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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3)
치이이······.
날숨에 섞여 나와 눈앞을 가리는 증기. 용신에게 입은 내상의 회복도 거의 막바지였다.
희뿌연 숨결 너머에는 검붉은 단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동양풍의 두께감 있는 무복. 댈런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
검은 바탕에 붉은 기가 드문드문 섞인 신비로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빛깔이 감도는 용의 눈동자.
“적창.”
[···미안하다, 댈런.]
그녀는 용신의 손끝에서 산을 날리고 바다를 증발시켰다는 강대한 진룡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상식을 아득하게 벗어나는 수준의 초월자.
열세 대룡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놓고 다퉜다는 태고의 존재가,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내 이름을 빼앗겼다. 내 육신도, 영혼도, 존재 그 자체도···]
툭. 툭.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밑의 하얀 눈밭에 치즈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다.
댈런은 망가진 창을 툭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그 손짓에 얇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미안하다. 내 너에게만큼은 부담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무슨 헛소리요.”
[···어?]
툭. 머리에 얹어진 굳은살 박인 손.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검붉은 단발을 헝클었다.
적창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댈런은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그가 말했다.
“내가 먼저 약속하지 않았소. 용신과 대면하게 해주겠다고.”
[그건···.]
“그 대가로 그쪽이 칼카스의 사슬옥좌를 무너뜨려주지 않았소. 설마 나이 좀 먹었다고 벌써 건망증이 도진 건 아니겠지?”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 파충류의 눈도 동그랗게 뜨니 조금은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있자 곁에서 또 다른 인영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어엿한 청년티가 나는 소년이 말했다.
[맞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 아버지는 강하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 번째 뭐 시발? 픽 웃던 입꼬리가 딱 굳었다.
[세 번째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다섯 악신을 전부 죽이겠다 모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복수가 그 첫 번째이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마치 댈런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자랐는지 모르겠군.
[누굴 닮아서인지 마음이 곱게 자랐구나, 아이야. 허나 그럼에도 문제가 있단다.]
[···무엇입니까?]
[제어할 수 없는 군령만으로는 용신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지.]
대답한 건 적창이 아니었다. 전성에서 울려퍼지는 기묘한 중저음의 울림.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든 고룡을 보고 댈런은 조금 놀랐다.
저거 까마귀 둥지 바텐더로 일하던 옷 아닌가? 본체는 술집에서 온 게 아닐 텐데 왜 저런 복장이지?
[군령의 술자는 7위계의 사령술사이나, 이 세계선에서 살아있지 않은 존재일 터. 죽은 신이 산 신의 목을 벨 수는 없는 법이지.]
[결국 용신의 목을 자르는 건 아버지 본인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군요.]
[맞다, 아이야. 허나 성검은 쓰지 못하고 미스릴 제련자의 창은 부러졌지. 내가 댈런의 무기가 되어줘야 할 터이나···]
푹 내쉬는 한숨.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적창이 말을 이었다.
[내겐 용신과 싸울 힘이 없느니라. 놈은 내 이름을 앗아간 존재이고, 이 땅은 내 영육이 말살된 곳이기 때문이란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다들 뭔 주문쟁이 같은 소리만 하고 있어?
그 불편한 시선을 눈치챈 적창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용의 법도에서 나는 이미 제명된 존재라는 이야기다. 아까부터 내가 얼굴을 비추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내가 안 불러서?”
[나는 네 다른 정경들과는 달리 내 자의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지 않느냐. 내가 널 돕지 못한 건, 내 존재가 이곳에서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창의 웃음에는 기운이 없었다. 댈런은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원래 적창이 대룡전에서 소멸했고, 그 때문에 이곳 대룡전에서 만큼은 다른 세계선에서 건너온 적창도 힘을 쓸 수 없다는 소린가?
[맞다. 이 대룡전의 하늘 아래에서, 나는 실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적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던 손으로 얼굴을 문댔다.
썩을 중세랜드 게임 같으니라고. 저건 또 누가 짠 거지 같은 설정이야?
[그 문제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겠군.]
그때 버번이 끼어들었다.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바텐더 복장의 갈색 머리 용은, 녹갈색 눈을 이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모든 언령의 주인이자 계약의 수호자로서, 신을 낳은 우리의 오랜 계약을 오늘부로 끝내겠다.]
***
콰직!
뜯겨져나가는 희뿌연 영체의 상반신.
으드득!
말을 탄 기사의 머리가 뭉개지며, 타고 있던 군마까지도 한 줌 연기처럼 흩어진다.
용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주변 대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
직후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용언과 함께 뿜어진 건, 산의 한쪽 사면을 통째로 뒤덮을 규모의 검은 숨결.
쿠과과과과───!!
천에 가까운 영체의 무리가 타버리다 못해 삽시간에 증발되어 사라졌다.
근방의 영체들을 모두 쓸어버린 용신은, 숨을 얕게 몰아쉬며 제 몸을 내려다봤다.
언제 생긴 건지 팔과 다리는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했다. 검붉은 피가 눅진하게 흘러내리다가, 순식간에 아물어 딱지가 앉는 상처들.
용혈은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시켰지만, 피부를 뚫고 침투한 사기는 오래도록 남아 피부를 간질였다. 불쾌한 이물감에 소년은 이를 갈았다.
[···이딴 잡것들이.]
