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2화 (252/288)

252

기사단의 불꽃(6)

“그 손은 좀 치우고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소?”

풍뎅이 등딱지에서 솟은 파라오 가면, 모래바람 왕조의 14대왕 크헤프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무슨 손?”

“허리띠에 끼운 오른손 말이오. 그 옆에 붙어있는 도끼가 굉장히 불안한데.”

이번에도 다짜고짜 머리가 두 쪽 나고 싶지는 않소이다. 파라오 가면의 걱정 어린 말에, 댈런은 픽 웃으며 허리띠에서 손을 뺐다.

“됐나?”

“아주 좋소.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는군.”

“그 풍뎅이 하나 망가진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진짜 죽음과 상당히 유사한 감각이지. 한 번 죽어봤기에 더 끔찍하다고 말하면 이해가 가시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있는 이야기였다.

왜 드라마에서 똑같은 이별 장면을 봐도, 연애와 실연을 경험해본 사람이 더 아파한다지 않나?

죽는 것도 비슷할지 모르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삶과 이별하는 거니까.

“그나저나 둘 모두 오랜만이오. 그대의 힘은 이제 신위마저 어렴풋하게 넘보고 있구려. 그대가 모시는 나무께서도···많이 힘을 되찾으신 것 같고.”

[뭐? 나?]

“그렇소, 나무여. 잘린 밑동에서는 이미 새싹이 돋아나고 있구려. 썩은 부분이 떨어지고 딱딱한 껍질이 덮였지만, 고통과 흉터 역시 성장의 일부분인 법이지.”

파라오 가면은 추임새처럼 집게발을 딱딱거렸다. 등딱지 열린 풍뎅이가 집게발을 움직이니 뭔가 이상했다.

“허나 이는 본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이변···기이한 일 투성이구려. 끝이 다가오는 속도가 몇 걸음이나 빨라진 것이나, 역행하는 운명의 난장꾼이 모래바람 왕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것 역시도.”

“운명의 난장꾼···에낙사구스 말하는 건가?”

“맞소. 혹 그대는 천기를 읽을 줄 아시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생각에 천기니 운명이나 하는 건 보통 점쟁이 헛소리였다.

물론 입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모래바람 왕조는 영혼 재단술만큼이나 점술에 능통한 문명.

도움을 받으러 온 처지에 굳이 심기를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의 침묵에 파라오 가면은 짧게 설명했다.

“천기라는 건 별게 아니오. 그저 별들의 섬세한 속삭임을 읽는 거지. 별들이 예견하기로, 끝이 다가오면 종언의 선고자들은 동서남북에서 몰려온다고 하오.”

[동서남북? 악신 새끼들 말하는 거지?]

“그렇소. 북쪽에서는 파멸궁전이, 동쪽에서는 환영궁전이. 남쪽에서는 망자의 땅과 대룡전이 올라오고, 서쪽에서는···.”

“성간옥좌가 다가오지.”

“읽을 줄 모른다더니, 이미 알고 있었구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모니터 너머에서 몇 번인가 들었던 설정일 뿐이었다.

이 게임이 어려운 건 비단 적들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현실감을 높인답시고 설정 풀이에도 지나치게 인색한 것 역시 난이도 상승의 주범.

안 그래도 어려운 중후반부의 위기들인데, 제대로 대비하려면 숨겨진 전설과 설화들을 일일이 찾아내 해석해야 했다.

방금 전 파라오 가면이 읊은 천기인지 점성술인지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대충 게임 최후반부에 다섯 악신이 어느 경로로 진격해오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천기에 따르면 성간옥좌의 주인 에낙사구스는 대륙의 서쪽 경계에서 다가온다고 하오. 바로 우리의 옛 터전이자, 지금도 나와 내 조상, 그리고 후손들이 잠들어있는 땅이지.”

보석 눈알이 뱅글 돌았다. 댈런은 컴퓨터 로딩 커서 같은 뱅글거림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지.’

