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1화 (25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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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불꽃(5)

“그렇소만.”

단출한 대답.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당의 벽과 천장에서 은은하게 내리쬐는 은빛이, 고개 숙인 기사단장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자아냈다.

몇 년 전에는 없던 주름이 꽤 많아진 얼굴이었다. 초월자답지 않은 노화의 흔적이었다.

“···그렇군요.”

“잠은 좀 주무셨소?”

“성법 결계를 유지하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용신의 숨결이 기사단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 저 하나의 피로 때문에 결계를 해제할 수는 없는 일이죠.”

결국 한 숨도 못 잤다는 이야기.

용 군단이 기사단을 침공한 지도 벌써 반 년쯤 지났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깨어있었다는 소리였다.

에드거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고, 눈 밑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6위계 초월자라 해도 결국 근본은 인간. 환상세계의 영역을 이 땅에 강림시킬 정도로 초월적인 그릇이라 해서, 아예 그릇으로서의 물리적인 한계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댈런 역시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에는 반드시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가. 에드거라 해서 다를 리 없었다.

“괜한 질문이었군요. 양해해주시길. 신께서는 댈런과 댈런의 일행분들이 균열로 내려가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그 목적이 소원의 돌이라는 건 여기 루시아 경에게 들었고요.”

에드거가 고개를 위로 꺾었다.

초점 없는 두 눈은 전당의 천장 너머에 있을 하늘을 응시했다.

“미욱한 실력으로 기사단을 이끌고 있기는 하나, 저도 결국에는 한낱 인간입니다. 그래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뭘 말이오.”

“존재 여부조차 불투명한 유물에, 대륙의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승산이 희박한지를.”

“단장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아.”

댈런은 말없이 루시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단장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승산이 희박한 건 엄연한 현실이었으니까.

수백 번의 시도에도 극복할 수 없었던 종말이다. 실시간으로 다가오는 마지막에 저항하는 건, 댈런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암울한 결말을 보는 데 익숙해진 그에게도 그럴진대, 이백 년간 하나의 세계만을 지켜왔던 에드거의 심정은 대체 어떨까.

“······.”

언제나 속으로만 품어왔던 생각이, 약해진 육신을 틈타 튀어나온 것일 터.

적어도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는 아니겠지. 이에 대한 존중은 침묵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

벽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닫힌 미래에 필요한 건 딱 한 줄기의 빛이란다. 아무리 터무니없이 희박한 확률이라도, 그걸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이 전사야말로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증거겠지.”

“믿음이 대단하시군.”

“신께서 당신의 행보를 미리 보여주신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그랬듯 신뢰할 뿐입니다.”

에드거가 웃었다. 초연한 미소였다.

“모레 정오. 성법 결계를 해제하겠습니다.”

“···예?”

“본단을 미끼 삼아 용신의 시선을 끌도록 하지요. 그 사이에 균열 안으로 내려가세요.”

***

―――――――

이름 : 댈런

레벨 : 50

[근력 : 80] [기량 : 72] [체력 : 70]

[감각 : 72] [지능 : 70] [마력 : 75]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카스마의 붉은 바람(B),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B), 용골 가공(B), 망자들의 왕(S)

*고유 스킬(30)

――――――――

“···레벨 50이라.”

댈런은 상태창을 지우며 중얼거렸다.

이 게임은 만렙이랄 게 없는 게임이었지만, 대략적인 성장 목표 정도는 정해져 있었다.

레벨 50이면 사실상 만렙이나 다름없는 수치. 이 이후로는 레벨업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워질 뿐 아니라, 레벨업으로 능력치를 올리는 게 극도로 비효율적이 된다.

‘앞으로 레벨업은 반쯤 포기하는 게 맞겠군.’

뱀파이어 백작을 쓰러뜨리며 달성했던 레벨 50이, 백작령 국경선 인근의 시체들을 회수하고 진룡 둘을 떨어뜨리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수백 회차를 플레이한 댈런마저도 레벨 50을 넘긴 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에도 지금 이 육신의 수준에 닿은 건 딱 셋뿐이었고.

