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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78화 (27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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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세계(3)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한 번씩 해보는 상상들이 있다.

태양이 땅에 가까워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댈런도 그랬었다. 어린 마음은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 상상을 했던 때가 추운 겨울이었던 영향도 있을 테고. 수도관이 동파된 겨울은 오들오들 떨렸으니까.

쿠구구구구······.

좀 더 머리가 굵고 나서는 알았다. 그런 일은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일어나면 곧 지구의 끝이나 다름없다는 걸.

물론 그 당시에도 그 재앙을 눈앞에서 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난데없이 게임 속 판타지 대륙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스아아아···!

대기중의 수분이 싹 날아간다. 텁텁해지는 입안. 뻑뻑한 눈.

찜질방의 공기 따위는 저리가라 할 열기가 피부 위에 내려앉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폐와 기도가 그대로 익어버릴 고온이었다.

물론 댈런의 단단한 살갗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만 주변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치지지지···화륵!

발치의 작은 풀포기가 순식간에 바싹 마르고, 이내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이 확 붙어버렸다.

유황 바다의 용암대지와 유독성 공기에서도 살아남은, 사실상 마물이나 다름없는 식물임에도 버티지 못한 것.

“설산에 왜 눈이 없나 했더니, 다 증발해서 날아가버린 거였나.”

용암의 바다를 뚫고 올라온 산봉우리들이 죄다 까맣게 탄 것 역시 같은 이유겠지.

하늘에서 사정없이 내리치는 검은 번개들도 일부 공로가 있겠지만, 만년설을 날리고 지면을 검게 그을린 결정적인 원인은 저 태양이 분명했다.

쿠르르릉···.

묵빛의 태양이 내리쬐는 하늘에서 검은 벼락이 구름처럼 몰려다닌다. 그을린 골짜기 사이로는 붉은 용암이 강처럼 흘러갔다.

제물로 죽어간 원혼들은 그 지옥도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떠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신 중 하나의 대지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광경.

“영역 개방으로는 안 될 거다.”

그 지옥의 주인은, 왼손의 도끼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그림자를 가지고 실체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악신을 쓰러뜨릴 생각이라면 이걸 염두에 둬야 할 거야.”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악신의 본체를 처치하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놈이 다스리는 대지옥이 그대로인 이상, 다른 악신이나 휘하의 대악마가 언제든 그 권능을 이어받을 수 있을 테니까.

“세계를 무너뜨리고 집어삼킬 수 있는 건 또 다른 세계뿐이지. 네 세계를 움직여라. 이미 할 수 있잖나.”

댈라인이 웃었다. 힘의 소모가 컸기 때문인지, 그 미소는 절반쯤이 잿빛이었다.

“······.”

댈런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댈라인에게서 등을 돌린 그는, 천천히 섬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이윽고 섬 끄트머리에 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는 검은 태양은,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조금씩 움직이는 중이었다.

댈라인의 말이 맞았다. 그 역시 영역을 직접 움직일 수 있었다.

대룡전의 붉은 하늘이 드리워진 본단. 그곳에서 일곱 번째 위계의 편린을 잡은 순간, 세계를 움직일 자격이 쥐어졌음을 깨달았으니까.

다만 세계와 세계가 직접 충돌하는 과정에서, 심상 너머 영역에 영구적인 상흔이 남는다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그를 망설이게 했을 뿐이었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며 생길 후폭풍이, 곁에 있는 동료들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었고.

그러나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

그대로 검을 들어올린다.

두 손으로 단단하게 손잡이를 말아쥔 채. 하늘을 향해가는 검끝이 공간을 천처럼 구겨갔다.

───━━━

세계가 다른 세계를 찢고 들어가는 과정. 그 침노의 현장을 목격한 건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테모므론이 화신체 혈령의 몸을 빌려 일부분이나마 강림시켰던 ‘망자의 땅’.

천 단위의 용 군세를 이끌고 온 용신이, 몇 달에 걸쳐 본단 주변에 펼쳐두었던 ‘대룡전’.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미궁 심층의 장막을 뚫고 드리운 검은 태양까지.

신위에 오른 순간 자격에 닿았고, 세 번이나 목도한 끝에 방법 역시 거머쥐었다.

남은 건 스스로의 의지 하나뿐. 들이쉰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성검이 달아오른 공기를 갈랐다.

──━━│││

세계가 다시 한 번 갈라진다.

빈틈을 억지로 열어젖히고, 그 사이로 쏟아져들어오는 이질적인 법칙과 질서.

┃┃││││┃┃

연이은 충돌에 지반이 통째로 흔들렸다.

새까만 골짜기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그 틈 사이로 저 깊은 무저갱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궁의 경계가 또 한 번 무너지는 과정이었지만, 댈런은 신경쓰지 않았다. 댈라인도 마찬가지였다.

