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9화
"흐음...... 몸은 좀 어떠신지요."
대놓고 티가 날 정도로 냉정한 얼굴을 한 사제가 내 손목을 잡은 채 물어왔다.
"그냥 그렇지. 얼마나 더 회복해야 멀쩡해질 수 있어?"
"저하께서는 오랜 시간 누워계셨기 때문에 기가 많이 허해지신 경우입니다. 함부로 신성 마법을 남발했다간 오히려 위험합니다만."
"그래?"
기도 안 차서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제대로 된 회복마법을 걸어주지도 않았고 걸어준다 해도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다가 마지못해 해준 놈들이다.
왕비 리네스의 사람이니 최대한 내 회복을 늦추라는 명을 받았을 테지만 회복담당 사제라는 인간이 환자를 눈앞에 두고 저딴 짓을 한다는 것도 상당히 역겨운 일이다.
-의사의 기본은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이야.
신의(神醫) 히포크리아가 내게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해준 첫 조언이었다.
그녀는 참된 의사였기에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내 삶을 들은 그들이었기에 내 삶의 앞에 펼쳐질 가시밭길을 알았고 그 정도에 그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름대로 그녀에게 양심적인 선언을 한 입장에선 의사나 사제나 결국은 다 의원인 만큼 이딴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회복을 못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별개로 내 몸은 나 스스로 착실히 회복하고 있지만.
"듣자 하니 신성 마법은 꽤 위대하다던데."
"아...... 네."
"주신 프리아께서 내려주신 은총의 힘이면 이정도 부상은 금방 치유할 거라 생각했거든."
"저하. 그건 저하께서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대놓고 비웃으며 무시하는 모양새가 이젠 눈앞에 있는 16살 소년이 왕자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잘 모른다?"
"예, 신성력에 대한 지식은 저희 사제들의 고유한 권한이지요."
"흐음."
흥미롭다는 듯 녀석을 보고 있으니 놈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영특하신 칼루스 저하와 다르다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요."
"보르트 신관님! 왕자 저하의 앞입니다! 말을 가려서 하세요!"
문제는 이 개념 없는 놈이 말을 가려 할 만한 머리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감히 시녀 따위가 내게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냐?"
나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에이미를 다그치는 그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짜악!
게다가 놈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지 내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 에이미의 뺨을 강하게 쳐올렸다.
사랑을 베푼다는 사제의 행동치곤 굉장히 거칠기 짝이 없지만 그리 놀랄 건 없었다.
이미 리네스 왕비의 끄나풀로 물욕에 찌든 놈의 사상이야 뻔하다.
'그러니 평생 하급신관에서 못 벗어나는 거지.'
하급신관이라도 리네스 왕비의 뒷배를 얻은 순간 상당한 입지를 지닌다.
그렇기에 그도 이곳에 눌러앉아 물욕을 채우고 있는 것일 터다.
새삼 느끼지만 겁을 상실하다 못해서 말이 뇌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는 게 틀림없다.
"뭐하냐?"
담담하게 묻자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다가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린 시녀를 그냥 두시면 저하의 입지도 곤란해지실 겁니다.
구석에는 뺨을 맞고 울먹거리면서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에이미가 보였다.
분한 얼굴이었다.
녀석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내가 무시를 당한 게 그리 억울한 거겠지.
적어도 그녀는 이 왕궁에서 몇 안 되는 내 편이니까.
"치료는 끝났습니다. 그럼 보름 후에 다시 뵙지요."
"그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거 거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에이미를 지나쳐 문밖으로 나가다 멈춰 섰다.
"......그년, 미색 하나는 곱구나."
순간적으로 그가 지은 음흉한 미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이미."
그 모습에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귀한 사제분들이다. 궁의 바깥까지 안내해 드려."
"예......."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그녀가 사제를 따라나섰다.
분할 거다. 어지간히도 분하겠지.
근데 기분이 더러운 건 너뿐만이 아니거든.
말없이 사제의 뒷모습을 보던 내가 천천히 베개맡에 놓여 있던 낡은 검을 익숙하게 꺼내 들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깽판 치고 가는데 그냥 보내주면 참은 이유가 없다.
그리고는 표정을 지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묘하게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 라고 하기엔 사실 그동안 쌓아온 관록이 너무 컸다.
성녀 다프네는 분노를 못 다스리면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 된다 하였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적당한 분노는 삶의 원천이고 또 목적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귀찮음이 발전의 열쇠라면 분노는 원동력이라고 할까.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듯 고요해졌다.
천천히 궁의 복도를 걸어가니 저 멀리 구석에서 에이미를 구석에 몰아붙이고 뭐라 말하고 있는 사제 보르트가 보였다.
뭔가 말을 하는 듯한데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진 않는다.
"와. 왕자 저......."
"다물어."
퍽!
주변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견습 신관이 소리 없이 나타난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려 했지만 내 행동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검집에 맞은 그가 풀썩 쓰러지기가 무섭게 차가운 얼굴을 풀지 못한 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은밀 보법인 월령보의 능력이 아직 이 몸에 녹아들지 않아 익숙하지 않아도 저놈 같은 하급신관이 알아챌 만큼 녹록한 보법이 아니다.
