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13화
피로한 신음을 흘리며 우리를 둘러보는 크리아네스 국왕의 뒤로는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속내를 숨긴 채 겉으론 환하게 웃고 있는 리네스 왕비와 1 후궁 아니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귀족파의 필두인 바리에타 공작과 소드마스터이자 내궁의 기사단장인 페일트리스 후작, 그 외에 여러 귀족이 보였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왕국의 태양을......."
내가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말하자 바리스와 윈리가 나를 따라 예를 표했다.
"그래, 자신은 있느냐."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무심한 듯 보였다.
마치, 관심이 없다는 듯.
"예, 폐하! 반드시 입상하여 왕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오겠사옵니다."
그의 그런 질문에 바리스는 늘 그래 왔듯 힘차게 대답했다.
대답 자체가 제법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국왕 크리아네스는 곧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하게 돌아오거라."
바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그는 곧 바리스의 옅은 미소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어준 뒤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건 내 얼굴이었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 그의 얼굴에 어렸다.
솔직히 어지간해선 상대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나도 쉽게 속내를 느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관록이라고 할까.
늙고 지친 사자라도 그동안의 관록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미안하구나."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이제 와서 그와 감성팔이 할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고개만 숙여 보일 뿐이었다.
"들으라! 4 왕자 바리스의 대륙 검술대회 참전은 왕국의 경사로다! 이에 짐은 이날을 기준으로 구휼미를 풀어 왕국에 축제를 선언하노라!"
"예! 폐하."
크리아네스의 외침에 귀족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울러 크지 않은 죄를 지은 이들에게 특별 사면령을 내려라!"
국가에 정말 큰 경사가 있을 때나 하는 처사에 묘하게 불만인 표정들이 몇몇 보였지만 그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는 없었다.
특별 사면령이라니, 사실 참 이해 안 되는 법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거라, 가서 라운 왕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오라!"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바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를 오픈하겠습니다!"
지지지직!!!!
동시에 마나 게이트를 조작하던 마법사가 크게 외치자 내 뒤로 만들어져 있던 거대한 푸른빛의 원형 구조물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기괴한 힘의 파장이 서서히 소용돌이를 만들며 거대한 틈을 만들어내며 펠리스티 공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올라선 단상을 완전히 뒤덮을 듯 빛나기 시작했다.
스스슷.......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의 시동어가 흘러나오며 거대한 파장이 행렬을 모두 집어삼키듯 사라지게 했다.
빛 속으로 사라지며 그 너머로 스치듯 본 국왕 크리아네스의 무표정.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리네스 왕비의 모습에 나는 묵묵히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채 눈을 감았다.
* * *
펠리스티 공국으로 향하는 행렬은 단출했다.
참가를 위해 앞장서는 4 왕자 바리스, 그리고 녀석을 응원하기 위해 동행하는 윈리와 내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잡무를 부담할 시종과 시녀 대여섯과 호위를 위한 기사 5명이 전부였다.
물론, 4명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하나하나가 전략 병기 급의 실력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장의 안전은 확실하게 확보된 모양새가 틀림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투기는 은연중에 적의를 꺾어버리게 만드는 능력이 있을 테니까.
그 덕분인지 딱히 산행을 해도 산적은커녕 동물 새끼조차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따분한 여정이었다.
"으아...... 따분해."
실제로 거칠게 살아온 바리스는 그런 따분함을 견디지 못한 듯 보였다.
"멍청아! 따분한 게 좋은 거야!"
"너는 이 미칠듯한 지루함이 좋냐?"
"싫거든?! 그래도 오라버니가 계신데 누가 습격하길 원하는 거야 멍청아?!"
윈리의 타박에 바리스가 뜨끔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본래라면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내가 병상에서 일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리스는 한사코 나를 마차에 태웠다.
덕분에 더 지루한 여정이 되긴 했지만 녀석의 마음 씀씀이에 딱히 나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해야 할 듯합니다."
앞장서서 길을 터 나가던 기사, 블카노 경이 보고를 올렸다.
펠리스티 공국에 도착하려면 못해도 하루 정도는 더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본래라면 마나 게이트를 이용해야겠지만 애석하게도 펠리스티 공국은 소국 중에서도 소국.
그 탓에 마나 게이트가 없어서 이동하기 위해선 가까운 영지로 마나 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뒤에 직접 육로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펠리스티 공국의 영토가 라운 왕국과 굉장히 가까운 점일까.
익숙하게 야영준비를 하는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호위를 위해 흩어진 기사들을 둔 채 바리스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휙 던져 넣으며 물어왔다.
"형님, 어떠십니까?"
"맞아요. 오라버니,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드세요? 예전엔 이렇게 모험 떠나듯 야영도 해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괜히 거창한 행렬은 부담스러우실까 봐, 행렬을 최소화한걸요?"
배시시 웃으며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말하는 두 녀석의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고맙다. 이놈들아."
피가 이어지지도 않아 귀찮을 수도 있을 텐데 나를 극진히 챙기는 그 모습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바리스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자리에 앉아 어릴 적 같이 뛰놀던 때를 떠올리며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윈리 또한 그런 바리스의 행동에 딴죽을 걸면서도 싫지만은 않은지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형님?"
