이랄까.
“······.”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씩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보인다. 마치 ‘나 잘했지?’하는 듯한 표정.
이건 뭐, 꼬리 흔드는 강아지도 아니고. 뭐라 해줘야 할지 몰라 무미건조한 시선만을 보내고 있을 무렵, 루시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카샤.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 못 알아볼 뻔했잖아.”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야말로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흐음, 그런 말은 또 누구한테 배웠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루시아. 어째서인지 공기가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성기사의 시선에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슨 짓 했다고 그러시오.”
“아닙니다. 그냥 봤어요. 아카샤가 참 많이 자랐길래.”
“아직 완전한 성체가 되려면 멀었습니다. 앞으로 더 성장해야죠. 아버지와 어머니들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 하니까요.”
“···어머니들?”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딱 멎었다. 부드러워진 게 언제였냐는 듯 냉막해진 분위기.
“···댈런?”
왠지 날이 선 듯한 목소리까지. 댈런은 성기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무슨 짓 했다고.
***
밤사이 장벽 산맥을 벗어난 일행은, 이튿날 날이 저물 때쯤 목적지인 본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단의 위치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하늘 높이 펼쳐진 거대한 은빛 장막은, 밤하늘은 물론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희미하게 빛날 정도였으니까.
“본단과 성소들을 중심으로 펼친 성법 결계입니다. 이번에 안 사실인데, 본단과 성소의 위치 자체가 이럴 때를 대비해 광범위한 술식진을 그리고 있다더군요.”
루시아가 설명했다.
물론 댈런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성기사단의 본단은 균열 입구를 틀어막은 최종 저지선.
하지만 튼튼한 성벽과 수성병기만으로는 악마의 군세를 저지하기에 한참이나 부족하다. 떄문에 천 년도 전에 성기사단을 세운 선구자들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최후의 방어수단을 마련해두었다.
‘기사단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성법 결계.’
장벽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평원 곳곳에 지어진 성소들은, 단순한 보급고나 무기고의 역할만을 맡고 있지 않다.
성소들이 지어진 장소는 사실 거대한 술식진의 구심점들.
본단과 성소들을 기반으로 펼친 성법 결계는, 대악마는 물론 악신이라도 쉬이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방어벽이었다.
마치 팔시온이 도시 자체로 거대한 결계진으로서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
세워진 시기 역시 엇비슷하니, 어쩌면 설립자들 사이에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드거한테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결계가 작동하는 지금은 아마 여유가 없겠지만.’
댈런은 상념을 흘려넘기며 은빛의 장막 앞에 멈춰 섰다.
어쨌든 당장 중요한 건 성법 결계의 기원이 아니라 그 기능이었다.
성기사단의 단장만이 활성화하고 유지할 수 있으며, 악마와 마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성법 결계의 공능.
악신의 총공세 앞에서 버틸지야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당장 시간을 벌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츠즈즈즈···.
일행은 성법 결계를 통과하고 곧장 본단으로 향했다.
댈런과 아카샤가 통과할 때 장막이 희미하게 떨리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성법 결계를 통제하는 게 기사단장 에드거 본인이기 때문이겠지. 사실상 하루종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건 성기사단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벌써 몇 달째 용 군단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균열 안쪽의 요새들은 이미 진작에 함락됐고, 방어선을 한 치라도 더 탈환하기 위해 성기사단은 매일같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발리스타, 이쪽으로!”
“동쪽 성벽에 끓는 기름이 더 필요해!”
“방금 균열에서 복귀했습니다. 부상자가 있어요! 치유 기도가 필요합니다!”
“카르엘! 카르에엘!”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헐레벌떡 뛰어가는 성전사 분대. 화살과 창칼을 실어나르는 노새와 수레들. 갓 전투를 마친 듯한 이들은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그 행렬의 끝은 동료의 싸늘한 시체를 부여잡은 성기사의 울부짖음으로 맺어졌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기사단이 맞는가.”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하루빨리 금강궁으로 복귀해야겠습니다. 성기사단이 이 정도라면, 대륙의 다른 지역들은 상태가 더 심각할 겁니다.”
일행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반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천 년간 균열을 지켜온 성기사단의 위용을 아는 만큼,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일 터.
모니터 너머에서 기사단의 몰락을 수십 번 넘게 봐왔던 댈런마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는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콧속을 마비시키는 피비린내와 음울한 열기로 축 눌어붙은 공기는, 단순한 폴리곤과 코드 조합만으로는 전달받을 수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일행을 이끌던 루시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견대 전원 각자 휴식을 취하도록. 앞으로의 일정이나 사상자에 따른 소속 변화는 차후 통보하겠다.”
생환한 분견대 병력은 각자의 계급과 소속에 따라 흩어졌다.
여독이 쌓인 일행 역시 성기사 한 명의 안내를 따라 휴식을 취하러 갔다.
댈런과 루시아는 본단 저 안쪽의 전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에게는 휴식을 취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그그극······.
본단 중심부의 거대한 돔형 건물 앞. 두 사람이 다가가자 육중한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쪽은 커다란 전당이었다. 창문은커녕 실낱같은 틈 하나 나 있지 않은 전당.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그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군요.”
초점 없는 눈동자가 전당 입구를 응시했다. 댈런과 루시아가 들어서자 전당 문은 다시금 닫혔다.
유일한 출입문이 닫혔음에도 전당 안쪽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천장부터 벽과 바닥까지 빼곡하게 새겨진 선과 문자들 때문이었다.
‘성법 결계의 중추 술식진이군.’
횃불 하나 없는 전당 안, 술식진의 문자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시야를 밝힌다.
이따금씩 에드거가 앉은 곳을 중심으로, 은빛 파동이 반구를 그리며 느릿하게 전당을 채우기도 했다.
루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단장님. 맡기신 임무에서 복귀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관문 요새는 탈환할 수···.”
“알고 있다, 루시아 경. 수고했어. 진룡의 목을 떨어뜨린 걸 넘어서서, 전우들을 지키기 위해 숨결에 정면으로 뛰어들기까지. 깊이 감명받았다.”
“그걸 어떻게···.”
“어젯밤에 신께서 보여주셨거든.”
에드거가 흐릿하게 웃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인도자시군.”
생각해보면 첫 만남 때도 에드거는 댈런과 일행을 미리 예견한 채 기다리고 있었지.
에드거에게 주어진 예지안의 축복은 자기 자신에게 제어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밀도나 유용함이 백안의 선각자에 비견될 정도였다.
단장은 초점 없는 시선을 돌려 이쪽을 응시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신께서 당신에 대해서도 보여주셨습니다, 댈런.”
“나를?”
“신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주시하고 계시니까요. 얼마 전부터는 당신께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셨고요.”
흐릿한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균열을 통해 미궁으로 내려가기 위해 오셨군요. 정말로 소원의 돌이 당신의 목적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