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23화
슬슬 위가 쓰려 오는 몬미더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실은 영주님을 급히 좀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영주님이 계신 저택은 현재 굳게 닫힌 상태라...... 어찌 만나볼 수 없겠소?"
데이비의 말대로였다.
어떻게든 만나보려 할 것이다.
당연히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이...... 조금 힘들 듯합니다. 영주님이 과로로 편찮으십니다. 기껏 멀리서 찾아오시긴 하셨지만......."
"허어...... 통탄스러울 데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영지의 사업도 중요하지만 저희에겐 영주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해하오. 한 단체장의 건강은 늘 중요한 법이지."
허허 웃으며 할라스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녹탑 또한 그리 여유로운 실정이 아니라...... 어찌 안 되겠소?"
그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몬미더의 손에 쥐여주었다. 척 봐도 주머니의 안쪽에 든 내용물이 금덩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돈이 썩어 넘치는 집단.
마탑의 클라스.
"어허! 이게 무엇입니까! 청탁은 받지 않습니다!"
정말 아주 잠깐, 받고 입을 씻을까 욕심이 들기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뇌물을 받으라고 지시한 건 제 주인인 데이비.
괜히 뒤가 켕길 짓을 안 해도 들어올 돈이다.
"허허, 작은 성의요.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니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내 몬미더 근위조장과 친분을 쌓고 싶어 그런 것이니."
"허허!"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하며 곤란하다는 듯 탄식을 흘리는 몬미더의 행동에도 그는 무조건 받으라는 듯 그의 품 안에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작은 성의요. 작은 성의. 크흠! 내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소이다."
"허어...... 원래 제가 이런 걸 받는 사람이 아닌데......."
"아오, 아오만 이리 뛰어난 기사가 우리 때문에 고생한 것을 내 어찌 모른 척하겠소?"
능청스레 말한 그가 허허 웃어 보였다. 마치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진짜 영주님의 말대로 되는구나.......'
할라스와는 다르게 몬미더는 마음속으로 제 주인이 된 영주, 데이비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여러 단체야. 죄다 나를 만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을 거고. 아마 그 타깃은 가장 만나기 쉬우면서 내 측근이면서 외부에서 근무하는 네가 될 거다.'
그가 했던 말이다.
'뇌물도 쥐여주고 윽박지를 수도 있겠지. 거기서 잘 골라내. 윽박지르는 귄위주의자 놈들은 명단 추려서 보고하고 뇌물 주는 작자들은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어차피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모든 것은 큰 그림의 한 폭.
그의 말대로 이어지는 이 현상에 몬미더는 과연 그 16살, 아니 이제 열일곱이 된 소년이 정말 그 나잇대 소년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 *
"하아...... 이건 곤란한데."
안된다면서 고개를 저으면서도 몬미더가 헛기침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주머니를 갈무리해 숨겼다.
"크흠! 뭐, 주시는 거니 받겠습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하오. 내 따로 근위조장께 바라는 건 없소이다."
그리 말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한결같이 열망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보통 영지의 근위조장은 낮은 직급이라 보통 할라스 같은 중위급 마법사가 함부로 만나줄 만큼 뛰어난 직책은 되지 못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허허...... 하지만 어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그나저나 달의 풀 잎사귀의 일로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지요."
"괘념치 않으셔도 되오."
"하아...... 영주님이 편찮으신 관계로 만나게 해드릴 순 없습니다만......."
"실로 곤란하긴 하오. 하다못해 물건의 여부나 그와 관련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허어."
탄식하는 몬미더가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할라스 4급이 씨익 웃어 보였다.
"사실 본 탑에서도 하인스 영지의 사업에 대해 상당히 기대를 걸고 있소. 누가 뭐라 해도 동대륙에서 유일한 달의 풀 재배시도가 아니오? 아마 탑에서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줄지도......."
그 말에 내내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던 몬미더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는 영주님의 가신입니다. 사익을 위해 딱히 욕심을 부리진 않습니다."
"그럴 거라 믿소. 내 사람 보는 눈이 제법이오, 몬미더 근위조장은 첫인상부터가 강직하고 정직한 분 같아서 내 달리 말하진 않을 뿐."
"허허, 저를 과히 띄워주십니다. 흠, 그렇지, 이걸 보시지요."
마치 준비했다는 듯 작은 케이스를 꺼내 보인 그가 허허 웃었다.
"실은...... 수확이 끝나고 포장작업까지 모두 마쳤소이다. 이게 그 물건이긴 하오. 뭐, 영주님께서도 어차피 파는 물건인데 좀 보여준다고 뭐라 하시겠습니까."
"허어...... 이것이."
눈을 번뜩 빛내며 할라스 4급이 눈동자를 굴렸다.
'이건 1급이다! 동대륙에선 거의 사들일 수 없는 최상품의 질! 효율만 따지면 서대륙 것의 배 이상의 효율을 낼 게 분명하다!'
서대륙에서도 그렇게 많이 재배되지 않는 물건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질에 따라 사용빈도가 확 다르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동대륙 서대륙 할 것 없이 중요한 달의 풀 잎사귀인 만큼 서대륙에서 좋은 품질을 동대륙에 보낼 이유는 없었다.
'질의 상태가 좋아. 이정도면 뇌물을 먹여서라도 우선권을 따내야 한다!'
"커흠!"
