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암묵해월령(5)
“댈런, 잠깐만.”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아 세우는 손길.
시에나가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어? 미궁 3층의 청소부 마물들이 시체를 방치해둘 리가 없잖아.”
“확실히 수상하긴 하군요. 벗기기 힘든 갑옷이야 그렇다 쳐도, 고가의 무기나 배낭에도 손댄 흔적이 없습니다.”
잠잠히 안력을 돋우던 루시아도 거들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늪지대 한가운데 보란 듯이 방치된 이십여 구의 시체.
전투의 흔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함정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탐험가들 중에는 특수하게 조제한 약을 먹은 뒤, 죽은 척 누워있다가 기습하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루시아의 선배격 되는 성기사 역시, 악마와 싸우던 중 성검을 노린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지.
사실 그 성기사의 경험이 적었을 뿐, 배신이나 암습 자체는 미궁에서 드문 단어가 아니었다.
치안의 개념이라도 존재하는 지상과는 달리, 미궁 안은 기본적으로 힘이 곧 질서인 무법지대.
범죄가 일어난다 해도 증명할 길이 없으면 처벌이 난해하고, 애초에 골치 아픈 일을 막기 위해 죽여서 입을 닫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탐험가 사망 요인의 비공식 일 순위가 마물이 아닌 같은 탐험가겠는가.
그렇기에 댈런 역시 일전에 미궁에 내려왔을 당시에는, 철저하게 기습과 함정에 유의하면서 다녔었다.
“그래서 뭐 문제될 거 있소?”
“···응?”
물론 그건 오래 전 이야기일 뿐.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는 댈런의 뒤로, 어정쩡해진 시에나의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겠어.”
용 발톱 수준의 공격이 아닌 이상 생채기도 나지 않는 피부. 내장이 짓이겨져도 순식간에 재생해버릴 수 있는 회복력.
기껏해야 미궁 3층에 내던져진 탐험가들 중에, 댈런의 상대가 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댈런은 감각을 흩뿌려 주변을 훑으며 탐험가 파티를 향해 다가갔다.
문제될 건 없었다. 감각권에 걸리는 건 전무했고, 만에 하나 죽은 척하다가 기습하는 놈들이라면 진짜 죽여주면 그만.
더군다나 일견 멀쩡해 보이는 시체들의 몰골은, 자세히 살펴보면 죽은 척이라기에 과할 정도였다.
온몸에 실낱 같이 미세한 구멍이 숭숭 뚫린 몰골은, 마치 길고 얇은 벌레가 단단한 과일을 파먹은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까.
“쯧쯧···끔찍한 죽음을 맞이했구만.”
뒤따라온 펠버가 지팡이 끝으로 시체를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마탑의 고문서에서 비슷한 그림을 본 적 있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얇은 촉수로 사람의 혼을 빨아먹는 괴물. 촉수아귀의 소행인가?”
“맞소.”
“이놈도 미궁 5층에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는데···미궁 심층부에 뭔가 단단히 이상이 생겼나 보군.”
댈런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발끝으로 엎어진 시체를 슬쩍 뒤집었다.
굳은 진액과 피가 후두둑 떨어지며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머지않아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씩 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짧은 조사 끝에 내리게 된 결론은, 이곳이 전투 현장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학살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요.”
루시아가 말했다.
탐험가들이 상대한 마물인 촉수아귀는, 미궁 5층에서도 상위격의 포식자다.
악마 뺨치는 생명력과 반쯤 신비 덩어리인 육신의 폭발적인 움직임은, 진룡과 정면에서 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
반면 부패가 막 시작되고 있는 시체들 중에는, 3위계를 넘어서는 탐험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파티의 절반 가까이가 미궁 1층에서 활동해야 할 수준이었으니, 초월자급 포식자의 상대가 될 리가 없는 상황.
“소도시 경비병이나 쓸 법한 강철검. 허접한 보호막 술식이 걸린 목걸이. 무장이 하나같이 쓰레기야. 미궁 3층에 어울리지 않아.”
“왜 여기까지 내려온 걸까요? 작열사막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출구가 막혔으니까.”
