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3화
내게 나타난 상대를 파악하는 힘.
그건 그녀의 힘이 분명했다. 비록 지금 내게 깃들면서 어느 정도 변질하여 상태창을 채우는 글귀는 그녀가 아니라 주신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꼴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게 기생, 그리고 나는 그녀의 힘을 빌리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쁘지 않은데?'
그녀가 빌려주는 힘은 꽤 매력적이니까.
고민을 오래 할 것도 없이 그대로 검지를 뻗어주자 그녀가 귀엽게 웃어 보이며 작은 양손으로 내 검지의 손끝을 잡아 흔들었다.
-적어도 그대는 현재 실력이 모자라 칼디라스를 실체화시키지도 못하는 현 계약자보다는 많은 세계를 보여주겠지, 기대해도 되겠는가?
그녀의 말에 의문 어린 표정이 절로 들었다.
"세계를 보여준다고?"
-이정도 오래 살면 가는 관심사라곤 세상 구경뿐이네만?
"그럼 내가 받을 건?"
-당연히 본녀의 능력이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뿐일세. 다만 주신의 의지가 깃든 만큼 새로운 능력이 생겨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
"새로운 능력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그대의 눈에 보이는 게 상태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의 전생의 삶에서 보았던 게임처럼 어쩌면...... 스킬이라는 개념이 따라붙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건 흥미롭네. 또 다른 건?"
-애석하게도 그뿐인 게지, 지금 몸으론 서큐버스처럼 그대를 만족시켜줄 수도 없으니.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
-후훗...... 장난이라도 그런 소리 말았으면 하는군, 본녀는 수천 년은 더 어린 꼬마 소년의 몸에 흥미 없음이야.
장난스레 말한 그녀가 흩어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게 내가 가진 유일한 비밀을 공유하는 대상이 생겨버린 꼴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부르시게. 본녀는 그대의 안에서 남은 잠을 잘 터이니. 주변 인간들의 속마음이 어수선해서 잠이 올진 모르겠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침묵한 채 완전히 사라졌다.
한꺼번에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머리가 영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 * *
펠리스티 공국의 수도.
본래 대륙 검술대회로 달구어졌어야 할 이곳은 전날 있었던 발르티앙 드 볼티즈의 괴물화로 인해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때아닌 습격.
그것도 작은 스케일이 아닌 수많은 국가 연합이 주최하는 경기장 전체를 겨냥한 습격이었다.
자칫하면 수많은 사상자를 낼 뻔한 거대한 습격이라 조금만 늦었어도 대륙이 혼란에 휩싸였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마냥 그렇게 나쁘게 흘러가지만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이 커지기도 전에 내가 엎어버린 게 문제였다.
당연히 내가 날뛰는 걸 본 이는 신검 칼디라스. 그리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 신검의 주인이자 검의 공주님이라 불리는 일리나 황녀뿐이었다.
다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엔 일리나 황녀도 제대로 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고만 여길 뿐이다.
'지금 신관들은 내게서 발견된 성흔과 경기장에 남아 있는 잔류 신성력만 보고 지금 상황을 내가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지.'
정황상의 추측이다.
게다가 내 몸 상태를 확인한 신관이 내 몸에 생겨난 거대한 성흔을 보고 기겁했었다는 소리를 들은 후였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제 와서 드러난 걸 숨길 순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내게 신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사실은 여기저기 퍼졌을 것이다.
고작 성흔 가지고 뭘 야단법석이냐고?
3~400여 년 만에 고작 3명 나타난 성녀, 혹은 성자 후보.
성흔을 받은 이가 그만큼 적다.
당연히 성국에서도 그런 이를 발견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큼 귀한 흔적이라는 소리였다.
그저 유전적인 특징으로, 혹은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국 관심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 꼴이다.
망할 성흔.
차라리 소드마스터라고 알려지는 게 파장을 덜 일으킬 것이다.
성흔 한정으로 독실한 신관들은 어떤 의미의 광적인 집착을 보이니까.
서로 본심을 숨기고 하하 호호하는 귀족의 생리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무작정 돌진을 외칠 인간들이 많다.
-후훗, 성흔이라 함은 신의 사랑의 증거임에 틀림없지, 하나 본녀가 보기엔 집착의 흔적이 아닐.......
'씁쓸하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되는데.'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어떻게 해야 이 되먹잖은 시선을 싹 돌려버릴 수 있을까 고민이 들었다.
성흔의 크기부터가 기존의 상식을 박살 내버린 정도로 큰 게 문제인 만큼 이걸 해결할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대...... 무슨 생각을 하는 겐가?
"좋아 결정 났다."
결정 자체는 깔끔했다.
그리고, 내려진 결정은 어떻게? 신속하게 이행한다!
"바리스! 윈리!"
소란스런 날이 지속되던 중 결정을 내린 내가 두 녀석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오라버니?"
날씨가 추워져 난로의 앞에서 불을 쬐며 오들오들 떨던 녀석들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했다.
"피차 말해서 귀찮은 건 딱 질색이잖아. 그렇지?"
"그렇긴 하죠?"
"솔직히 저희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오라버니를 만나겠다고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신관들을 막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가 무슨 성지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잠깐이겠지만 성지...... 맞긴 하다. 정확히는 이 도시의 반 이상이.
내가 인위적으로 바꿔버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시종과 시녀들의 손에서 해결이 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두 녀석이 칼같이 잘라내고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미치광이 신자들 같으니라고.
이미 나를 만나겠다고 득시글거리는 신관들의 대부분은 이 사태의 전말보다도 역대급으로 거대한 성흔을 보유한 나를 보겠다는 생각이 더 커진 듯 보였다.