하지만 녀석들이 대화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숲 저편의 한 곳에서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라버니?"
내 그런 시선에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윈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 음?"
"이것 좀 드셔 보셔요."
"그래 고마워."
"그런데 뭘 그리 유심히 보고 계시는가요?"
"맞습니다, 형님. 저기 뭐라도 있습니까?"
그 질문에 구태여 답하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숲의 저편을 보고 있자니 녀석들은 괜스레 내가 걱정이 되는 듯 서로 눈치만을 살폈다.
"별거 아니야. 시간도 늦었으니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마. 너희들도 같이 마차에서 쉴 테냐?"
내 제안에 두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천막이 편합니다, 형님."
"저두요."
누가 이 녀석들을 고상한 왕족이라고 볼까.
바리스야 그렇다 치고 윈리까지 저렇게 왈가닥이면 누가 데려갈지 벌써 걱정이 어리는 기분도 들었다.
"헹. 너처럼 그렇게 왈가닥이면 야영이 잘 어울리기도 하네,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헹! 난 오라버니랑 같이 살 거거든? 남일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하시지!"
혀를 빼꼼 내밀며 내 팔에 안겨오는 윈리였다.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더 좋다고 헤실헤실하자 바리스가 혀를 쯧쯧 찼다.
"됐고 그만 떨어져 이년아."
"쳇."
묘하게 아쉬워하는 얼굴로 내게서 떨어진 두 녀석이 시종들이 펼쳐준 간이 천막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고요함이 캠프를 덮었다.
주로 대화를 주도하던 두 녀석이 쉬러 들어가 버린 탓에 대화가 끊긴 것이다.
"저하, 들어가서 쉬시겠어요?"
말없이 앉아 하늘을 구경하고 있자니 시녀 에이미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네."
"네?"
그녀의 그런 물음에 나는 뜬금없는 소리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모두가 잠든 시각.
모두가 잠들어있는 캠프에서 멀지 않은 나무의 가지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던 내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내가 사라진 것을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환영마법은 괜히 국 끓여 먹으라고 둔 마법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보고 있는 서적은 내가 없는 사이 있었던 대륙의 정세. 그리고 의술에 관한 서적이었다.
수련을 게을리해서도 안 되지만 의술의 경우에도 그런 편이기도 했다.
병은 계속해서 새로이 나타나지만 의술의 실력 증진은 그리 빠를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그래도 신의(神醫) 히포크리아의 수제자였던 만큼 어디를 가서도 경악할만한 의술을 보일 자신은 있다.
"밤하늘은 보기 좋네."
듣는이 하나 없는 혼잣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캄캄한 하늘은 붉은색과 푸른색의 달 두 개가 그 위세를 자랑하며 환하게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태초를 빛내는 달 사이러스.
최후를 비추는 달 크리아스.
태초에 밤을 빛낸 사이러스와 최후의 밤을 장식한다는 크리아스 두 달의 전승은 꽤 많은 편이지만 사실상 그저 오래 와전된 이야기뿐이라 그리 흥미는 돋지 않았다.
그저 예쁜 달이다 싶은 느낌만 줄 뿐.
두 개의 달을 시작으로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펼쳐져 있는 수많은 별과 은하수는 지금이 밤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구와 회랑에선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밤엔 하늘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은 것은 지구나 회랑이나 똑같았으니까,
두 꼬맹이 녀석들이 아마 이런 밤하늘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서 나를 데리고 나온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다.
왕궁에서 보는 하늘과 이곳에서 보는 하늘은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었고 그만의 매력이 충분히 있었다.
스스슥.
들리는 것이라곤 벌레 울음소리와 올빼미 소리밖에 없건만.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근처의 나뭇가지 하나를 가볍게 꺾어 허공에 휘둘렀다.
휙! 휙!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얇은 나뭇가지가 허공을 갈랐다.
음, 만족스럽다.
"자...... 그럼 밤 구경도 다 했고, 야밤 운동이나 해볼까."
내 시선은 단 한 곳을 향해 꽂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시야의 끝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괴한들이 이동하는 게 확실히 보였다.
사령술사들은 기본적으로 밤눈이 밝거든.
수는 대략 20명.
하나같이 갈무리된 살기를 숨긴 전문적인 살수였다.
어지간한 악조건 속에서도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법한 훌륭한 실력의 암살자.
내가 만약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이었다면 아마 이어지는 결과는 참혹한 살상이 될 것이다.
보나 마나 전말은 뻔했다.
셋 다 처리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지금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던가.
리네스 왕비는 괜히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요소를 내버려두기보다 살수를 보내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는 쪽을 택한 듯했다.
솔직히 벌써부터 괜히 능력을 드러내서 의심을 받는 상황은 별로 달갑지 않지만.
금방 미련 없이 상념을 털어버렸다.
애초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느려서 어디 암살로 밥 벌어 먹고살겠나."
애초에 내가 날뛰는 걸 보는 인간은.......
"흣?!"
"컥?!"
[태산 압정]
없을 테니까.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거대한 태산이 되어 은밀하게 이동하던 한 살수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검붉은 피가 어두운 밤하늘 위로 뜨겁게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