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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27화 (27/1,559)

# 2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2화

-아래다, 아래.

그때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제대로 된 방향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에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손바닥만 한 작은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내 다리 위에 주저앉아있었다.

"처음 보는구나, 의도하지 않게 봉인이 풀려 당황하긴 했다만, 이도 신의 뜻이라면 뜻이겠지."

머리에 돋아난 순백색을 띠는 한 쌍의 뿔.

나와 뱀파이어 시녀 샤리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묘한 광채를 띤 붉은 문양이 새겨진 눈동자.

압도적인 미모.

그녀를 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한 때의 기억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어디, 눈앞에 이상한 창이 보여서 당황한 듯 보이네만. 본녀의 말이 틀렸는가?

* * *

[음? 웬일로 일어나 계시네? 누굴 그리는 겁니까? 그림에 소질 있는 줄은 몰랐는데.]

-흠, 네가 보기엔 뭐로 보이냐.

[머리에 달린 인체공학적 손잡이 하며, 시뻘건 중2병 눈동자를 보니 혈안인 것 같은데, 마족 아닙니까? 미색만 보면 거의 마왕급 고위 마족 같은데.]

-머리의 뿔을 손잡이라고 말하는 건 너뿐일 거다. 그래, 네 말대로 이 녀석은 마족이다.

[마족을 무슨 바람이 불어서 기억하고 초상화까지 그립니까? 게다가 세밀하게 묘사한 걸 보면 굉장히 기억에 오래 남은 소녀 같은데.]

-예쁘냐? 당연히 저기서 파티 벌이고 있는 저 미친 여자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미색이긴 하지. 쯧, 수백 번은 그렸던 그림이라 기억에 남는 것뿐이다. 이름은 페르세르크.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가리키며 그 게을러터졌던 검신 하레스가 쓰게 웃었다.

-아직 인간의 모습일 적, 내가 입양해서 검을 가르쳤던 딸아이이고.

[잠깐, 페르세르크라고요?]

-그래, 네가 아는 대로 대전쟁을 끝내기 위해 내가 칼디라스로 베어 검에 봉인시킨 심연의 마왕이다.

* * *

"......."

정말 놀랍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암기력 떨어지는 검신이, 그것도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회랑에서 보내던 그가 가지고 있던 두 가지 미련 중의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다.

"마왕...... 페르세르크."

-호오...... 본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역시 본녀의 눈이 틀리지 않았...... 윽?!

여유롭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그대로 사령 마나를 방출해 포박하듯 묶어버렸다.

주체를 찾았다면 더 이상 혼란스러워 할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진 사령 마나가 밧줄처럼 퍼져 그녀의 전신을 구속한 뒤 허공에 들어 올렸다.

-크읏...... 꽤...... 손이 거친 사내로구나, 그대는 몰라도 본녀는 구속당하는 취향은 없다만?

"장난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대와 본녀는 처음 대면하는 것이지 않은가. 딱히 사이가 나쁠 이유도 없음이지.

그녀의 말에 나는 기운을 풀지 않고 쓰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공생 관계가 된 만큼 말하지 말라 해도 할 생각이었네.

그녀의 말에 내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공생 관계?"

-그대의 등에 새겨진 성흔. 그것이 지금 본녀의 혼을 담는 그릇이 되어버린 게지. 그러니 그 크기부터가 정상은 아님이야.

"성흔이 마왕을 봉인하는 그릇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솔직히 지금 상황 이해가 전혀 안 돼서."

내 말에 그녀는 사령 마나에 포박되어 조금 곤란한 듯 옅은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하면...... 이것 좀 풀어주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본녀는 그리 구속당하는 취미가 없다네, 게다가 이런 망측한 자세라면.......

말끝을 흐린 그녀가 시선을 피하더니 약간 붉어진 얼굴을 했다.

"흠......."

-조금...... 수치스럽네만.

제 치부를 드러내 보인 것처럼 부끄러워하는 모양새에 차갑게 식어버렸던 피가 본래대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손을 휘젓자 그녀를 구속하던 마나가 느슨하게 변한다.

딱히 의미를 두고 묶어버린 것은 아닌데 그녀가 저항하려다가 기괴하게 묶여버린 모양새였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휴우...... 살 것 같군.

마왕급의 존재를 함부로 해방하는 것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녀를 포박하던 마나를 해제했다.

그녀는 이미 사자(死者).

죽은 이인만큼 내게 이 이상의 위해는 가하지 못하리라.

"그래. 내가 납득하게끔 깔끔하고 간략하게 설명해볼래?"

-흐음...... 성격이 꼬인 사내로고.

"내 성질머리가 좀 괴랄하긴 하다고 하더라."

-흐흠.......

그녀가 허허롭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문양이 새겨진 붉은 혈안에 내 모습이 옅게 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신검에 봉인되어있어야 할 마왕님께서 무슨 볼일로?"

-본녀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괜한 설득도 의미 없음이지.

쓰게 웃어 보인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 자락의 양 끝을 잡아 올렸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본녀는 페르세르크 폰 팔란. 심연에서 그대들을 마주 들여다보는 마왕일세.

고대 중간계와 마족 사이에 있었던 대전쟁의 원흉이 눈앞에 있다.

누군가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그 심연 또한 그들을 바라본다.

그 말의 어원이나 다름없는 게 바로 그녀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녀는 일반적인 마왕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뭐가 그리 유쾌한지 쿡쿡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은 간단하지. 그대는 이미 본녀가 신검에 봉인되어있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신검 칼디라스는 검신 하레스가 대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왕을 베어버린 검이다.