물론 그 티를 낼 순 없었다.
"이렇게 은은하게 빛이 나다니, 정말 좋은 질이오. 대단하오!"
사심없는 감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몬미더가 나불나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렇지요. 영주님이 신경 쓰셔서 직접 재배하신 것들입니다. 대부분이 이정도의 질을 유지하고 있지요. 그보다 못한 것들은......."
말끝을 흐린 그의 모습에 할라스가 갸웃거렸다.
"애석하지만 모두 폐기 처분하고 거름으로 바꿨습니다."
"그럴 수가...... 그리 아까운 것을......."
"이외에 팔기 위해 상품으로 준비한 건 총 10000여 장 정도입니다."
할라스 4급이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굉장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반이나 되는 숫자를 과감하게 버리다니.
이곳의 영주인 데이비 왕자는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이라고 들었는데 그 결단력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실제로 질이 떨어진다 해도 달의 풀 잎사귀면 그 가격이 보통이던가.
실상 달의 풀 잎사귀가 같은 종이 자라게 하는 거름으로 최고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기에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영주님의 측근이다 보니 이것저것 들은 게 있지요. 듣자 하니 영주님은 이것을 경매에 부친다고 하셨습니다."
현장 경매라고 들어보았는가.
가장 가격을 많이 쳐주는 이들에게 판다는 소리다. 주로 어시장이나 농산물시장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혀...... 현장 경매라."
워낙에 고급물품이라 고품격 브랜드마냥 팔려온 물건인데 이것을 어시장의 물고기처럼 판다고 하니 그들로서도 솔직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자세한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직접 팔아서 중간 유통 과정 간에 생기는 거품을 최소화하겠다는 의도이십니다. 그리고 차후에 계속해서 판매하시겠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 그렇군. 그렇다면...... 우선권이라는 게 있겠군."
"그 부분에 관해선 저도 어떻게 말씀드릴 도리가 없어서."
"아니요, 이만한 고급정보를 주었는데 내 어찌 더 바라겠소! 이 일은 차후 녹탑에서도 크게 사례할 게요."
"그래 주신다면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만족스레 일어나 악수를 청하는 녹탑의 4급 마법사 할라스의 행동에 몬미더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는 그를 보내기가 무섭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좀 전까지 보이던 어수룩하고 욕심 있어 보이던 표정을 싹 지웠다.
"와...... 이게 진짜 되네."
* * *
마탑은 종류가 여러 가지라 할 수 있다.
불의 마법을 주로 연구하는 적탑. 물의 마법을 다루는 청탑.
처음 뇌물을 먹이려고 왔던 4급 마법사. 할라스가 소속된 바람계통 전문 연구 마탑인 녹탑까지.
알려진 마탑의 수는 꽤 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녹탑에서 온 할라스를 시작으로 몬미더는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당연히 달의 풀 잎사귀가 뛰어나다고 해도 당장 확인된 것도 없는데 이 먼 오지에 모든 단체가 찾아올 리는 없었다.
현재로써 파악된 마탑은 총 3곳.
연금학파가 4곳. 그리고 중규모이상급의 상단이 7곳이다. 이외에 중소규모 단체들이 상당수 몰려온 것도 있다.
돈 보따리 보유량만 따지면 어마어마한 단체이다 보니 당연히 몬미더에게 들어간 뇌물의 수만 해도 실로 굉장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내 말에 초췌한 표정으로 늘어져 있던 몬미더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영주님. 어떻게 아신 겁니까?"
"뭘?"
"저들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요."
"뻔하잖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여기라고 뭐 황금 만능주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시대를 불문하고, 차원을 불문하고 어디서든 통용되는 황금만능주의 만세.
내가 보인 건 그리 대단한 처세술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유혹하지 못할, 다른 방식으로 치고 들어오지 못할 물품을 내놓음으로써 자연스레 상황을 유도한 것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던가.
뱃사공이 노 젓는 법을 모를 순 없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 그들에게 받은 뇌물은?"
내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것이......."
"혼자 날름 해치울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 그럴 리가요!"
내가 눈을 번뜩이며 말하자 그가 질겁하며 가져온 상자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눠서 보너스로 가져가."
"네?"
"고생은 근위병과 근위조장이 다했잖아. 적당히 나눠서 다들 가져가라고."
"가져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마어마한 돈이다. 소소한 뇌물이라곤 해도 건네준 작자들의 자금상태를 생각하면 저 작은 주머니 하나하나에 든 물건들의 가치는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걸 흔쾌히 내어준다고 하니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 돈으로 환심이라도 살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거지."
"저, 저하!"
감동한 듯 몬미더의 시선이 심히 부담스럽다.
지금 영지민들이 내게 보내는 광신도 같은 시선을 생각하면 사실상 필요 없는 행동이지만 내게 그리 필요한 돈은 아니었다.
어차피 달의 풀 잎사귀를 경매에 올려 팔아치운 수익 대부분이 내 돈인 것을.
"이걸로 감동하고 할 것도 없어. 영지를 위해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거다."
"아, 알겠습니다!"
"혼자 독식하지 말고, 불만 나오지 않게 조율해서 나눠 가져가."
"알겠습니다!"
넙죽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그를 보며 미소 짓던 내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뇌물이라고 받아온 돈을 챙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 돈에 연연할 만큼 급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돈으로 민심을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