바리스의 중얼거림을 보며 나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짐 싸자! 복잡할 땐 튀는 게 상책이다."
애초에 남아서 해명할 이유도 없다.
사람이 살았으면 된 거지.
안 그런가.
남아서 전말을 설명해야 할 의무도 없거니와 이대로 있다간 저 집착 강한 신관들을 전부 상대해야 할 상황이다.
대신 그냥 가긴 뭣하니 대신 어그로를 끌어줄 탱커 하나만 내세워 두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 * *
부들부들.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낌상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잘게 떨리는 손끝에 쥐어진 작은 찻잔이 마치 초속으로 진동하는 기계처럼 찻잔을 쉴 새 없이 때렸기 때문이다.
"튀었다고?"
"화...... 황녀 저하! 튀, 튀었다니요! 그런 말씀은 어디!......."
"묻는 말에 대답해줘, 린다."
"흐끅."
섬뜩한 눈동자로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그 자식, 지금 튀었다고 말한 거지? 그렇지? 지금 나한테 다 덮어씌우다 못해 이상한 오해까지 생기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제 동생들 데리고 튀어버렸다 이거지?!"
"그...... 그것이. 황녀 저하의 방문을 요청하기 위해 사람이 갔을 땐 이미 숙소는 비어있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한데 왜 이렇게 무섭단 말인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이 마치 자신의 의지를 지니고 스산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위기의 순간에 내가 각성해서 신검으로 적을 처리해버렸다고? 게다가 자기가 성흔이 발현된 이유가 신검의 숨겨진 힘 때문인 것 같다고?"
그녀는 저항 한 번 못하고 뻗어있었고 신검에 그딴 힘은 숨겨져 있지도 않다,
"황녀 저...... 하?."
개소리, 그것도 터무니없는 개소리!
괴물로 변한 발르티앙은 기괴한 장법에 터뜨려버렸고 붉은 여성은 압도적인 검술로 베어버린 주제에!
다른 모든 이들은 이 말을 진실이라 믿는 듯하지만 전말을 모두 본 그녀 자신은 알고 있다. 마나 한 줌 느껴지지 않고 유약한 인상을 주고 있던 그가 터무니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녀가 정신을 잃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상태에 있었다 여긴 듯했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그가 하는 말, 그리고 그가 보여준 무위까지.
"린다, 기사단에 연장 챙기라고 해."
"황녀님! 진정하세요!"
"갸아아악!! 잡아와! 그 새끼 잡아와!! 머리채를 뽑아버릴 거야!"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고고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팔란 제국 황녀의 본질은 실상 윈리 이상 가는 왈가닥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으득.
"사람 잘못 봤어, 데이비 왕자 그 머릿속에 든 거 전부 뽑아먹어 버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고."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눈이 흉포한 야수처럼 번뜩였다.
14. 밤손님.
라운 왕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굉장히 고요했다.
성흔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신관이라곤 하지만 공사 구분 못 하고 날뛰는 망아지들은 아니었다.
기회가 눈앞에서 훨훨 날아가 버렸을 테니 그들로썬 제 눈으로 성흔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꼴이리라.
신나서 앞서가던 녀석들은 피로가 쌓이기라도 했는지 마차의 한편에 서로 기댄 채 잠들어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보기 드문 사이좋은 남매네.'
저 정도면 확실히 사이좋은 남매지.
내가 아는 남매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서로 투덕거리면서도 서로를 그렇게 챙기는 남매가 그리 많진 않다.
-그대, 입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네만.
'냅둬, 보기 좋잖아.'
잠들어있던 페르세르크가 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내 무릎 위에 안착해 편안하게 앉았다.
실체는 존재하지만 남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그녀였던 만큼 괜히 녀석들이 깨어나도 그녀의 정체가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사실 본녀는 그대가 칼디라스에 제법 흥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음?'
-그대는 현 신검의 주인 이외에 유일하게 칼디라스를 실체화시킬 수 있지, 아니, 현재 상태에선 그대가 유일하게 칼디라스를 실체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게 옳을까.
'아아.'
-오히려 그대가 칼디라스의 주인으로 제격인 게지.
그녀의 말이 가진 의미를 깨닫고 절로 피식 웃어 보였다.
칼디라스. 확실히 뛰어난 검이다. 자체 신성력에 조금 보태는 것만으로도 9 위계 성마법을 사용할 만큼 대량의 신성력을 보유한 에고소드는 잘 보기 힘드니까.
하지만.
'그래도 내 건 아니야.'
-그대라면 어떻게든 소유권을 강탈할 줄 알았음이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한데, 애들 코 묻은 물건을 빼앗을 수야 있나, 게다가 칼디라스는 사실 나와는 잘 안 맞아.'
-그대와 잘 맞지 않는 검이라.......
엄밀히 말해서 나는 대검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고민하듯 침묵하는 그녀를 둔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는 이미 내정해둔 검이 있다.
아직 손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수르트의 부탁에 따라 내 손에 넣어야 할 쌍둥이 검이 하나 있다는 소리였다.
제작 자체는 칼디라스와 동일시기에 제작되었다.
재료 또한 같은 놈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기에 그 진가를 발휘하지도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검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사가의 지하엔 누구도 열 수 없는 던전을 만들어놨다, 내 기술을 배운 니라믄 열 수 있을건디, 그 안에 내가 죽기 전에 완성 못 시킨 아이 두 명이 있데이. 찾으면 네 손으로 완성 시키뿌라. 그 후에 쌍둥이 검의 주인이 되건, 니가 맹글었다고 공표하고 팔아 뿔 건, 니 맴대로 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