보르트는 내가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에이미를 향해 비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명심해라. 방에 혼자 찾아와야 할 것이다. 기억해라, 데이비 왕자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는 걸."
"그건!"
"왕족 시해죄라고? 알게 뭐야. 그깟 반편이 왕자를, 나는 그런 반편이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수 있지. 왕비 저하께서는 오히려 잘했다고 하실 게다. 이 왕궁에 데이비 왕자의 편은 없다."
"......."
"물론 그리한들 감히 리네스 왕비 저하의 수족이자 신성한 목자이신 프리아 님의 양인 나를 누가 벌하겠느냐. 아니 그러하느냐. 하하하!"
왕궁에서 왕비 리네스의 파워가 얼마나 센지 정도는 모두가 아는 사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기척을 드러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잘됐네. 나도 마땅한 변명거리가 좀 필요했거든. 에이미."
"흡?! 저하!"
"왕족 모독죄에 해당하는 형벌은?"
갑작스런 나의 출현에 인지도 못 하고 있던 신관 보르트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내가 들고 있던 검의 검집을 집어 던지듯 뽑아냈다.
번쩍!
행동은 빠르게, 그게 내 신조다.
6. 맞불을 놔라.
보아하니 에이미의 미색에 관심을 둔 놈이 그녀에게 집적댄 모양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니 그런 것 정도야 안 봐도 블루레이.
적당히 명분이 필요했는데 이보다 좋은 게 있을 수가 있을까.
"커헉?!"
순식간에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뜨거운 피가 사방에 튀었다.
에이미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부르르 떨었다.
"끅...... 끄윽...... 어, 어째서......."
바닥에 쓰러진 보르트 하급신관이 나를 올려다보며 경악스러운 눈동자를 보였다.
그가 확인한 나는, 당장 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다가올 신체 상황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움직이는 게 가능해도 누군가가 부축해줘야 할 만큼 비실거리는 인간이니까.
그런 내가 소리 없이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이 왕궁 내부에서 리네스 왕비의 수족 중 하나인 그를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즈, 즉결 처형이옵니다."
덜덜 떨면서도 내 말에 또박또박 대꾸해주는 에이미의 대답에 내가 천천히 검을 털어내고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실제로 법은 그러하지만 정말로 그러는 인간은 없었기에 방심했던 것일까. 그의 얼굴은 혼란 그 자체였다.
"들었나?"
"끄륵...... 와. 왕비 저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게요. 하, 하물며 성국에서도......."
"그래, 충고 고맙다. 근데 내가 장담하는데 네 편은 아무도 없어."
출혈로 피를 울컥울컥 토하던 그의 심장에 검을 빠르게 박아넣고는 다시 뽑아냈다.
그러자 그의 몸이 크게 움찔하더니 늘어져 버렸다.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놈을 가볍게 죽여 버린 내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다시 검을 납도하자 경악한 얼굴을 한 에이미가 보였다.
"저...... 저하...... 어찌하여......."
"왜긴 왜야. 방금 네가 말했잖아. 왕족 모독죄, 그리고 시해미수죄는 즉결 처형이라고."
내 말에 그녀가 참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말없이 등을 두드려 주니 결국 설움이 터졌는지 한참을 서럽게 울어댔다.
아무리 순진한 그녀라도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거야 익숙하게 봐왔을 것이다.
이놈의 왕궁은 내가 모르는 뒤편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장소였으니 말이다.
과거의 나는 그런 것도 모를 만큼 어리숙했다.
"이제 진정이 좀 돼?"
한참을 우는 그녀를 달래주며 놀리듯 말하자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머리를 푹 숙여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하......."
"잘 참았어. 이놈의 시신은 근위병에게 연락해서 치우라고 해. 여긴 기사들이 없으니까."
내 말에 그녀가 떨리는 얼굴로 바닥에 늘어진 보르트 신관을 바라보았다.
"하오나 저하......."
그녀는 영특하다. 방금 내가 저지른 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순식간에 파악한 후였다.
이미 죽어버린 보르트 신관은 프리아 신을 모시는 성국의 출신.
그리고 리네스 왕비의 수족이다.
나를 감시하고 회복이 더디게 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파견한 작자라는 소리였다.
겉으론 직접 낳지 않은 아들의 신변을 위해 신관까지 파견한 자애로운 왕비.
속으론 음흉하고 더러운 술수가 가득 담긴 치졸한 여자.
뭐가 되었건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그를 베어버린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왕족 모독죄라 해도 이리 과정 없이 베어버린 건 명백히 큰 문제를 만들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왕궁 내에 첫째 왕자 데이비 올 라운이 미쳤다는 소문이 쫙 퍼질 게다.
그것은 곧 안 그래도 좁은 내 입지를 더욱 안 좋게 만들 테고,
최악의 경우엔 광인이 되었다 하여 궁의 외곽에 유폐될 것이다.
게다가 성국의 항의까지 들어오면 어쩌면 볼모라는 핑계로 성국으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무엇이 되었건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리네스 왕비에겐 축배를 들 일이긴 했다.
물론. 그걸 모르고 일을 칠 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