‘전격술사. 흑마법사. 그리고 마지막 회차.’

악신의 진체를 소멸시켰거나, 반대로 악신들이 위협을 느끼고 연합해 맞섰던 캐릭터들.

댈타리온은 6위계의 끝자락에 닿은 전격술사였고, 나머지 둘은 신위라 불리는 일곱 번째 위계에 오른 존재들이었다.

모두 종말의 마지막에 도달했던 이들이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결말을 마주했었지.

아직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실정인 자신이, 그들이 마주한 결말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을까.

상념은 하얀 입김이 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다시금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하늘이 붉어지는군.”

“···인기척 좀 내고 다니시오, 노인장. 사람들 놀라겠소.”

“자네한텐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펠버가 끌끌 웃었다.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장난기만 많아지는 양반 같으니라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하늘이 더 붉어진다네. 마치 이 세상의 하늘이 아닌 것 같이.”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댈런은 그 시선을 따라가봤다.

노인의 갈색 눈은 장벽 산맥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간대임에도, 해질녘 노을이 깔린 듯 붉은 하늘.

“이 세상 아닌 거 맞소.”

“음?”

“용신이 다스리는 지옥, 대룡전의 하늘이 저렇거든.”

대부분의 회차에서 용신과는 별 인연이 없었지만, 딱 한 번 용신이 다스리는 지옥에 쳐들어간 적이 있었다.

대장장이 캐릭터 댈루카힘을 육성할 당시였지.

갓 잠에서 깨어난 용신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소멸에는 실패하고 도주하던 중 용신의 권갑에게 사망했던 회차였다.

“용은 신비의 존재지. 그들의 숨결은 마력의 형태를 일그러뜨리오. 한둘일 때는 괜찮지만, 수십 수백의 진룡이 모이면 대기의 성질마저 변화시킨다고 들었소.”

그 결과가 바로 붉은 하늘.

마치 파란 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덧칠한 듯한 광경은, 며칠 전부터 장벽 산맥 너머로 서서히 번져오고 있었다.

“대륙이 지옥이 되어가는 게로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지옥이 세상을 침식하는 것만 같아.”

“종말이 가까워지면 일상이 될 광경이오.”

끝이 다가올수록 악신들의 움직임은 전면에 드러난다.

용신이 성기사단을 침공하는 동안, 다른 악신들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테모므론은 혈령의 모습으로 제국과 함께 정복전을 일으켰고, 라필렘은 바다 건너 엘프들의 땅에 사실상 깃발을 꽂았다.

쑴 역시 북부에서 화신체로 강림해, 차르국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가지 않았던가.

‘그러고보니 에낙사구스, 그놈이 묘하게 조용하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대륙 침공에 가장 적극적인 게 놈이었는데.

다른 악신들이 지옥에서 제 세력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을 동안에도, 에낙사구스는 수백 년간 대륙 곳곳에 자신의 안배를 심어두었다.

수많은 흑마법사들과 대륙 최고의 암살집단인 암월단, 제국의 배후에 암약한 만신전까지 모두 놈의 소행이 아니었던가.

애초에 에낙사구스는 다섯 악신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댈런과 충돌해왔다.

역행의 사도들, 재의 마녀,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와 사슬옥좌의 칼카스 등, 오히려 놈이 개입하지 않은 사건을 손에 꼽아야 할 정도.

‘시기상 이맘때쯤 되면 암월단이 대륙을 활보하며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고, 에낙사구스가 이끄는 악마 군대가 서쪽 대사막을 넘어오는 게 일반적인데.’

테모므론과 함께 제국의 정복전쟁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미리 심어둔 안배 중 하나를 움직인 것뿐이다.

슬슬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는 다른 악신들에 비해, 과하게 소극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끊임없이 부딪힐 때는 그렇게나 짜증나는 놈이었는데, 일 년 가까이 조용하니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어딘가 찜찜하게 불쾌한 느낌. 이런 직감은 보통 틀린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쑴 역시 북부 전쟁 이후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단 말이지.’

