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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4)
쿠르르릉···.
먹구름이 울었다.
중앙의 회오리를 중심으로 일렁거리는 대룡전의 붉은 하늘.
지평선 끝자락까지 뒤덮었던 대지옥의 정경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먹구름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닫힌 설산의 하늘」
쿠구구구구···!
붉은 회오리가 거친 기류를 토해낸다. 검붉은 먹구름은 벼락과 불기둥을 다발로 쏟아내며 이에 맞섰다.
서쪽에서 밀어내면 동쪽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중앙부에서 접전이 벌어지는 찰나, 아래쪽으로 파고든 구름이 쏟아내는 불기둥과 벼락의 향연.
그건 마치 하늘과 구름이라는 대자연이, 각기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서로의 목줄기를 노리는 듯한 광경이었고.
창공 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힘겨루기 한가운데, 티끌처럼 작아보이는 두 인영이 격돌했다.
쩌어어━━━━!!
격돌의 충격은 작지 않았다.
구형으로 터져나오는 충격파에 싹 밀려나는 붉은 기류와 먹구름.
두두두두두!
굉음과 함께 거리를 벌린 두 인영이, 다시금 역으로 가속하며 사정없이 치고받는다.
창과 검, 손과 발이 수백 번씩 얽히며 교차하는 사이, 용신의 갈라진 외침이 소음을 뚫고 울려퍼졌다.
[적창, 첫 포효, 청린! 정녕 이럴 테냐! 나는 너희가 만든 존재다!]
만담은 필요없었다. 침묵을 뚫고 내지른 창끝.
검면으로 흘리고 폼멜로 엮어 찍어누르는 용신의 대처. 창대를 비틀어 힘겨루기를 잠시 만들어내고, 발로 밀어차며 거리를 멀찍이 벌린다.
투확!
[너희 모두가 나의 부모이거늘! 자식을 내치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이냐!]
다시 한 번 멀어진 거리 사이로 들려오는 외침. 하늘 위에서 균형을 바로잡으며 댈런은 웃었다.
부모 팔아먹은 자식 새끼가 혀가 기네. 저거 뉘 집 자식이냐?
[······.]
[······.]
‘실언했군. 마지막 생각은 취소하지.’
두 고룡의 침묵이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컸다.
댈런이 저도 모르게 품은 생각을 정정하는 사이,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붉게 빛났다. 적창이었다.
[우리 모두가 낳은 자식이여, 너는 변질되었다.]
[변질이라니? 난 너희들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아니더냐!]
[그게 바로 문제였다는 소리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예정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나직한 한숨. 회한이 담긴 음색.
용신의 살기등등한 시선 앞에서, 적창은 차분한 기색으로 창대를 휘휘 돌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디 대지옥의 주인들인 네 악신 역시, 필멸자들의 욕망이 낳은 결과물이었지.]
[······.]
[우리와 달리 자의는 아니었겠으나, 그렇다고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탄생한 악신들이 결국 온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거늘···그 결말을 보고도 배우지 못했음은 우리의 과오일지도 모르겠구나.]
백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검을 휙 털 뿐이었다.
그 가벼운 휘두름에 설산의 봉우리 하나가 쪼개졌다. 우르르 산사태가 되어 무너지는 능선. 적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했다.
[말을 섞기 싫다는 것이냐.]
[······.]
[되돌아보면 그때도 그러했었지. 어째서 대지옥의 주인을 자처했느냐는 내 질문에, 너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는 대신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다. 그야말로 고집불통인 새끼용을 보는 듯한···그래, 그리 본다면 너는 만룡의 자식이 맞을 지도 모르겠어.]
자식은 본디 부모를 닮는 법이니까. 적창은 쓰게 웃었다.
[배신자의 헛소리는 더이상 듣지 않겠다.]
[···그래. 용족은 고집이 세다. 참으로 용 다운 아이로구나.]
만담은 끝이었다. 뒤로 물러나는 적창의 자아.
의식의 표층으로 부상하며, 댈런은 몸을 후끈 덥히는 기운을 느꼈다.
[···댈런. 이제부터 내 창과 불꽃은 영원히 너의 것이다.]
적창의 나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슬쩍 풀었다.
오른손의 붉은 창이 사뭇 가벼운 듯했다. 길이 이 미터쯤 되는 창이, 마치 신체의 일부분인 것 같은 느낌.