화륵.
손에 불을 일으켜 끈적하게 달라붙은 시체의 진물을 날려버린다. 댈런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출구 말입니까? ···아, 결계탑.”
“그렇소.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 내려온 거지.”
그림자 없이 나는 새, 이노우코 토드에게 전해 받은 소식.
금강궁의 전령인 그는 결계탑의 붕괴로 인해 미궁으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혔다는 소식을 전해왔었다.
그리고 출입구가 봉인되었다는 건, 단지 들어가는 길만이 막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미궁 안으로 내려간 탐험가들이 나올 통로와, 그 통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안전지대 역시 사라졌다는 이야기.
“결계탑이 복구되는 걸 기다리느니, 그 시간에 다른 틈으로 나올 생각이었던 거요. 개중에도 가장 잘 알려진 게 균열이니, 균열로 이어지는 3층까지 내려온 것이겠지.”
문제는 미궁 심층의 마물들이 이미 3층을 점거해버렸다는 것.
작열사막과 바닥 없는 늪 모두 위험천만한 마경이지만, 5층의 포식자들은 그 둘과 비교해도 악몽 그 자체였다.
물론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촉수아귀에게 영혼이 빨아 먹힌 껍데기뿐이라도, 미궁 3층의 청소부 마물들에게는 여전히 탐스러운 먹잇감.
허나 시체는 천천히 부패해가고 있을 뿐, 지나치게 멀쩡한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지난 며칠 동안 마물을 한 마리도 마주치지 못했었지.’
균열을 통해 빠져나온 심층의 마물. 미궁을 벗어나려다 죽어나간 탐험가 파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3층의 원주민 마물들.
모두 수백 회차 동안 거의 본 적 없는 일들이다.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퍼즐은, 또 하나의 난관을 예견하고 있었다.
일단은 계속 가다 보면 알게 될 일. 일행은 부패해가는 시체를 화장한 뒤 자리를 옮겼다.
미궁에서의 다섯 번째 날이었다.
***
탐험가 파티와 조우한 건 그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미궁 닷새째 이후 일행은 하루에 최소한 한 번, 많게는 서너 번까지 전멸한 파티를 발견했다.
작게는 열 명 안팎에서 최대 서른 명 남짓한 규모의 탐험가 파티들.
미궁 안에서 마지막 여정을 마친 이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상태였다.
“···우욱.”
8일째 발견한 파티는 작은 벌레에게 갉아먹혀 장비만 남은 상태였다.
10일째에는 큼직하게 한 입씩 베어 먹혀 상반신과 하반신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현장도 지나쳤다.
촉수아귀가 영혼만 먹고 버린 경우도 몇 번쯤은 더 마주했고, 간간이 탐험가 파티뿐 아니라 대규모로 떼죽음 당한 원주민 마물의 시체들도 있었다.
그런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을 쉰 번도 넘게 봤을 즈음, 댈런과 일행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팔시온이 좆될 예정인 것 같군.”
“···당신은 항상 이상한 타이밍에 입이 거칠단 말이지.”
타다닥.
자작거리는 모닥불을 얇은 가지로 들쑤신 시에나가 말했다.
댈런은 코를 긁적였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틀린 이야기가 아니긴 해. 아무래도 미궁의 마물들이 죄다 위로 올라간 것 같으니까.”
지난 보름간 댈런과 일행이 내린 결론이었다.
심층에서 올라온 마물들은 단순히 바닥 없는 늪의 생태계를 파괴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들의 무리에 늪지대의 마물까지 모조리 합류시킨 뒤, 미궁 2층으로 올라갔다는 쪽이 더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늪지대의 먹이사슬을 구성하는 셀 수 없는 마물들이, 문자 그대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이따금씩 보이는 심층 마물들의 ‘식사’ 흔적 역시, 2층으로 올라가는 출입구 쪽을 가리키고 있었고 말이다.
“확실히 이상하긴 해. 당신 말대로라면, 미궁의 마물들은 어지간해서는 층과 층 사이를 이동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그렇지.”