겉으로 알려진 건 여기까지, 실상 내막 중엔 마왕의 혼이 그 검에 봉인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

본인에게 들은 것이니 거짓은 아닐 테지.

"그렇지. 의지가 깨어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친우의 의지를 구속할 만큼 칼디라스의 성격이 나쁘진 않음이야.

그녀의 말에 내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친우?"

-뭐, 이런 시시콜콜한 개인 사정이 무에 의미 있겠는가. 정확히 말하겠네, 본녀는 신의 의지에 따라 칼디라스에게서 그대에게로 옮겨진 것뿐일세.

"......."

그녀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강림한 적도 없는 신 따위 알게 뭘까.

다만 신의 의지라는 건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이 있기에 가능한 마법이 신의 성역이었으니 말이다.

그 시발점은 역시 내가 블러드 폴리스를 완전히 무로 돌려버리기 위해 사용했던 신성 마법 때문이리라.

문제는 왜 칼디라스에 봉인되어있던 그녀가 내게로 왔냐는 것이다.

"왜 온 건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녀의 표정에 헛웃음이 어렸다.

-그걸 알면 본녀도 이리 답답하진 않겠지. 그대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공생 관계가 되어버렸으니 그대가 본녀를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마치 작은 아이를 어르듯 그녀가 말해왔다.

-개인적으로 그대에게 꽤 관심이 있기도 하다네. 검신의 흔적을 품은 두 번째 사람이니.

"하레스의 검술?"

-그를 마치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군.

"알다마다, 툭하면 그쪽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렇군...... 본녀의 이야기를.......

내 눈앞에 나타난 상태창. 그것이 그녀의 능력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면 그녀에겐 거짓말이 소용없다.

내가 아니라 그 누가 되어도 그녀는 진실을 꿰뚫어보고 본질을 찾아낼 테니까.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지 않아서 좋군.

"숨길 대상도 봐가면서 숨겨야지. 당신처럼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을 지닌 마왕이면 거짓말이 무슨 소용이야. 애초에 그거 일개 마왕이 가질 힘도 아니잖나?"

내 물음에 그녀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영웅의 회랑이라...... 그런 곳이 존재할 거라곤 몰랐다네, 새삼 신기하군. 다만, 한 가지 정정하지.

"어떤 걸?"

-본녀가 그대를 꿰뚫어보는 게 아닐세. 본녀는 그저 고위의 의지를 빌려오는 권능을 가졌을 뿐. 그대를 표현하는 그 상태창. 거기에 나오는 조금 상스런 표현방법은 본녀의 취향이 아님이야.

"고위의 의지?"

-인간은 주신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 엄청난 위치에 있는 고위의 의지, 즉 주신이 반쯤 미친놈에 심각한 오빠 바라기 같은 표현을 쓴다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나 같은 놈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신성력을 내려주는 신이니 더 기대해 본들 무엇하겠냐 만은.......

회한에 젖은 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검신 하레스에게서 들은 그녀가 가진 힘은 간파.

심연을 본 자를 마주 들여다보는 심연이 바로 그녀의 존재가치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 불린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사용한 성마법 때문에 칼디라스에게서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대가 9 위계 성마법을 사용할 때 대량의 신성력이 방출되면서 본녀도 같이 딸려 나온 셈이지. 오갈 곳을 잃은 본녀의 혼은 그렇게 그대의 성흔에 안착해버린 꼴이고.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만.......

짧게 혀를 차며 그녀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영원한 봉인은 없는 법이지, 이리될 줄 알았다면 칼디라스의 자아와 작별이라도 할 것을.......

"칼디라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본능적으로는 느끼고는 있겠지, 하나 그대도 알지 않는가. 그대가 사용한 9 위계 성마법의 여파로 녀석이 지금 잠들어버렸다는 것.

"아."

-사흘 정도는 정신 못 차리고 잠들겠지. 그 수다쟁이의 말은 듣고 있으면 귀가 따갑지만 심심하진 않았다네. 아마 깨어나면 땍땍거리며 그대를 욕할 게야. 꺄르륵.

말투와 다르게 아이처럼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대 전쟁의 명분이 되어버렸던 마왕, 혹은 대륙전쟁의 근원.

세간에 알려진 것과 그녀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딱히 심리학을 알기 때문에라는 속 편한 설정이 아닌, 들은 바가 있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을 위한 희생양. 그리고, 자신은 흐름이라는 더러운 격류 아래에 놀아난 못난 아비.

검신 하레스는 그녀와 그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며 자책하곤 했다.

-칼디라스와 함께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기묘한 느낌은 들었네, 설마하니 그대가 본녀의 아비가 남긴 검술의 완전한 원형을 일부나마 사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일이로고.

정확히 말하자면 내 검술은 검신과 천마의 합작품에 가까웠다.

처음엔 검신의 고유검술을 배웠지만 이후에 바뀌었다고 할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대에게 맞도록 변형된 검술로 보이네만.

"그렇지. 검에 미친 두 영감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씁쓸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천천히 날아올랐다.

등 뒤로 돋아난 작고 앙증맞은 날개를 펄럭이면서 다가온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기왕지사 이리된 것. 이사도 나름 신박하지 않은가, 공생도 나쁘진 않겠지. 잘 부탁하겠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나쁜 마음을 품어도 지금에 와서는 무언가를 할 길이 없다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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