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2화 (282/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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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의 바닥(2)

- ――――――!!

진룡의 전성이 도시를 쩌렁쩌렁 울리고.

- 제 3포병대, 발사!

순은 성벽의 방어 병력이 용들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한다.

콰과광! 콰광!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은 단단한 비늘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튕겨 나갔다. 포탄 역시 난데없는 돌풍에 물 흐르듯 용들을 빗겨나갔다.

방어군의 공세가 한 차례 무력화된 직후, 용들과 성벽 사이의 거리는 고작 일 킬로미터 남짓.

주둥이에서 한가득 모아진 마력이, 숨결의 형태로 쏘아지기까지는 숨 한 번 쉴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성벽 위 병력이 대피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간극이었다.

- ――――!

- ―――!!

수백 줄기의 숨결이 순은 성벽 위를 휩쓴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주문이지만, 동시에 가장 주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술식.

불꽃과 냉기가 병사들을 녹임과 동시에 얼리고, 수류와 폭풍의 압력이 그 잔여물을 찢어발기고 으스러뜨린다.

순은 성벽 위쪽을 막아서는 보호막은, 압도적인 마력의 파도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찢겨나갈 뿐이었다.

- 끄아아아악!

- 릭! 리익! 살려줘!

그리고 보호막이 버티지 못한 파도를 일개 병사나 기사들이 버틸 리 만무한 법.

단 한 차례의 공방 교환으로, 승자와 패자가 명백하게 가려진 순간이었다.

- 방패! 익갑!

도시 안쪽에서 전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순은 구역의 시가지 위로 두 인영이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작은 인간의 형상을 벗어던지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두 마리의 진룡.

조금 더 덩치가 큰 쪽은 녹갈색 눈을 빛내는 고룡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 용신에게서 자유를 되찾은 게 엊그제이거늘! 그 사이에 다시 이름을 가져다 바친 건가!

- ···첫 포효.

-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라! 나는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너희와 달리 온전한 자유를 선택한 진룡이니!

말을 맺자마자 소용돌이처럼 모여드는 마력.

황동을 덮어씌운 듯한 몸체 위로 구불거리는 고대의 문자들이 빛을 발하고, 에메랄드를 깎은 듯한 뿔에서 거친 파동이 퍼져나간다.

━━━━━━!!

눈에 띄는 폭발이나 귀청을 울리는 굉음은 없었다.

조용히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숨결은, 성벽 위에 내려앉은 용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녹갈색 직선이 남긴 자취를 따라 죽음이 번져나갔다.

눌어붙은 시체를 포식하던 머리가 쿵 떨어지고, 숨결을 피하려 날아오르려던 용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추락한다.

- 동족을 학살하다니! 네놈이 그러고도···!

- 헛소리! 그러는 너희는 용신이 적창의 이름을 빼앗을 때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찔거리기라도 했나!

전성을 쩌렁쩌렁 울리며 두 쌍의 용이 얽혀들었다.

청백색 비늘의 청린용이 방패라 불리는 흑룡의 날개를 물어뜯고, 녹갈색 용과 샛노란 비늘의 익갑이 서로의 뿔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영역 개방 : 원한을 쏘아올리는 왕가의 거병」

용과 용이 충돌하며 마력이 요동치는 하늘 아래, 시가지에서는 거대한 강철 골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일버르쿠스의 숨결에서 살아남은 용들을 향해 겨눠지는 수백의 포구.

거병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가, 들끓는 눈빛으로 손을 휘둘렀다.

- 전 포대 발사!

투과과광! 꽈광!

포화가 성벽을 두들긴다.

박살나 날아가는 석재 조각들. 그 사이에 뒤섞이는 으스러진 비늘과 육편.

의식 상태로 하늘에 떠있던 댈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용들에게 맞춰져 있던 초점이 죽 멀어지며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게 됐다.

- 전쟁신의 영광을 위해―

- 지옥의 하수인들을 말살하라!

순은 성벽 북쪽에서는 에드거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성기사단이 악마와 충돌하고 있었다.

동편은 금강궁의 초월자들과 순은 기사단이, 서편은 시에나와 기사왕국 출신의 기사들이 합심해서 마물들을 막아서는 중이었다.

- 꼬기! 싸움!

- 우와아아아아!

전투가 격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몰려가는 하이 오크와 대족장 타룸.

- 이쪽으로! 덩굴길을 따라 이동하십시오!

- 모두 질서를 갖춰주세요!

덩굴로 임시 대피로를 만들어 청동 경비단과 함께 주민들을 피신시키는 샤니아 필로폰.

‘······.’

의식의 시야는 전장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싸움의 현장에 동시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 비현실성 때문인지 도시가 서서히 무너지는 광경이, 마치 모니터 너머에서 바라보는 허상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두근.

하지만 어째서일까.

한낱 허상처럼 느껴지는 광경에 심장이 조여온다.

전지에 한없이 가까워진 시야가, 드넓은 전장의 비극 하나하나를 고스란히 목도한 탓일까.