정신을 조금 집중하자 혈관을 따라 겁화가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이 모든 게 그동안 적창이 반쯤 강림했던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전에 적창이 몸을 직접적으로 제어한 순간들이, 마치 실에 묶인 인형처럼 간접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손에 잡힐듯 말듯 애매하던 고룡의 권능이,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 아래 놓인 것 같은 전능감.
후우.
열기 어린 숨을 가볍게 들이쉬고, 조금 천천히 다시 내쉰다.
감상은 길지 않았다.
한 번의 심호흡 직후 눈앞에 번뜩인 백광 탓이었다.
힘의 승부로 대화를 끝맺고자 작정한 용신이, 새하얀 대검을 내리그으며 공간을 격하고 코앞까지 도달한 것.
댈런은 자연스럽게 창을 들어올렸다. 흰 검과 검붉은 창이 십자 형태를 그리며 격돌했다.
───떠어어어엉!
어마어마한 완력이 창대를 타고 전해져온다. 일격에 산을 옮기고도 남을 힘의 파도 앞, 댈런은 물러나지 않았다.
“크···!”
저릿한 손아귀를 꺾어 튕겨내고, 여파를 어깨 너머로 빗겨내며 앞으로 한 걸음.
「닫힌 설산의 하늘」
「권(拳)」
꽈르───!
투사와 전격술사의 최후를 장식한 일격이 주먹 끝에서 떨쳐졌다. 창검의 간격 안쪽, 지근거리에서 터져나가는 뇌성이 흉갑을 두들겼다.
━━━━━우득!
주먹의 형상으로 우그러지는 흉갑. 권격은 빗겨나갔다.
후우.
숨을 들이쉰다. 댈런은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 필살의 일격이었던 권격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공세의 일부분일 뿐.
후우.
하나의 수로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면, 여럿 쌓아 흐름으로 만들어가면 될 따름이다.
검을 휘두를 간격을 내주지 않고, 끊임없이 접근하며 연달아 권격을 날렸다.
쾅! 쾅! 꽈르릉!
산봉우리도 날려버릴 뇌성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물러나는 용신의 날갯짓을 따라 허공을 연달아 짓밟으며 따라잡았다.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
「반전(反轉)」
공간 전이 술식으로 거리를 벌리려는 순간, 중력의 방향을 뒤흔들어 감각에 혼선을 빚어내고.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취우진청(驟雨振靑)」
「천록(穿綠)」
발걸음마다 수백 가닥의 푸른 전격을 비처럼 쏟아내며, 진녹빛 전광을 그 사이사이에 쏘아내 벌어진 간격을 메꿔낸다.
쿠르르르릉!
오색찬란한 정광이 쉴새없이 충돌했다. 설산 전역에 걸쳐 펼쳐진 영역의 정경이, 한 점으로 모여들며 용신을 노리는 창칼이 되는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그 모든 걸 설계하는 건 오롯이 댈런의 몫이었다. 오랜만에 후끈 달아오른 두뇌가, 가지각색의 권능을 퍼즐처럼 짜맞추며 흐름을 계산해냈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소년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검의 무게추를 내리찍어 억지로 거리를 벌린 직후, 소년의 입에서 쏟아진 숨결이 전방의 모든 걸 휩쓸었다.
댈런은 그 범위 한가운데 있었다. 검은 숨결이 눈앞으로 몰아치는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
팔을 뒤덮은 갑주에서 터져나오는 아카샤의 전성.
쩌저저저적!
수많은 회차에서 왕국의 수도를 통째로 얼려버렸던 서리바람이, 용신의 숨결에 맞서며 검푸른 폭풍을 빚어낸다.
얼어버린 불꽃이 빗발친다. 열기와 한기가 뒤섞여 날카롭게 피부를 훑는다.
폭풍이 흩어지자마자 눈앞에 드리운 건 백광의 번뜩임이었다.
한 번 반전시킨 공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숨결을 전부 뱉자마자 용신이 검을 들고 벼락같이 날아든 것.
쩌어어엉!
댈런은 붉은 창을 들어 검을 막아섰다. 이전보다 다소 둔탁해진 충격과 힘겨루기.
용신의 얼굴은 이제 침 뱉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부릅뜬 파충류 눈을 보며 댈런은 피식 웃었다.
“힘 좀 빠졌나 보네?”
[······!]
동요하는 순간 밀어낸 창대. 튕겨나가는 검 안쪽으로 내질러진 창극.
소년은 반 걸음 물러서며 망토를 휘릭 돌려 시야를 어지럽혔다. 망토에 새겨진 수많은 술식이 빗발치기 직전, 댈런의 입에서 터져나온 포효가 술식체계를 모조리 꼬아버렸다.
