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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세계(2)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적창이 가리키는 곳에는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있었다.
댈라인이었다. 그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용암의 바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일어났나.”
나직한 목소리. 댈런은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이 자리한 곳은 작은 바위섬이었다. 용암 바다 한가운데 비죽 솟아오른 기둥 같은 모양의 바위섬.
그 독특한 형태 탓에 섬의 면적은 넓지 않았다. 섬 중앙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끄트머리의 댈라인까지 기껏해야 오십 걸음 남짓이었다.
‘쯧.’
직경 백 걸음쯤의 넓지 않은 전장이라. 하늘을 뒤덮은 맹독성의 유황 구름 역시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더듬은 허리춤 역시 허전했다. 평소 애용하던 손도끼는 일전의 싸움에서 부서져버렸기 때문.
유물 갑옷 역시 사실상 방어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했다. 미스릴 창은 이미 용신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린 뒤였고.
그나마 의지할 건 몇 걸음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있는 성검과, 대충 삼분의 일쯤 남은 아공간의 유물 무구들 정도일까.
이대로 싸운다면 승산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때 댈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일생을 돌아보고 왔겠지.”
잡음이 섞인 음색이었다. 댈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제서야 댈라인의 목덜미에 난 상처가 보였다. 의식을 잃기 전 백락을 꽂아넣었던 약점 부분이었다.
[저 기운···마치 피처럼 흐르는구나.]
적창의 말대로였다. 백락에 적중당한 댈라인의 목덜미에서는 잿빛 색채가 피처럼 꿀렁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기이한 출혈이 계속될 때마다, 그의 육신 곳곳에 자리한 잿빛 일렁임 역시 범위를 미세하게 넓어져갔다.
마치 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래. 내 짧은 생애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니 어땠나?”
댈라인이 물었다. 댈런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다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뭐라 말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학살과 배신, 약탈과 싸움으로 점철된 생애에 대체 어떤 감상을 남길 수 있을까.
모니터 너머에서 지켜보던 것과, 마치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듯 겪은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는데.
“······.”
시체들은 폴리곤 덩어리가 아니었다.
예닐곱 개의 오디오 파일로 표현되던 비명 소리는 수천 수만의 제각기 다른 합창이었다.
도끼날에 흩뿌려지던 시에나의 피가 여전히 뇌리에 선했고, 차디찬 숨결에 얼어붙은 루시아의 경악한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밑에서 죽어가던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 그들의 갑옷과 팔다리를 짓밟을 때, 부츠 아래에서 가죽과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감촉.
오래 전 한때는 살인에 무뎌졌다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죽음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저 그 용량의 한도가 늘어났을 뿐이었다.
“그래. 아직 너는 나 같은 괴물이 아니군.”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고 댈라인이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댈런은 그 태도가 아까와는 미묘하게 다른 걸 느낄 수 있었다.
낮은 음색에서 느껴지는 건 끝없는 원한으로 불타는 투신의 살기 대신, 그로서는 다 알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의 뒤섞임이었으니까.
어째서일까. 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럴 만 하지.”
“···뭐?”
“네 삶을 보니 그렇더군. 네가 내 생애를 본 것처럼, 나도 조금 전 너의 일생을 돌아봤다.”
댈라인은 천천히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댈런도 조금 놀랐다.
투신의 두 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잿빛 색채를.
“두 번의 삶을 살았더군. 이 세계의 삶과, 또 다른 세계에서의 삶.”
지구. 대한민국. 이런 발음이었지.
그가 말했다.
***
“여러모로 형편없는 인생이었더군.”
약간의 침묵 뒤 댈라인이 꺼낸 첫마디였다.
댈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댈라인도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리고 있었다.
“···내가 좀 등신처럼 살긴 했지.”
“그냥 등신 수준이 아니던데. 솔직히 좀 허탈했어. 내가 악신들보다도 두려워했던 존재의 삶이, 고작 마이너스 통장에 벌벌 떨면서 집에서 키보드랑 마우스 딸깍이는 삶이었다니.”
시발 저건 좀 너무 상세한데.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로서는 댈라인이 대체 어디까지 보고 온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이쪽이 주마등처럼 슥슥 지나갔으니 반대쪽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평일에는 허구한 날 팀장에게 까이고, 그런 주제에 주말에 걸려온 부모님 안부 전화는 걱정시켜드릴 수 없다는 핑계로 씹어대기 일쑤. 사실은 그냥 귀찮았던 거면서.”
물론 댈런이 불편한 표정을 짓건 말건 댈라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등 약 오르기 딱 좋은 추임새들을 곁들이는 건 덤.
“회사 동기가 잘나가는 걸 보면서 질투하지를 않나. 동창회 가서는 속으로 다른 친구들을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질하고.”
“야,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거기까지···.”
“그런 열등감을 가졌으면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을, 집에 도착하자마자 캔맥주 까고 게임이나 하고 앉아있는 건 무슨 경우냐 대체. 그러니 여자친구에게도 차인 거 아니겠어?”
이 씹새가. 주둥이에 따로 능력치를 투자하기라도 했나.
다시 한 번 백락을 꽂아넣는다면 이번에는 목덜미가 아니라 저 나불거리는 주둥이였다.
댈런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는 사이, 신랄하게 지구에서의 삶을 까대던 댈라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럽더군. 내가 바라마지않던 삶이었어.”
“···뭐?”