두근.

프로그맨의 창에 목이 꿰뚫리는 병사. 전우를 잃은 절규와 함께 프로그맨의 심장을 찌르는 동료.

그마저도 이름 모를 촉수 괴물에게 꿰여 갑옷째로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엘가이아 마탑의 대지 술식이 그 현장을 거리째로 뒤엎어 땅 아래에 묻어버린다.

두근.

시선이 주문을 시전한 마법사에게로 이동한다.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의 칼이 부러지고, 눈먼 칼조각이 오러를 머금은 채 로브의 방어술식과 그 밑의 연약한 육신을 헤집는다.

폐부를 헤집는 격통에 쉴 틈 없이 준비하던 술식이 폭주한다. 일대에 느닷없이 솟구친 종유석들이 폭발하며, 칼 부러진 기사와 마법사 본인을 포함해 수십의 마법사와 기사들을 찢어발겼다.

두근.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인다.

죽음이 다른 죽음을 덮었다.

도처에 만연한 상실은 흔한 울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가족과 친구를 잃은 분노는 갈 곳 없는 괴성을 불러왔을 뿐.

두근.

그럼에도 싸움은 계속됐다. 물러설 곳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강궁, 마탑 연합, 상인 길드의 도제 기사단, 엘프 피난민, 스스로 무장하고 지원한 시민군과 은화 한두 잎에 고용된 일개 용병들까지.

각자의 형편과 이유로 모여든 이들 모두가, 지평선을 아득하게 뒤덮은 지옥의 군세 앞에서 하나같이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동틀녘의 전투는 해 질 녘에도 잦아들지 않았다. 횃불의 일렁임을 뒤덮는 어둠. 그 이후 다시 떠오르는 태양.

비상식적이게 빠른 시간 흐름과 전지한 시야는 게임처럼 느껴졌지만, 키보드와 마우스가 없다는 건 결정적인 차이였다.

현실에 일시정지 버튼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였으니까.

‘······.’

장면과 장면은 시간을 가속한 듯 순식간에 흘러가고, 무저갱의 육체는 느릿하게 공허를 유영하며 가라앉는다.

수세에 몰린 미궁도시의 병력은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후퇴를 거듭했다. 이대로 가면 순은 구역이 몰락하는 건 확정이었다.

순은 구역이 몰락하고 나면 그 다음은 황금 구역이겠지. 그리고 백금, 금강궁, 스물여섯 전당과 그 최심부의 도시 중추 순서일 테였다.

결말이 뻔히 보임에도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그저 지평선을 가득 채운 악의 군세 저 끝자락, 가마 위 베일에 스스로를 가린 채 천천히 도시로 다가가는 악신의 실루엣을 노려보는 게 전부.

정신과 육체의 괴리 사이에서 찾아오는 한없는 무력감 속에서, 댈런은 무저갱의 몸뚱이로부터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툭.

발끝이 어딘가에 닿은 것 같은 감각. 단단하고 평평한 어딘가가 발바닥을 받쳐든다.

바닥인가? 무저갱에 바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축 처진 육신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때 실낱같이 남아있는 육체의 시각으로, 저 멀리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비틀.

본능적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힘을 빼앗겨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고, 수척해진 근육을 작동시켜 팔을 뻗는다.

힘겹고도 지루한 한 걸음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반짝임의 근원 앞에 도착했다.

그건 작은 돌멩이 같은 물건이었다. 힘없이 툭 무릎을 꿇은 댈런의 몸이, 돌멩이 위로 스르르 엎어졌다.

그리고.

[일어날 시간이다.]

시야가 밝아졌다.

***

휘이이이······!

살을 에는 바람. 시야를 뒤덮는 눈보라.

쿠르르릉!

온 하늘에 가득 들어찬 검붉은 먹구름과, 그 너머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오색 빛깔 전격의 바다.

“······.”

너무나도 익숙한 영역의 정경을 배경으로, 사냥감을 해체하는 도구들이 널브러진 오두막의 뒷마당이 보였다.

댈런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리를 들어올렸다.

후득―

가죽신 위에 쌓여있던 눈이 포스스 떨어지고.

뽀드득.

새롭게 찍힌 발자국 아래에서, 소복이 쌓인 눈밭이 기분 좋게 뭉개진다.

뽀득. 뿌득.

댈런은 어깨와 팔을 돌려보고,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몇 걸음을 움직여봤다.

[무저갱에 떨어진 투신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그리고 잃었던 육신을 되찾은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허공에 주르르 수놓아지는 글자들이 눈앞을 가렸다.

[계승 보상 : 근력 +15, 기량 +12, 체력 +13, 감각 +13, 지능 +11, 마력 +14, 흑뢰(고유), 홍염신보(고유), 편리박류(고유, 풍월곽(고유), 토륙함(고유), 망라귀성······.]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목록.

전부 따라가기도 전에 위에서부터 글자들이 지워지고, 새로운 글자들을 다시 한 번 시야를 점령한다.

―――――――

이름 : 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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