테모므론과 용신은 이미 움직였고, 동쪽 바다 건너에서 라필렘이 활동 중이라는 정황도 명확했다.

에낙사구스와 쑴, 단 두 악신만 행방이 묘연했다. 북부에서 두들겨 맞은 쑴이야 그렇다 쳐도, 천 년도 더 전부터 대륙을 호시탐탐 노리던 놈이 조용한 건 말이 안 됐다.

‘···일단 나중에.’

뭐가 됐건 당장 급한 건 용신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일.

나머지는 미궁을 내려가면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였다.

댈런이 할 말이 있다는 걸 짐작했는지, 파라오 가면도 뱅글거리는 걸 멈추고 눈을 빛냈다. 그가 말했다.

“아무튼 그대가 날 불러온 용건은 이게 아니겠지. 말씀하시오, 나무의 수호자여. 그대가 우리의 귀인을 잘 대접해주었으니, 우리도 그대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리다.”

“잘 됐군. 그럼 길을 좀 열어줬으면 좋겠다.”

“길?”

파라오 가면이 고개를 기울였다. 댈런은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용신이 지상과 하늘을 포위했거든. 그래서 지하에 길이 필요하다.”

“몇 명 정도야 그대가 앞장서서 지나가면 상관없을 것 같소만···. 얼마나 많은 인원이 지나갈 예정이오?”

“글쎄. 수만 명 정도?”

“···수만 명이 무덤을 밟고 지나가겠다고?”

안 되나? 위쪽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슬쩍 허리띠에 걸쳐졌다.

“언제는 도굴해도 상관없다며. 그냥 지나가는 건 안 되나?”

“······.”

“무덤 주인은 옛적에 네하카라 강 건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조용히 지나만 가겠다.”

“···그러시오. 묘지 수호자에게 말해두도록 하지.”

댈런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문명인끼리는 대화가 통하는군.

***

타닥. 탁.

나직하게 메아리치는 발소리. 지하 유적의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횃불을 꺼내들지는 않았다. 일행 중에 이 정도 어둠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마다 가지각색의 마력광으로 눈을 빛내면서, 복잡한 통로 사이를 밟은 대낮인 양 속보로 이동할 뿐.

선두에서 움직이던 댈런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유적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쿠르르르···.

‘통로를 넓히고 있나.’

아무리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이 거대하다지만, 만 단위의 병력이 지나가는 이상 통로 확장은 불가피한 일이다.

다행히도 이 유적을 지키는 묘지 수호자는, 유적의 모든 시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단순한 함정이나 문을 넘어서서, 바닥과 천장, 통로와 방의 구조까지 전부.

‘덕분에 예전에는 고생깨나 했었는데.’

유적 자체가 살아 움직이면서 그를 집어삼키려는 걸, 몸뚱이 하나로 맞서느라 죽을 뻔했었다.

영역을 개방할 줄도 몰랐던 시절. 성검과 용혈의 재생 인자가 아니었으면, 그는 돌틈 사이에 파묻혀 뼈도 못 추렸겠지.

생각해보면 뭔가 웃겼다. 그때는 기를 쓰고 성기사단 안쪽으로 들어오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지하 통로를 이용하는 상황이라는 점이.

당시에 그를 죽이려 하던 유적은, 이제는 반대로 그에게 협력하며 탈출로를 넓혀주고 있었다.

쿠르릉. 기리리릭―

다시금 들려오는 기관장치 소리. 댈런의 민감한 감각은 그 너머의 소음과 진동도 포착할 수 있었다.

성기사들과 성전사들의 규칙적인 구보. 부족한 산소에 헐떡이는 숨. 지상으로 올라가는 기계 풍뎅이들의 키릭거림.

[――――――!!]

그리고 저 머리 위쪽, 지상에서 울려퍼지는 용들의 포효까지.

작전의 골자는 간단했다.

기사단장 에드거가 성법 결계를 해제하는 순간, 용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본단에 쏠릴 터.

