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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26화 (26/1,559)

# 2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1화

13. 공생과 도주.

완전히 사라진 빛의 영역은 순백의 깃털을 휘날리며 잔상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전신을 때리듯 내려앉았다.

리바운드 자비 없네.

"후우......."

천천히 감기는 눈을 돌려보니 블러드 폴리스, 즉 뱀파이어의 신물이 만들어낸 붉은 안개는 모조리 사라진 듯 보였다.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9 위계 성마법인데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지.

무려 신의 의지를 땅에 불러오는 초월 마법이니 말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드는 사람들을 확인한 후 나는 몸을 돌려 거꾸로 박혀 있는 칼디라스를 바라보다 문득 돌아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털어버리고 검을 기대고는 주저앉아버렸다.

갑작스레 대부분의 신성력을 빼앗겨버린 칼디라스 녀석은 침묵했다.

자아를 가진 검이니 갑작스런 상실감에 굉장히 크게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건 큰 차이가 있으니까.

괜히 미안해지니 다음에 볼일이 생긴다면 신경이라도 좀 써줘도 괜찮을 듯싶다.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떠오르는 기괴한 정체 모를 상태창(?) 같은 것도 신경 쓰인다만 지금은 다 내려놓고 잠들고 싶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기운들을 확인하던 중, 천천히 다가오는 금발의 소녀를 보며 나는 정줄을 놓듯 그대로 편안하게 잠들어버렸다.

* * *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근심 없이 푹 잠든 건 얼마 만이던가.

수련할 때에 비하면 훨씬 짧은 시간들이지만 근 반 년간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던 내겐 굉장히 편한 숙면이라고 표현해도 좋았을 것이다.

"......버니께선......."

"죄송......."

잠결에 누군가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깔끔한 숙소의 천장.

펠리스티 공국에 도착하자마자 도착했던 소형 저택이었다.

"아......."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앗! 오라버니!"

동시에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윈리가 나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오라버니! 정신이 드셨어요?"

"윈리."

"몸은 괜찮으신 거죠?!,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 거 맞죠?"

당장에라도 걱정으로 울어버릴 것처럼 말하는 녀석의 표정에는 걱정이 잔뜩 담겨있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표정이 저런가.

멍하니 물어보니 결국 울음을 터뜨린 윈리가 내게 안겨왔다.

"이틀 동안 깨어나지 않으셨다구요. 저는...... 저는 오라버니가 또다시 못 일어나실까 봐...... 흐윽."

아.

전적이 있으니 걱정을 시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멍하니 내게 안겨 우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자 옅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말없이 다독여주자 녀석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꿈을...... 꿨어요."

"꿈?"

"네, 붉은 안개가 덮쳐왔을 때...... 오라버니가 절 지켜주는 꿈이요."

그녀는 그때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괜히 험악한 걸 보여주지 않았으니 다행이면 다행이리라.

"바리스는?"

"그게......."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 눈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그때 그 붉은 안개, 정말로 오라버니가 없애신 거예요?"

"음......."

"사실 오라버니의 몸을 확인하다가 봤어요. 표식이요...... 그거...... 성흔 맞죠? 신의 표식."

말끝을 흐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숨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짝에 커다랗게 난 성흔의 존재가 문제였다.

크기만 따지면 세 뼘 정도 되는 크기.

보통 성흔의 크기가 손목만 한 크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비대한 사이즈라 할 수 있었다.

신의 힘으로 새겨진 표식.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낼 수 없는 특이한 상처다.

그것은 곧 신의 흔적이며, 신의 사랑을 받는 고귀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했다.

"흐음......."

"왜...... 그러셔요?"

"티가 많이 나는가?"

"등에 생긴 상처라 언뜻 보면 모르는데 직접 보면 아! 성흔이구나! 싶을 정도로요."

신성력 이외의 것은 들키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을 찾은 신관분께 들었어요. 그 붉은 안개는 모두 정화된 것 같다고요. 정체를 밝히진 못했지만...... 해서 그 실마리에 오라버니가 계신 건 아닌가 하고."

"그런가?"

"네, 다만, 오라버니께서 기억을 못 하신다면 아닌 거겠지요."

유일하게 모든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리나 황녀가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당장에라도 찾아와 닦달할 줄 알았건만, 그런 성격만은 아니었나 보다.

"사실 오라버니의 몸을 치료하던 상급 신관분이 발견하신 거예요. 그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던 그곳에 기절해있던 오라버니가 성흔을 내려받은 것 같으니......."

소문이 퍼질 수밖에.

확실히 그럴 만했다.

일반적으로 독실한 신관들과 다르게 성흔은 신이 먼저 사랑을 보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오라버니, 혹시 몸이 아프시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딱히 나쁜 점은 없는 거 같아."

"휴우......."

나쁜 점?

'오히려 너무 좋아진 상황이지.'

성녀의 증거, 혹은 성자의 증거. 그것이 바로 성흔이니 말이다.

9 위계 성마법 신의 영역을 발현한 것은 붉은 안개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내 계산이 숨어있기도 했다.

