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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6)
타닥.
불속에서 삭정이가 퍽 하고 터졌다. 점점이 흩어지는 주홍빛 사이, 댈런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내가 왜 대답을 망설이고 있지?
지하궁전에 내려가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5위계쯤 되는 초월자 캐릭터로도 돌파한 적 있었으니까.
악신들을 꺾어 종말을 극복하고 섬에 남아있을 라필렘의 잔병을 처치할 즈음이면, 초대 마녀의 시신 회수쯤이야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일이 될 터.
거기까지 생각한 댈런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지.
“당장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야.”
시에나가 말했다. 그녀는 이내 옷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자러 가야겠다. 불침번 새벽 순번이라서.”
“···안녕히 주무시오.”
“당신도.”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불 속에 던져넣은 뒤, 마녀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착 가라앉은 공기만이 남아있었다.
타다닥. 타닥.
모닥불 너머의 늪지대는 고요했다. 소음이 사라진 밤공기의 적막함은 미궁에서나 지상에서나 같았다.
그건 댈런이 이 세계에서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었다.
축축한 밤공기가 그를 편안하게 감싸안는 느낌. 도시의 시끄러움 속에서 자라온 그로서는 느껴본 적 없는 안온감.
멍하게 늪을 응시하던 댈런은 문득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건 바스락거리는 종이쪼가리였다.
‘21세기의 대한민국···자유민주주의···게임을 좋아···.’
찢기고 불탄 종이 위에 점점이 적힌 단어들.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글자들에서 짙게 묻어나는 향수.
아직 팔시온에 도착하지 못했던 튜토리얼 시절, 댈런은 용병일을 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짬 날 때마다 이런 일기를 적곤 했었다.
그리고선 봉투에 넣어 줄로 묶은 채, 배낭이나 품속에 항상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 용병 시절도 벌써 한참 전 일이었다. 오랜 세월 그의 품 속에 머물며 숱한 싸움을 견뎌온 종이는 그 세월의 대변인이었다.
혹시라도 아르보르가 볼 것을 염려해, 다른 짐은 다 아공간에 넣더라도 결코 넣지 않았던 일기장.
수십 장 중 단 한 장만이 남아, 그마저도 찢기고 불타 보이는 단어가 거의 없는 종이 쪼가리.
‘겁나.’
문득 잠자러 들어간 마녀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당신이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을까 두려워.’
폐허가 된 르비바흐의 성벽 위, 해질녘의 어스름은 시에나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웠었다.
그 얼굴은 그가 지켜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다시 잃지 않기로 결심한 소중한 인연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왔다. 한 번도 이겨낸 적 없는 종말을 처부수기 위해 매번 사선을 기꺼이 넘어섰다.
생각해보면 그 이후를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종말이라는 적이 그만큼 거대하기 때문이었겠지.
만약 소원의 돌을 얻은 대가로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악취나는 늪의 침낭과 디퓨저 냄새가 벤 사무실의 라꾸라꾸 침대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떤 쪽을 선택할까.
지하미궁에 같이 내려가주겠냐는 시에나의 질문은, 사실 그 선택에 대한 물음이었겠지.
타닥이는 모닥불 위, 듣는 이 없는 밤공기 사이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
“그래서···여기가 4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란 말인가?”
쿠과과과과···!!
고막을 통째로 울리는 굉음 한가운데, 비요른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일행은 폭포 위쪽에 서있었다. 정확히는 폭포가 시작되는 부근에 툭 튀어나온 바위 위였다.
광활한 늪지대 한가운데 뻥 뚫린 직경 수백 미터의 구멍은, 실시간으로 수백 톤의 물을 저 밑으로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습기 때문에 콧속이 살짝 답답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 정도 폭포면 아래쪽은 물 아닌가?”
다시 조심스레 구멍 안을 내려다보는 난쟁이. 폭포 아래쪽은 물안개 때문에 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물 맞소. 호수 아래로 잠수해서 헤엄쳐 들어가면 미궁 4층이 나오지.”
“바다 아래의 세상이라니. 그 무슨 괴이쩍고 위험천만한 장소인지······.”
말을 흐린 비요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댈런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었다. 이 양반 오늘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따지고보면 3층도 작열사막 아래 있잖소. 2층도 비슷하고.”
“···아니,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닐세.”
“그러면?”
“내가 수영을 못 한다는 거 이야기했나?”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수염을 꽉 움켜쥐는 난쟁이. 댈런은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아버지, 아무래도 난쟁이는 타고난 두려움이 많은 종족인 것 같습니다. 숲도 무서워해, 용도 무서워해, 이제는 물까지···]
“아카샤! 두, 두려움이라니! 이 세상에서 난쟁이만큼 용감한 족속도 없네!”
[그러면 이런 생태는 비요른 당신만의 고유한 특색이라 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유소년기를 산골짜기 광산에만 틀어박혀서 자라기라도 하셨는지···.]
“아카샤. 거기까지 하렴.”
시에나였다. 소년에서 청년이 다 된 용은 여전히 자신이 어머니라 부르는 존재들의 말을 곧잘 들었다.
무슨 생명의 은인 보듯 바라보는 난쟁이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시에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 나도 물을 무서워해. 다리 건너는 정도는 괜찮지만, 넓은 바다나 깊이 잠수하는 건 좀.”
“···진심이오?”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하겠어. 적어도 당신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시에나. 댈런은 손을 들어 얼굴을 문댔다.
생각해보면 게임에서도 시에나는 배를 탈 때마다 수면제를 먹고 선실에서 나오지 않곤 했었다.
그때는 그냥 배멀미가 심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아예 물을 무서워하는 거였을 줄이야.