두 세계가 부딪히며 미궁의 정경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현장 한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의 검끝만을 향해있을 뿐.

「영역 강림.」

「설산에 내리쬔 시작의 빛」

시작은 빛의 기둥이었다.

게임 시작 시점에 모니터를 가득 채우던 빛과 유사한, 6위계에 올랐을 때부터 댈런의 영역 한가운데 우뚝 서있던 빛기둥.

지옥도나 다름없던 새까만 산맥과 골짜기들은, 하늘 저편을 가르고 내리꽂힌 빛기둥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만년설이 검은 토사를 밀어냈다.

새롭게 솟아오른 산봉우리는 기존의 산맥을 무너뜨렸다.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오색 번개의 바다가 검은 태양을 밀어붙이고.

「닫힌 설산의 하늘」

그 아래쪽에서는 검붉은 먹구름이 검은 번개의 구름을 물어뜯는다.

「창공 위 서릿발의 수호자」

산봉우리를 휘도는 차디찬 한기는 끌어넘치는 용암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극한의 열기와 냉기가 만나며 사정없이 울려퍼지는 폭발음 사이, 검은 태양 아래를 떠돌던 원혼들이 거대한 짐승의 형태로 뭉쳐 내달렸다.

[저건 내가 맡으마. 전사에게 집중하거라.]

「다시 태어난 고룡이 몸을 뉜 절벽」

검붉은 용이 스쳐가며 남긴 속삭임.

원혼의 집합체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는 용의 형태로 스스로를 변모시켰다.

적창의 주둥이 앞에서 검붉은 구슬이 맺혔다. 구슬은 이내 한 줄기의 직선이 되어 하늘을 갈랐다.

원혼용 역시 부패해가는 주둥이를 쩍 벌렸다. 저주와 사기가 응축된 검은 숨결이 뻗어오는 붉은 직선과 맞닿았다.

━━━╋╋╋╋━━━

하늘이 일그러진다.

온 세계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뒤엎어지는 산맥. 얼어붙는 용암. 새하얀 만년설과 바싹 마른 흙더미가 뒤섞인다. 번쩍이는 번개와 화염이 서로를 갉아먹으며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두 세계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미궁의 원래 정경은 사실상 지워지고 없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댈런과 댈라인이 딛고 선 땅뿐이었다. 직경 백여 걸음쯤 되는 좁은 기둥 모양의 바위섬.

“둘만 남았군.”

“그래.”

댈라인이 먼저 말했고,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 순간 두 인영은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투두두두두──!!

공기 찢어지는 소리.

흐릿한 잔상이 좁은 바위섬 위를 휩쓸었다.

마치 제대로 잡지 못한 카메라의 상처럼, 이곳저곳에서 희끗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두 전사의 모습.

단단한 돌바닥에 깊이 찍힌 발자국과 검흔만이, 물리적인 한계를 초월한 그들의 움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쩌―!

검과 검이 맞닿았다. 넘치는 힘은 검신이 얽히기보다 튕겨나가게 만들었다. 그 반발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대로 호선을 그려 옆구리를 노리고 올려긋는 검격.

콱!

투박한 손도끼가 그걸 막아섰다. 댈라인의 손도끼였다. 도끼날에 금이 쩍 갔지만, 성검의 전진은 그대로 멈췄다.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건 보검 뒤랑달의 시퍼런 검광이었다.

「뇌창(雷槍)」

기사왕의 보검이 샛노란 뇌전의 창과 얽혔다. 내리긋기를 막아서는 전격의 창대. 비틀어 튕겨내고 찌르는 검끝. 손 안에서 회전하며 튕겨내는 창. 곧장 창을 고쳐쥐고 이어가는 찌르기.

성검과 손도끼가 얽혀있는 상황. 서로의 반댓손만을 움직여 급소를 노리는 공방에 충격파가 연이어 터져나갔다.

공방의 끝은 번쩍임이었다. 뇌창이 응축된 벼락을 터뜨리며 생긴 폭발.

꽈릉─!

뒤늦게 울려퍼지는 천둥 소리. 허공에 붕 떠오른 두 사람이 제각기 뒤로 날아갔다.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수인과 영창이 이어졌다. 아직 발 디딜 곳도 찾기 전 충돌하는 주문의 향연.

「풍월곽(風刖廓) : 배율(排律)」

수천 가락의 칼바람이 파도가 되어 몰아친다.

「천진려(泉振吕)」

「청파벽조(淸波劈肇)」

그에 맞서는 건 허공에서 쏟아져나온 거대한 해일이었다.

「홍염신보(紅焰神步) : 여래장(餘來墻)」

허공에 내리찍혀 용암을 토해내는 수십의 발걸음.

「홍염주(紅炎柱)」

「삼력거반(三力擧反)」

디딜 땅조차 없는 발자국의 벽을 부수고 뻗어나가는 수백의 불기둥.