편하게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이런 깔끔한 계산은 필수요소이기도 했다.

대량의 마나를 한꺼번에 사용해 밑천을 드러냄으로써 그 성장률에 박차를 가한다.

가벼운 시도였지만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마나통이 확 늘었다.'

신성력에 반응한 마나와 사령 마나까지 다량으로 상승해있다.

이전에 내가 보유하고 있던 양과 비교하면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말이다.

이정도면 임의로 오러 블레이드를 발현할 수 있을 정도.

환골탈태를 겪진 못했지만 마스터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낼 수 있는 수준까지 와버렸다.

예전엔 깨달음과 경험으로 비등하게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이제는 오러 블레이드까지 뽑아낼 정도로 회복되었다?

절로 피식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장 폭이 크게 변한 것은 다름 아닌 게을러터진 성질을 지닌 신성력이었다.

괜히 성흔이 아니라는 것일까.

회랑의 영혼상태일 땐 얻을 수 없었던 성흔이 이만한 사이즈로 새겨져 버린 탓에 내게 깃들기 시작한 신성력의 양이 대량으로 늘어나 버린 기분이다.

결국 가장 성장이 더디던 신성력이 단연 세 기운 중 최고로 우뚝 솟아버렸다.

'계기가 있어야 성장하는 힘이라니, 망할 신성력 같으니.'

속으로 혀를 차며 침대에 기대어있던 내가 윈리의 머리를 푹푹 쓰다듬었다.

"들어가서 좀 쉬어. 나는 잠시 생각 좀 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 간호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좀 쉬어야지."

"오라버니가 정신을 잃으시고 얼마나 난리였는지도 몰라요."

묘하게 화가 난 듯 녀석이 볼을 부풀렸다.

"게다가 일리나 황녀가 갑자기 오라버니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가겠다고 고집부려대서......."

"일리나 황녀가?"

"네, 제대로 된 의료진이 있다면서...... 여기서는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좀 전에도 찾아온 걸 겨우 쫓아낸걸요? 흥!"

그 여자가 그런 행동을 보인 이유는 뻔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도 봤고 기억하겠지. 그때 그 일을.

물론, 아 그러십니까 하면서 그대로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조금 신기한 건 윈리가 그녀를 상대로는 상당히 털을 세운다는 점이었다.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걸 구태여 물어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제 깨어났으니 괜찮아."

"경기는 그날부로 중단되었어요. 이만한 일 때문에 지금 공국 전체가 굉장히 어수선해요."

보통 일도 아니고 마물로 추정되는 괴물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겠지."

"그럼 저는 그만 물러가 볼게요. 그럼, 푹 쉬셔요 오라버니."

윈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꼬옥 끌어안은 뒤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말없이 남은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윈리를 향해 조용히 손을 뻗었다.

'음...... 이렇게 인가? 정보확인.'

삐릭!

동시에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듯 다시금 반투명한 검은색의 박스가 드러났다.

-성명 : 윈리 올 라운.

-나이 : 14

-성별 : 여

-종족 : 인간

-칭호 : 무(無)

-상태 이상 : 피로.

-특이사항 : 3 서클 마법사.

-현재 심리 :

시전자에 대한 걱정.

놀람.

심약 상태.

"오오......."

많은 것은 보여주진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창 비스무리한 정체불명의 창이 보여주는 것에는 일반적으론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정보들이 담겨있었다.

"완전히 게임이랑 비슷한데?"

다만, 사람이 사람을 대하면서 가장 필요한 상대를 통찰하는 능력은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메리트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 게 생겨난 거지?'

주신에게 기도를 올렸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영체였을 때 사용하던 방법을 다시 제대로 된 생자의 모습으로 사용한 게 문제였을까.

무엇이 되었건 복잡하기 짝이 없다.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나쁜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아끼지 않는다.

적어도 오해는 생기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캄캄해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밤인데도 불구하고 밝은 펠리스티 공국의 야경이 창밖으로 슬그머니 보였다.

존재를 숨겨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것들투성이인 법이다.

괜히 스케일 크게 일 쳤다가 주변 사람들이 고생한다.

'숨길 필요가 있을까.'

지금의 상황을 짚어보면 자신의 성흔은 이미 들킨 듯 보였다.

다만 자세한 내막은 단 하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성스러운 기운을 머금어버린 원형 경기장.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내게 새겨진 성흔.

나를 치료했다던 상급 신관이 조잘거린 덕분에 성흔에 관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 것뿐이지 결과적으로 내가 날뛰는 걸 본 인간은 없다는 소리였다.

정황만 미뤄보면 내가 저질렀다고 오해야 하겠지만.

오해는 아닌가?

그리 복잡한 생각을 하며 침묵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면이라고는 하나, 상대의 심리와 상태를 꿰뚫어보는 능력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그때였다.

고요하던 방안으로 기묘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말투는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의 목소리 같은데 들리는 목소리는 내 나잇대의 소녀 목소리다.

육성으로 흘러나온 것이 아닌 의지로 머릿속에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누구냐."

기척 하나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내 감지를 속이고 접근했다?

어지간해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일 테니까.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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