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12화
바리스는 나와 같이 리네스 왕비를 극히 싫어하는 부류에 속했다.
아무리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지만 권세를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방치를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듯했다.
"제가 아바마마께 찾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는 괜한 일을 벌이지 마라."
"하지만!"
"됐어. 내 일은 내가 처리해. 그보다 두 사람 다 지방에서 화적 떼를 소탕하고 있다고."
"예......."
"그런걸요."
왕자인 바리스는 그렇다 치고 왕녀인 윈리까지 화적들을 소탕하는 데에 가 있다는 사실은 사실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어찌할까.
윈리는 바리스와 닮아 왈가닥 성질이 강해 궁 생활을 싫어하곤 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마법적성이 좋아 애초에 평범한 귀족 영애와는 다른 삶을 영위하는 새싹이기도 했다.
"예쁘고 좋은 것만 봐야 하는 네가 벌써부터 피를 보고 사는 것도 좋진 않지."
"이 멍청이는 제가 없으면 크게 다칠걸요?"
윈리가 옆에 있는 바리스의 뺨을 꼬집으며 투덜거리자 바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인마?"
"내가 틀린 말 했어? 무슨 돌격전차마냥 달려드는데!"
고작 열네 살 꼬맹이들을 벌써 전장에 투입하는 것도 리네스 왕비의 지독한 처사다.
둘의 재능이 없었다면 사달이 나도 났겠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냐."
"솔직히 그곳이 마음 편합니다. 싸움은 싫지만 적어도 숨 막히는 왕실에서 살지 않으니까요."
본인들이 원하는 것도 한몫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여긴 아니샤 후궁께서 계시잖느냐. 아...... 네 녀석들 설마 아니샤 후궁 저하께는 찾아가지 않은 건 아니겠지?"
내 말에 두 녀석의 얼굴에 뜨끔한 감정이 보였다.
"하아...... 너 이 자식들, 빨리 가.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녀석들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히익!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저녁에 다시 찾아올게요!"
잽싸게 튀어가는 두 녀석을 보니 괜히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멀찍이서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시녀 에이미도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 * *
궁의 정세를 보면 현재는 한 명의 왕비와 두 명의 후궁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서 눌러앉은 바리에타 공작가의 장녀였던 리네스 바리에타.
그리고 두 명의 후궁이 존재한다.
1 후궁인 아니샤.
그리고 2 후궁인 엘리스.
바리스와 윈리는 1 후궁인 아니샤의 후생이었다.
문제는 1 후궁인 아니샤가 리네스 왕비의 눈 밖에 난 존재라는 점이었다.
뼛속까지 리네스 왕비의 추종자인 엘리스와는 별개로 아니샤는 과거 내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연히 어머니의 흔적을 극도로 증오하는 리네스 왕비에게 1 후궁인 아니샤는 눈에 난 가시만도 못한 존재였다.
게다가 제 친자식은 끔찍이도 아끼는 그녀였다 보니 무슨 수든 다 써서 아니샤의 후생들을 모두 치워버린 꼴이다.
아니, 리네스 왕비가 손을 쓰기 전에 1 후궁 아니샤가 피난을 보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적어도 바리스와 윈리가 활동하고 있는 지방 변경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영지였으니 말이다.
당장 충성을 다하는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녀석들을 보호하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지만 바리스와 윈리는 이제 혈기가 돌기 시작하는 젊은 층이다 보니 리네스 왕비에게 겁을 먹어 벌벌 떠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 분한 듯했다.
바리스가 다시 내궁을 찾았을 땐 밤이 상당히 깊었을 때였다.
새로이 사용인들이 교체되면서 완전히 흉가나 다름없던 궁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하자 에이미는 그 사실이 못내 감격스러운지 울먹거렸다.
내가 그동안 너무 애를 굴렸나?
그런 생각이 들어 물어보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내가 잘되었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형님, 형님이 이제 깨어나셨으니 이제 왕태자가 되시는 겁니까?"
바리스 녀석의 질문이었다.
"맞아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반드시 성군이 되실 거에요!"
윈리도 지지 않고 외쳤다.
"뭐?"
"그렇지 않습니까, 현재 라운 왕국은 왕태자 자리가 비어있지요."
"그렇긴 하지."
"하면 형님이."
딱!!
더 들어줄 것도 없다는 듯 내가 딱밤을 놓자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내 꿈은 오래 사는 것, 그리고 취미 생활하는 유유자적한 삶이다.
그런데 과로로 대부분 사망하는 비운의 직업인 왕을 하라고?
"크읏?!"
육체 능력은 보통 인간을 초월했을 텐데 내 딱밤에 머리가 알싸하게 울려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일까.
녀석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본다.
"실없는 소리 하긴, 이리 와서 한잔 더 받아."
"형님, 전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헹~ 넌 계속 그렇게 점잔빼고 있으시지,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가 주시는 술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사와요."
애교를 부리듯 윈리 녀석이 기대 어린 눈길로 와인잔을 내밀었다.
"그 미성년자라는 놈이 이 왕궁에서 식량만 축내고 멍청한 짓만 저지르고 있는 네 형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
내 말에 녀석이 공감한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 한잔 받아야지요!"
그리 말하며 녀석이 내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그대로 쭈욱 들이켰다.
"크으...... 맛이 좋네요."
"어머니가 남겨놓으신 거라."
"앗...... 그럼 아껴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먹으라고 놔둔 술을 왜 아껴."
내 말에 바리스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변하셨네요, 형님."
"그래 보이나?"
"맞아요. 오라버니, 예전엔 어떻게든 어머니의 흔적을 놓지 않으려 하셨잖아요."