“뭔가에 홀린 걸까? 혹시 심층의 마물들은 다른 마물을 매혹하는 능력이라도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댈런은 소시지를 질겅이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둘이었다.
하나는 에낙사구스의 소행. 다른 하나는 그가 모르는 변수의 등장.
전자는 불가능했다. 악신이나 그 휘하의 대악마들은 설정상 미궁에 개입할 수 없었으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소원의 돌은 진작에 간교한 악신의 손에 떨어졌겠지. 그리고 이 세계는 이미 멸망했을 테였다.
‘그럼 다른 변수라는 소린데.’
미궁 심층부의 마물들을 쫓아냈다는 건, 최소한 대악마급 이상 되는 존재라는 의미.
거기다 놈들을 죄다 미궁 저층부로 몰아갈 정도라면, 악신에 버금가는 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궁 심층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댈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그가 탐험했던 곳은 5층이 마지막.
소원의 돌이 있는 7층이나, 무저갱이라 불리는 6층은 모두 경험 밖의 영역이었다.
“어쨌든 당장 급한 건 소원의 돌이잖아? 미궁 위로 올라가서 마물들을 사냥하진 않을 거 아냐?”
시에나가 어포 덩이를 꺼내 나뭇가지에 꿰며 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애초부터 시간 싸움.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신경 쓸 거 없네. 대결계가 멀쩡하다니까 한동안은 버텨주지 않겠어?”
“그럴 거요. 금강궁도 이쯤 되면 이상을 느꼈을 테니, 저들끼리 무슨 수라도 써보겠지.”
댈런의 경험상 미궁도시의 방여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어느 회차에서건 악신들의 총공세에도 한동안은 버텨주었던, 인류 최후의 보루라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요새도시.
더군다나 이번 회차의 미궁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자원들을 손에 넣었다.
동맹인 차르국과 하이 오크 부족은 물론이고, 머나먼 동방의 엘프 왕국과 성기사단, 옛 대룡까지도 힘을 합친다고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버번이 정식으로 미궁도시와 동맹 맺은 것도 처음 있는 일이군.’
깃털의 마녀 때문에 미지근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어느 회차에서건 확고한 동맹이 된 적은 없던 용이다.
이번에도 이런저런 거래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용신과의 전투 직전까지 중립을 유지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수천 년 이상 살아온 고룡이 자신만의 철칙을 깬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조상과의 계약에 따라 자신을 구하러 온 버번에게, 시에나가 곧장 새로운 계약을 제시했던 것.
“그래서 거래 내용이 대체 뭐였소?”
“궁금해?”
어포를 조금 뜯어 질겅거리며 짓는 미소.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하지 그럼. 수천 살 먹은 용을 어떻게 구워삶았는데?
“선조 마녀의 유해를 찾아주기로 했어.”
“선조 마녀?”
“그래. 몽왕의 지하궁전에서 죽은 초대 깃털의 마녀.”
몽왕의 지하궁전이라. 댈런은 말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몽왕의 지하궁전은 동쪽 바다 건너, 그림자 엘프들의 섬에 지어진 거대한 왕릉.
엘프들이 건재할 때는 외교적인 이유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고, 지금은 라필렘에게 정복되었으니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진 장소였다.
지하궁전 공략의 난이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지하궁전에서 유해를 가져오려면 우선 바다를 건너오는 중인 라필렘과 그 군세를 쳐부숴야만 했다.
사실상 계약 내용을 이행하려면 종말을 극복하는 게 선결 조건이 되는 셈.
그 말인즉 버번의 입장에서 대가를 받아내려면, 자발적으로 종말을 막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노린 거요?”
“글쎄.”
시에나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긴 속눈썹은 모닥불의 일렁거림 앞에서 평소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서명했으면 끝이지. 구두계약도 계약이라고.”
“아무리 봐도 불공정계약인 것 같은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순식간에 웃음기 싹 지우고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 댈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곧 불티 타닥거리는 소리가 그의 나직한 웃음을 묻었다. 잠깐의 침묵 뒤,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몽왕의 지하궁전. 함께 가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