신격이 넘실거리는 본체임에도 상처를 냈다는 건, 본디 동격의 힘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 영체의 군세는 7위계 사령술사가 남긴 술식의 결과물이라는 소리였다. 설령 잡것이라 해도 날카로운 위협이라는 이야기.
영체 하나하나의 칼침이야 자그마한 바늘 하나만도 못했지만, 그런 바늘도 수천 수만 개가 박히면 위험한 법.
[버러지 같은 놈들!]
노호성과 함께 검을 휙 털어냈다. 검격 한 번에 또 수백 영체가 허리쯤부터 갈려 흩어졌다.
그렇게 한 줌 영체가 으스러지며 만들어진 공백 한가운데, 용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혼들이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본디 두려움을 모르는 원혼들은 동료들이 갈려나가는 것에 개의치 않는 존재들.
전우가 쓰러지면 쓰러지는 대로 곧장 달려들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놈들은 거리를 서서히 벌리고 있었다.
마치 싸울 수 있는 커다란 공터를 만들어주려는 듯한 움직임. 용신은 그제야 눈을 빛냈다.
[···호오라. 결투장을 만들겠다 이거냐?]
“눈치가 빠르군.”
우르르 갈라지는 원혼 무리. 희뿌옇게 일렁이는 통로 사이로 걸어오는 건, 위압적인 덩치의 사내였다.
예언의 주인공이라 불리는 전사. 에낙사구스가 수년 전부터 눈여겨보던 인간.
사내를 바라보던 용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몇 분 사이에 뭔가 달라져 있었다.
[너···무슨 짓을 한 거지?]
“그것도 그냥 빠른 게 아니야. 아주 많이 빨라.”
사내가 웃었다. 용신은 찌푸린 눈으로 그 웃는 낯을 훑었다.
사내의 겉모습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이 미터 남짓 되는 인간종치고 큰 키. 내면에 휘몰아치는 갖가지 계파의 주문들.
돌덩이 같은 근육들. 마물만큼이나 단단한 피부. 그 피부와 근육 아래에서 펄떡이는 용의 심장과 피, 그리고 뼈.
[용···.]
차이점은 용이었다. 정확히는 사내에게 엮인 용의 숫자.
적창의 피와 청린의 심장, 그리고 지저룡의 뼈만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둘이 더 늘어나 있었다.
입술과 혀에 맺힌 언령의 기운.
왼팔에 감도는 새파란 한기.
이식되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이 아님에도, 존재가 귀속되어 일체를 이루는 저 모습은 익숙한 광경이 아니던가.
저건 마치 용신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일곱 대룡을 권속이자 부속품으로 다루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조금만 발상을 전환해본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중후한 전성이었다.
동일한 전사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그 존재감과 결이 완전히 상반된 음색.
전사의 눈은 어느새 녹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그 빛깔의 의미를 아는 소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첫 포효. 설마하니 네놈이···!]
[오랜만이오, 우리들의 신이여. 아니, 이제는 옛 신이 되었나?]
[네놈이 마음 가는 대로 행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어도 이 대룡전의 하늘 아래에서 나는 너의 신! 당장에라도 네 이름,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이라는 진명을 회수할 권세가 있거늘!]
사내의 입을 빌린 고룡은 말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용신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용신은 모든 용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 그건 열세 대룡의 동의하에, 그 탄생과 함께 맺어진 계약이었다.
대룡전의 하늘 아래에서 그 권능은 절대적이 되는 바. 설령 성검의 힘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손실을 감수하고 억지로 힘을 때려 박는다면···.
[그렇게는 안 될 걸세.]
[······!]
[말했지 않나. 자네는 이제 우리의 옛 신에 불과하다고.]
잘게 떨리는 손끝. 용신은 천천히 팔을 거둬들였다.
힘이 나가지 않았다.
성검의 저항에 가로막힌 게 아니라, 아예 대상 지정 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모든 용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그의 권능이, 무효화된 걸 넘어서서 아예 적용조차 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상대방이 용이 아니거나. 아니면···.
[더이상 네가 만룡의 자식이자, 유일한 신이 아니라는 소리지.]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중얼거리는 말.
[계약의 내용을 조금 바꿨을 뿐일세. 애초에 내 언령술을 중심으로 맺은 계약 아니었나.]
[···말도 안 돼.]
[이 사내를 우리의 새로운 신으로 삼았네. 열세 대룡의 동의가 없으니 아예 계약을 무효화하기는 힘들었지만···.]
사내가 양손을 휙 털었다. 그러자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각기 형체를 갖추고 자리했다.
왼팔을 어깨부터 뒤덮은 완갑.
오른손에 단단하게 쥐어진 검붉은 장창.
[전쟁신의 신성이 자네의 힘을 잠시나마 무효화한 이 자리에서, 계약 대상을 바꾸는 재주 정도야 부리기 어렵지 않았네.]
[허나 적창의 이름은 내 손수 말소했거늘. 존재의 정의 자체가 지워진 용이, 어떻게 대룡전의 하늘 아래에서 고개를 들 수···!]
[왜 이름이 없다고 생각하지?]
사내의 눈이 붉게 빛났다. 다시 한 번 달라진 음색.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안쪽에는, 마치 꽃처럼 피어나는 검붉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사내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맺혀있었다.
[네게 빼앗긴 옛 이름 대신, 새로운 신이 내게 새 이름을 하사했느니라.]
전사의 입을 빌려, 적창이 말했다.
[카멜리아. 그게 내 새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