‘술통이 둘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미궁 3층과 4층의 경계는 바닥 없는 늪의 물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
미궁 4층으로 내려가는 길 자체야 이곳 외에도 몇 군데가 더 있긴 하지만, 결국 전부 잠수해서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방식이다.
단순히 호수나 바다를 건너가는 경우라면, 기절시켜서 배에 태우든 업고 가든 하면 될 일.
하지만 잠수는 좀 달랐다. 더군다나 미궁의 특성상 무슨 변수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으니···.
“그럼 수영만 안 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건가?”
상념을 뚫고 들어오는 펠버의 목소리.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라면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네만.”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며 말했다.
***
부그르르르···!
유선형의 구릿빛 동체가 물살을 가르고 전진한다. 멀리서 보기에 얼핏 물고기처럼 보이는 동체는 사실 금속 덩어리였다.
댈런과 일행을 전부 태우고 물속을 유영하는 쇳덩이. 댈런은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잠수함이었다.
“중세랜드에 잠수함이라니.”
지구에서도 타본 적 없는 걸 여기 와서 타게 될 줄이야.
펠버가 골렘술로 만든 잠수함은, 현대의 어지간한 관광용 잠수정 뺨치는 성능이었다.
마력 추진 방식에 동체는 골렘답게 단단하고, 은신은 물론 실내에서 자동적으로 공기 순환까지 가능한 잠수함.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오랜만에 되새겨보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발발된 마법이 과학과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쿠궁!
그때 잠수정이 작게 출렁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시에나와 비요른. 펠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걱정 말게. 그냥 잔해 덩어리에 부딪힌 모양이니.”
“······.”
“용골 지팡이로 강화하기 전에도 용암을 건너던 놈이야.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실금도 안 갈 걸세.”
펠버의 말에 따르면 엘가이아 마탑은 대륙 곳곳의 광산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광산은 수익의 일정량을 마탑에 바치고, 마탑은 광산 운영의 여러 난관을 의뢰받아 해결해주는 식.
대부분의 의뢰는 무너진 갱도나 곡괭이로 쪼개지지 않는 기반암 정도이지만, 이따금씩은 용암을 통과해달라는 수준의 부탁도 있다고 한다.
특히나 귀금속이 많이 나오는 화산지대의 광산에서는 그런 일이 주에 한두 번 꼴로 터질 정도였고.
“그런 곳에 한 번 파견 근무를 다녀오면, 적어도 골렘술에는 도가 트게 된다네. 이런 호수 정도야 별 문제될 것도 아니지! 으하하!”
펠버는 난쟁이의 등짝을 퍽퍽 후려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긴장을 풀어주려는 모양인데, 안색을 보아하니 속까지 안좋아지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두 다리 뻗고 호수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지상의 호수와 다르게 여긴 바닥 없는 늪의 고인물이 모여드는 곳.
수질 자체가 더러운 건 물론이고, 물 자체가 끈적하게 달라붙는데다 침전물까지 한가득이었다.
그런 더러운 물에서 수영하는 건 댈런으로써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펠버의 제자, 토미 발렌티노가 슬쩍 다가오며 속삭였다. 토미의 어깨 너머로는 난쟁이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뭐가 말이냐?”
“사실 이 잠수함에는 따로 방호 기능이 없거든요.”
“···뭐?”
“심층의 마물들이 올라가면서 호수의 마물들까지 싹 쓸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잠수정 곳곳에서 물이 새고 있을 겁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금발 청년. 댈런은 손끝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는 이내 능숙하게 갑옷 끈을 조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등두드리기를 마치고 다시 잠수정 운전에 집중하는 펠버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소.”
“어딜 말인가?”
“조금 전부터 손님이 따라오고 있거든.”
우릴 먹잇감으로 보는 손님이지. 덧붙인 말에 펠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먼저 내려가 계시오.”
「회명(回冥)」
짧은 인사를 남기고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 순간 몸을 감싼 잿빛 음영이 그를 잠수정 밖으로 인도했다.
쿠구구구···!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격렬한 급류. 탁한 물이 눈코입을 침투하려고 하는 순간, 피부 위를 덮은 바람이 물살을 밀어냈다.
「술식갑주(術式甲冑)」
「백풍갑(伯風甲)」
“시발.”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들며 물속에서 중심을 되찾는다. 바람으로 물을 밀어냈어도 호수의 악취는 그대로였다.
댈런은 썩어가는 늪지의 물과 그 안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들 사이, 안력을 한껏 끌어올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확인했다.
[――――!]
그건 용이었다.
어둠 속에서 세 쌍의 보랏빛 눈을 빛내는 거대한 용.
피막이 너덜거리는 날개는 어렵지 않게 물살을 가르고, 몸길이 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를 물속에서 전진시킨다.
댈런은 놈을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 캐릭터로 플레이할 때, 한 번 때려잡은 적 있는 마물이었으니까.
‘저주받은 고대룡, 관문 수호자.’
원래라면 미궁 5층, 그중에도 가장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마물이다.
미궁 6층으로 내려가는 ‘관문’을 지키는, 일종의 필수 보스몹 이기도 했고.
‘그리고 용답게 말을 할 수 있었지. 오히려 잘 만났군.’
어지간해서 움직이지 않는 미궁 심층의 마물들을 밀어낸 존재는 무엇일까.
더불어 마물들이 죄다 저층부로 올라간 상황에서, 어떻게 저놈 하나만 호수에 남아있는 것일까.
입을 쩍 벌리는 고대룡을 보며 댈런은 웃었다. 안그래도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 딱 적절한 만남이었다.
[――――!]
다소 이질적인 용언이 수중에 울려퍼지고, 보랏빛 숨결이 댈런이 있던 자리를 순식간에 집어삼킨 순간.
쉬이─
[―끄륵?]
숨결과 물살을 죄다 가른 빛살이, 세 쌍 눈깔 한가운데 정확히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