화염과 화염이 각자 상대를 태우고, 전격과 전격이 얽히며 냉기가 서로 격돌한다.

수인을 맺기 위해 자연스럽게 놓은 성검과 보검은 허공에서 쉼 없이 검격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마찬가지로 손을 떠난 댈라인의 도끼는 아공간이 열리며 튀어나온 유물들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술식갑주 : 사중첩」

「청뢰갑(靑雷甲)」

「백풍갑(伯風甲)」

「화염갑(火焰甲)」

「분하갑(噴河甲)」

끝없이 술식을 쏟아내던 찰나, 댈런은 수인의 일부를 할애해 주문을 갑주처럼 둘렀다.

네 가지나 되는 술식을 융합하는 것임에도, 필요한 건 영창조차 없는 짤막한 수인이 전부.

그러나 그 짧은 틈은 그건 팽팽한 균형을 깨기에 충분한 여백이었다.

「흑뢰(黑雷)」

꽈릉!

뇌성보다 한 발 앞서나간 번개가 댈런의 머리를 부쉈다. 방금 형성된 술식 갑주는 단번에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주문이 박살나며 흩어지는 부산물들. 댈라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찢겨나간 마력의 파편들은 진짜였지만, 정작 그 사이에 박살난 머리통의 내용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회명(回冥)」

“뭘 보고 있나?”

대신 들려온 건 웃음기 섞인 속삭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검은 벼락이 쏟아졌다.

「흑뢰(黑雷)」

「무명답인(無明答刃)」

검은 번개가 또 하나의 머리통을 터뜨렸다. 분신이었다.

다른 번개는 팔을 어깨째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번에도 가짜였다.

흉곽이 내려앉는 동시에 꿰뚫리고, 거인의 주먹에 맞은 듯 전신이 산 채로 터져나간다.

사방으로 빗발치는 수천 다발의 흑뢰. 찢기고 타버리는 수백의 인영들.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무한답산(無限踏散)」

허나 끝없이 빗발치는 흑뢰와 마찬가지로, 진짜와 한없이 가까운 분신체 역시 그 한도가 없었다.

공간을 넘나드는 묘리로 만들어진 분신체의 숫자는, 현실에서는 물리적인 법칙에 의해 분명히 제약받는 바.

그러나 회백색 하늘이 드리운 이곳, 현실의 법칙을 벗어난 세계에서 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바로 그거다!”

댈리안이 폭소하듯 외쳤다. 그의 얼굴은 이제 눈 바로 아래까지 잿빛이었다.

비늘이 벗겨지듯 서서히 색채를 잃어가는 붉은 눈. 그 위에 비친 건 어느새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댈런의 신형.

“어때! 이제 좀 알겠나! 신격을 가진 자는 세계의 법칙을 구부리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갈 뿐이야!”

“······.”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는 댈라인과 달리, 댈런은 말 한 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한에 가까운 분신체를 앞세웠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끝없는 흑뢰의 파도를 뚫고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전신에 수두룩한 찢기고 타버린 상흔. 그 위를 덮어가는 용혈의 하얀 증기.

쉬이―

흰 연기를 흩으며 주먹이 움직였다.

단순한 권격. 그 끝에서 맺힌 건 희미한 섬광이었다.

오래 전, 미궁도시의 숨겨진 밀실에서 사교도의 대사도를 지워버린 영역의 발아이자.

악마 골라캅을 포함해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리고, 댈타리온을 포함한 초월자들을 굴복시켰던 일격.

「뇌격(雷擊)」

거의 완전한 잿빛에 가까워진 댈라인은 낮게 웃으며 마주 주먹을 뻗었다. 그의 손에도 검은 섬광이 맺혀있었다.

새하얀 섬광과 검은 섬광이 번쩍이며 부딪히고, 뒤따른 천둥 소리에 두 사람이 딛고 선 바위섬이 가루가 된 순간.

꽈르르릉―!

집요하게 서로를 물어뜯던 두 세계가 휘청이며, 무너진 미궁의 층계 저 아래쪽 무저갱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

아카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쟁반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와장창 깨져나가는 찻잔과 주전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전도를 골똘히 바라보던 루시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카샤, 괜찮아?”

[······어, 그, 그게.]

당황한 눈으로 더듬거리는 청백색 머리칼의 청년.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에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큰 전투를 앞두고 긴장이라도 한 걸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똑똑똑.

그때 누군가 문설주를 가볍게 두드렸다.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 펠버였다.

“아카샤. 여기 있었구나.”

“탑주님.”

“···루시아 경. 내 실례했네. 중요한 업무 중인가?”

“아닙니다, 탑주님. 말씀하시죠.”

노년의 마법사는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천천히 내뱉으며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아카샤를 잠시 빌려가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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