쥐방울만 한 것들이 기억력만 좋아 가지고.
"그래,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 밤중에 찾아왔는지 말해봐라."
잠시간 침묵하고 있던 찰나, 뭔가 말하고 싶어서 우물쭈물하는 낌새를 눈치챈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바리스를 대신해 윈리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파우치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보였다.
"이건?"
"5년마다 개최되는 대륙 검술대회죠! 이번엔 펠리스티 공국에서 펼쳐진다고 해요."
"오호?"
이 대륙에도 올림픽 같은 개념은 존재한다.
그게 바로 대륙적으로 개최되는 각종 대회였다.
검술, 마법, 궁술. 학문.
여러 분야로 치러지는 대회는 각 나라를 빙빙 돌며 진행되는데 여기서 입상한 자들에겐 엄청난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름난 미래 유망한 강자들이 모두 몰려오는 터라 당연히 볼거리로써도 최고의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검술대회의 관람티켓을 얻기 위해 귀족들이 암상인들과 접촉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겠는가.
"형님,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겁니다. 왕궁 밖으로, 거의 못 나가 보셨지요?"
"그랬지?"
"해서 제가 아바마마께 청원을 드렸습니다!"
자랑스레 외치며 바리스가 가슴을 펴자 윈리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쿠욱 찔러버렸다.
"내가 다 말했거든? 지는 멀뚱멀뚱 서서 웃은 것밖에 없는 근육 덩어리가."
"뭐 인마?"
또다시 투덕거리는 녀석들의 모습에 말없이 공고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구경거리로썬 최고의 대회 중 하나다.
대륙 개최 검술대회는 미래가 유망한 수많은 실력가가 대륙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참가하니 말이다.
대륙의 화합을 도모하는 대회인 만큼 용병부터 왕족까지,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 참가가 가능했다.
"엣햄! 형님, 무려 이 아우가 예선전 참가 티켓을 받았지 뭡니까!"
바리스가 가슴을 퉁퉁 치며 자랑스레 말했다.
"오오. 그래? 제법 실력이 많이 늘었나 본데?"
짐짓 놀란 척 말했지만, 녀석의 몸 안에 정제되어있는 마나는 확실히 보였다.
익스퍼트 중급.
제 나잇대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경지에 오른 녀석이었다.
재능이 보통 수준은 아니라는 거겠지.
"저는 참가합니다. 형님, 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같이 바깥구경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겸사겸사 오라버니는 윈리와 펠리스티 공국의 수도 구경도 하구요! 헤헷! 물의 도시라니 굉장히 아름다울 거예요!"
병상에서 일어난 나를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마주 대고 굴린 티가 역력히 드러나 괜스레 고마움을 느꼈다.
"혹여 고될까 걱정이시라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업어서라도 모시겠습니다!"
"궁정의 람다스 경에게 들었어요. 오라버니의 몸이 굉장한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구요."
"실없는 놈들."
그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 여유가 넘치는 삶이 되었으니 과거처럼 어디에 얽매일 이유는 사라졌다.
바리스의 말마따나 한 번쯤 그런 대회를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가 잠깐, 참가할 수도 있고, 안 그런가?
* * *
"좋은 기회가 아니더냐."
어두운 방 안으로 한 여성이 섬뜩한 눈동자를 빛냈다.
"설마 제 발로 용의 아귀에 기어들어가려 들 줄이야."
싸늘하게 말하며 차갑게 식은 찻잔을 내려보던 여성, 리네스 왕비는 곧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녀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샤리."
"예."
"죽고 싶다는 놈을 살려줘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펠리스티 공국으로 향하는 도중 습격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입니다. 그 안에 원하시는 그들의 피를 흩뿌리겠습니다."
"실패한다면 엄청난 타격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들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 해도 같은 왕실의 일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에도 리네스 바리에타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래, 해도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일, 네가 직접 마무리를 지어."
"......계약대로."
그런 그녀의 말에 시녀 샤리는 차갑게 가라앉은 살기를 갈무리하며 차갑게 답했다.
* * *
대륙 검술대회.
대부분의 국가에서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들이 참가하는 대회의 이름이 가지는 입지는 실로 대단했다.
당연히 왕실에서는 바리스의 대륙 검술대회 참가에 반대하는 의견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 의외였던 점은 절대 남의 자식 잘되는 꼴은 못 보는 리네스 왕비가 대회의 참가, 그리고 나의 동행을 흔쾌히 찬성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대회에서 바리스가 입상이라도 하게 된다면 녀석이 가지는 입지는 뒷배만 믿는 칼루스와는 완전히 다르게 급상승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는 리네스 왕비로서는 당연히 참가를 반대해야 할 테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흔쾌히 허락해버렸다.
게다가 내가 요양을 핑계로 대열에 합류하는 것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찬성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마치, 절대 입상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는 것처럼,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펠리스티 공국과 가장 가까운 영지로 통하는 마나 게이트의 제단 위에 올라선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를 향해 일련의 무리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라."
엄격한 목소리, 하지만 한편으론 지친 목소리였다.
말없이 시선을 들어 올린 끝에는 한 중년의 남성이 나와 바리스, 그리고 윈리를 포함한 이번 펠리스티 공국으로 가는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운 왕국의 국왕, 크리아네스 올 라운.
이 나라의 국왕이자, 내 아버지였다.
그리고 내가 깨어나고 근 반년 만에 처음 뵙는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동안 잘도 피해 다니셨습니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호쾌하고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그의 모습에서 찾기 힘들었다.
6년이라는 시간, 아니 그보다 조금 오랜 시간 동안 내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모해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늙은 사자가 되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