놈들이 본단으로 쳐들어오는 틈에, 성기사단의 전 병력은 둘로 나뉘어 본단을 버리고 빠져나가는 게 핵심이었다.

루시아와 파른을 포함한 댈런 일행은 균열 안쪽으로, 나머지 성기사단은 장벽 산맥 너머를 향해서.

댈런을 새 주인으로 인정한 유적 수호자는, 그 과정에서 최대한 효율적이고 안전한 길을 열어줄 테였다.

“댈런.”

“말하시오.”

“다른 게 아니라, 시간은 충분하겠나?”

비요른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할 거요. 저쪽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준다고 했으니까.”

“유적의 수호상들 말인가? 물론 하나같이 대단한 고대 문명의 이기일세. 하지만 상대는 용이야. 그냥 용도 아니고 용 군단.”

“성기사단의 방어 체계도 살아있으니 괜찮소. 성법 결계는 단장이 직접 유지해야 하지만, 나머지는 무인으로도 돌아가는 것도 있으니까.”

머리 위에서 다시금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비요른은 수염을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머릿속으로 유적의 흑백 지도를 그려내며 생각했다.

‘약간은 아슬아슬하려나.’

사실 미묘한 불안감은 그에게도 동일하게 있었다. 애당초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부터가 이쪽 한정.

솔직히 말해서 이쪽도 추적이 아예 붙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열 명도 안 되는 소수정예라도 그럴진대,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운용하는 성기사단의 본대는 어떻겠는가.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이면 고려해야 할 변수가 셀 수 없이 많기에, 용 군단의 추적을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어쨌든 용 군단의 세력이 나날이 강해지는 와중에, 기약 없이 장벽 산맥 안쪽에 갇혀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성법 결계 하나만 믿기에는, 단장님이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입니다.”

루시아가 거들었다.

“설령 본대에 추격이 붙는다 해도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단장님께서 최대한 빠르게 합류하신다고 했으니까요.”

지난 몇 달간 컨디션이 악화되었다곤 하지만, 에드거는 명실공히 이백 년간 균열을 지켜온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젊을 적에 전성기의 청린을 쓰러뜨린 것도 모자라, 눈과 팔을 잃은 이후에도 벽을 깨고 6위계에 올랐다지.

모니터 너머에서도 그랬다. 에드거 라인하르트는 어느 회차에서나 북부의 차리나를 능가하는 강자였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간질이는 미묘한 불안감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고개를 털어 떨쳐내려는 순간,

“루시아 경. 기사단장 말일세. 정말로 본대에 합류한다고 말했나?”

“예. 성법 결계만 해제하신 뒤 바로 따라붙겠다고 하셨습니다. 속도를 늦추지 말고 이동하라는 당부와 함께요.”

“그렇구만······.”

어째서인지 미적지근한 반응. 무슨 생각인 걸까.

몰래 전성을 보내자 펠버는 낮게 웃으며 답했다.

[균열에서 청린과 싸울 때를 기억하나?]

‘기억하지.’

댈런이 용혈을 각성했던 순간이자, 펠버가 영역의 힘을 본격적으로 끌어낸 시기.

당시 펠버는 본인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청린의 시간선을 돌려버렸었다.

이미 그의 몸은 망가지고 있었고, 청린과의 싸움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었기 때문.

[끌끌. 그게 다가 아닐세. 물론 승리를 위한 희생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니야.]

‘무슨 소리요?’

[노년이 되어 삶의 황혼기를 맞이할 때가 되면, 모든 사람에게 은연중에 드는 생각이 있다네. 내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가장 뜻깊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지.]

노인의 시선이 짧은 순간 두 사람을 거쳤다. 하나는 댈런. 다른 하나는 토미 발렌티노였다.

[나는 그때 앞날이 창창한 자네를 위해, 그리고 내 제자를 위해 내 마지막 수명을 쓰고자 했다네. 그게 가장 뜻깊은 퇴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게야.]

‘······.’

[어쩌면 단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