[···첫 포효!]
뻣뻣하게 굳은 망토가 붉은 창에 갈기갈기 찢긴다. 몸까지 찢길 수 없었던 소년이 주욱 거리를 벌렸다.
「이색의 비룡」
댈런은 쫓았다. 다시 내지른 창. 복잡하게 얽히는 궤적이 겹갑을 쪼개고 투구 귀퉁이를 날렸다. 등뒤에서 기습한 비룡이 새빨갛게 타오르는 주둥이로 각반을 물어뜯었다.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춤사위의 구도는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갔다.
구름이 흩어지고 대기가 이지러지는 결전의 현장 저 위쪽, 전격술사의 뇌해와 검붉은 먹구름 역시 착실하게 대룡전의 하늘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물론 전투의 여파로 날아가는 건 설산의 봉우리들도 매한가지였다. 댈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부서지고 무너진 정경은 심상에 적잖은 타격을 주겠으나, 그거야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한 일.
지금은 한 줄의 주문, 한 번의 내지르기에 집중할 때였다.
「답보(踏步)」
만신창이가 된 용신 앞에서 허공을 짓밟고, 반동을 고스란히 모아 창끝으로 전달한다.
용신은 널찍한 검면을 들어 창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막지는 못했다.
으직 소리가 들리며 검면을 부순 창이, 흉갑마저 꿰뚫고 놈의 가슴팍에 틀어박힌 것.
소년의 입이 왈칵 검은 피를 토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로 놈이 말했다.
[빌어먹을 계집···네게 이름은 없다. 너는 적창일 뿐이야. 이름을 잃은 버림받은 용!]
이 새끼 뒈지기 싫어서 지랄을 하네. 댈런은 생각했다.
생각뿐이었다. 입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제 딴에 심리전이랍시고 걸어온 도발은 가소롭기 그지없었으나, 애초부터 이 대화는 그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댈런의 한쪽 눈이 붉게 바뀌었다. 용신은 기회라는 듯 침과 피를 튀기며 소리쳤다.
[한 번 버림받은 주제에 새 주인을 찾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넌 그때나 지금이나 버림받은 짐승에 불과하다! 그 증거를 알려주랴? 네 옛 이름은···카학!]
붉은 창이 으직 상처를 헤집었다. 칵 하고 쏟아낸 피가 용신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댈런은 한쪽 눈의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그가 한 게 아니었다.
[옛 이름은 지나간 것.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쿨럭! 컥!]
용신은 뭐라 말하려 했다. 붉은 창은 그때마다 내장을 거칠게 휘저어댔다.
그사이 왼손에서 피어난 청린의 냉기는 용신의 날개와 발끝을 얼려버리고, 첫 포효의 묵언은 용언으로 빚어내는 술식 자체를 봉인했다.
[내게 새 이름이 주어졌으니, 나는 그 이름대로 살아갈 따름이니라.]
적창의 목소리는 이제 편안했다. 댈런은 무심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첫 대면만큼은 여전히 생생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필멸자의 영역에 구속되었다는 현실에 울분을 가득 품었던 고룡.
당시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존재가, 절벽 위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포효하던 울부짖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주마. 나의 이름은 카멜리아.]
나직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용신의 가슴팍을 헤집은 창에서 불티가 화르르 날리기 시작했다.
용은 이름으로 자아와 존재를 부여받는다던가.
적창의 말이 맞았다. 오래 전 꿈속에서 처음 만났던 고룡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용신에게 버림받은 이름 모를 적창은 죽었고, 지금의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진룡.
「다시 태어난 고룡이 몸을 뉜 절벽」
그녀를 담은 정경은 이름이 바뀌었고.
[눈 덮인 기슭에 핀 붉은 꽃이니라.]
황량한 절벽은 수천 년의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꽃밭이 되었다.
「만화동백(萬華冬柏)」
창끝에서 흩날린 불씨가 꽃피기 시작했다. 도톰한 꽃봉오리에서 열기를 머금고 활짝 피어나는 동백꽃이었다.
셀 수 없는 화염의 꽃잎은 용신과 대룡전의 하늘을 서서히 녹여내렸다.
대지옥과 그 주인이 뭉근하게 녹아 없어지기까지는 반나절 정도가 걸렸다.
찰나를 다투던 싸움에 비해서는 긴 시간이었고.
수천 년에 비해서는 짧은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