본신의 힘을 다 회복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휘하에 악마들은 여전히 널려있을 텐데.

온 대륙이 전쟁통이 되어가는데 미동조차 없다고? 그 싸움에 미친 악신이?

‘설마 흑마법사 댈룸 자이브로 플레이했던 회차처럼······.’

전혀 동떨어진 사건들이 묘하게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 종점은 논리의 비약이라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아무리 악신이 자기들끼리 으르렁댄다한들, 완전히 전면전을 거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하물며 다른 악신을 소멸시키고 그 지옥을 삼켜버린다니. 그건 댈런도 수백 번의 플레이에서 단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그마저도 댈런의 캐릭터가 직접 나섰을 때의 이야기. 플레이어의 개입이라는 어마어마한 변수 없이는, 만들어지기 힘든 상황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결계탑 테러도 그런 경우였으니까.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일신의 무력으로는 수백 회차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캐릭터. 마지막 회차의 주인공마저도 손쓸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하루빨리 소원의 돌을 얻어야 한다.’

댈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빠르게 무장을 점검했다.

마침 루시아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새 갑주를 갖춰입은 그녀가 말했다.

“댈런,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바로 내려가지.”

마지막으로 도끼를 확인한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본단 구석의 작은 건물이었다.

평소에는 잘 쓸 일이 없어 잠궈두는, 지하의 고대 유적으로 내려가는 입구.

오래 전 도움을 받았던 지인, 고대 국가의 왕족을 다시 만날 시간이었다.

***

먼지도 냄새가 있다. 그리고 오래된 먼지일수록 그 향취는 강해진다.

굳이 비유하자면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비슷한 느낌일까. 거기에 약간의 재채기 유발 인자를 더하면 완성이었다.

“큼. 크흠.”

댈런은 코끝을 간질이는 먼지 냄새에 표정을 씰룩였다. 그는 일행과 함께 지하 유적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성기사단 본단이 위치한 드넓은 평원 지하에 펼쳐진, 모래바람 왕조의 고대 유적.

온갖 함정이 도사리는 걸 넘어서서, 영혼 재단술로 미궁 그 자체가 침입자를 말살하는 무시무시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지.’

기기긱― 드르르륵.

복도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희미한 소음이 벽을 타고 전해진다.

톱니가 돌아가고 오래된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소리. 덜컹거리며 미궁 전체가 깨어나는 듯한 움직임.

[침―입―자―]

이전에 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한 감각 수치가, 침입자를 향해 미궁이 품은 살의를 적나라하게 감지한다.

단조로운 의지가 전성이 되어 들리는 듯한 감각. 미궁의 벽과 천장이 좁혀들려는 순간, 댈런은 손을 들어올렸다.

우웅···.

손끝에서 희미한 파동이 퍼져나간다.

수 년 전에는 단순한 침입자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 유적에 수호자의 의지를 부여한 건, 고대 모래바람 왕조의 영혼 재단술이다.

모래바람 왕조의 전성기에도 왕족이나 고위 관료만이 익힐 수 있었던, 사령술과는 다른 개념으로 영혼을 자르고 이어붙이는 정교한 주술.

“엑시.”

나직하게 읊은 영창 속에, 고대의 복잡한 공정을 극한까지 압축한 술식이 흘러나오고.

탄령(歎令)으로부터 퍼져나가는 희미한 울림이 복도를 메운 순간, 사방에서 찍어누르던 살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

잠시 이어진 정적. 곧이어 복도에서 낮은 전성이 흘러나왔다.

[···수호자 아텝미두르. 새 주인을 뵙습니다.]

“그래. 반갑다.”

[명령을···.]

“다른 건 없고, 너네 14대 왕 데려와.”

[······.]

“의식 매개인가 뭔가 하는 걸로 데려오라니까. 못해?”

[할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목소리의 기척이 서서히 멀어졌다. 댈런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대화는 윗사람끼리 해야 하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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