두 번 먹이는 건가. 순간 떠오른 생각은 댈라인이 입가에 띄운 씁쓸한 미소를 보자마자 사라졌다.
“나에게는 인생이 없었거든.”
쿠르르릉···!
매캐한 유황 구름은 하늘을 탁한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구름 사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짧은 번쩍임. 그리고 우르릉 하는 천둥 소리.
“인간의 생은 번갯불만큼이나 짧지.”
어느새 목 언저리부터 턱밑까지 잿빛으로 물든 전사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개는 그 얼굴의 음영을 반대로 뒤집었다. 혈색 붉은 얼굴은 그 잠깐 동안 창백했다.
“그럼에도 그 찰나만큼은 저 머나먼 태양의 표면보다도 뜨거워. 인생이라는 건 그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삶이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달려가는 자기만의 역사야.”
“······.”
“시작점이 없는데 어떻게 온전할 수 있을까. 기초를 다지지 않고서는 삶은 물론이고 심상 역시 완성될 수 없는 법이지. 기껏해야 모래사장에 투쟁과 살육으로 쌓아올린 허술한 구조물일 뿐. 아무리 신위에 올랐다 한들, 그런 근본 없는 심상으로 악신의 대지옥을 이기는 건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었어.”
땅에 꽂힌 보검의 무게추에 손을 올린 전사는, 조용히 읊조리듯 질문을 이어갔다.
“너는 지금도 종말을 극복하고 싶나? 진짜 네 고향과 그곳에서의 삶을 전부 잃고서, 네 의지와 무관하게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지금에도?”
“그래.”
댈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자신의 과거를 전부 반추한 이 앞에서, 이전처럼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잃었고, 그 잃음으로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건 그 역시 알고 있을 테니까.
댈리안은 마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나를 넘어서라.”
댈리안은 한 걸음 물러서며 손짓했다. 그러자 보검이 제 스스로 땅에서 뽑혀 그의 손에 쥐어졌다.
댈런도 가만히 손을 폈다. 자석처럼 끌려온 성검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착 붙었다.
“잘 들어라. 에낙사구스가 약해진 쑴과 테모므론을 집어삼켰다. 칼날산맥에 봉인됐던 짐승을 자기 세력에 포섭했고, 신을 잃고 흩어진 용족의 일부를 규합했어. 라필렘도 머지않아 놈에게 삼켜질 거야.”
“···정말인가.”
“생전에 질척할 정도로 맞붙어 싸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내 직감은 이 세계의 악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말해주고 있다. 믿어도 좋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간접적인 증거야 이전부터 넘쳐났으니까.
종말이 최후반부에 근접해오는데도 에낙사구스의 군세는 서쪽에서 고개조차 내밀지 않고 있었다.
쑴과 그 휘하 악마들의 활동이 뜸해진 것 역시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했고.
악신이 다른 악신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사령술사를 키웠던 회차에서 테모므론을 통해 알게 되었던 바.
단지 당시로서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깊게 생각하기를 미뤄뒀을 뿐이었다.
애초에 악신 다섯과 싸우건, 아니면 다섯만큼 강한 하나와 싸우건 이쪽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너는 이미 조건을 갖췄다. 가까스로나마 신위에 닿아있지. 거기에 내 힘이 더해지고 소원의 돌까지 얻는다면, 너는 이 대륙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아직 불타지 않은, 네 소중한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세계를.
말을 맺은 전사가 양손으로 쥔 보검을 곧게 들어올리고, 망설임 없이 내리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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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검격 끝에 맺힌 균열.
그건 마치 세계가 갈라지는 것 같은 현상이었다.
세상이라는 틀을 모조리 깨부수고, 그 깨진 빈틈을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대체하려는 듯한 이질감.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영역의 개방이 현실이라는 그림 위에 잠시 다른 색깔의 물감을 덧칠하는 것이라면.
이건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 자체를 찢고 다른 종류의 그림을 억지로 기워내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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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수복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끝없이 반발하며 서로를 굴복시키려 드는 두 법칙의 충돌.
그건 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재해라는 말이 어울릴 터.
그리고 그 결과물은 본디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가, 물리적인 한 장소에 드리워지는 현상이었다.
「영역 강림」
「인세를 불태우는 검은 태양」
부글거리는 용암 바다를 뚫고 산봉우리들이 솟아오른다.
새까맣게 탄 산맥과 골짜기들 위쪽으로, 수만 다발의 검은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꽂혔다.
검은 뇌우에 갈기갈기 찢어져 흩어진 유황 구름.
그 흔적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불길하게 이글거리는 검은 태양.
“나는 네 기억 속 대장장이나 사령술사와는 다르다. 나에게 철을 두드리고 비석을 다듬을 시간 따위는 없었지. 내 생은 그저 끝없는 싸움이었을 뿐이었고, 내가 네게 내 삶을 전해줄 방법 역시 그것뿐이다.”
빛이라는 명제의 정의를 뒤엎어버리는 흑색의 햇빛 아래에서, 양손에 검과 도끼를 쥔 댈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신성을 가져가. 일곱 위계를 초월한 존재가 되어라. 신위를 완전히 넘어서기 위해서는 너 역시 선택해야 할 거다. 오래 전 너의 선배격 되는 전사가 그랬듯이.”
“선택?”
“물론 네가 종종 하던 생각처럼,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겠지.”
그러니 지금은 나와의 싸움에 집중해라.
전사가 검을 겨누며 말했고.
그와 동시에 태양이 땅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