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5화
"하하, 미련한 저는 궁술에는 그리 소질이 없으니까요."
"쯧쯧...... 그렇게 굴다간 언젠가 네 형제 놈들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하하, 놈들이 당당하게 자리를 빼앗을 배짱이라도 있다면 말이지요."
데오르트 황제의 말에 40줄에 접어든 사내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그래, 황태자비는 잘 지내고 있느냐."
"예, 폐하의 넓은 아량으로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쯧...... 사나이 대장부라면 무릇 세상을 위해 날개를 펴기 전에 가족을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멍청한 놈들은 그저 명예와 직위에만 관심을 두고 지켜야 할 이를 등한시하다니."
피곤하게 한숨을 내쉰 데오르트 황제가 그대로 활시위를 당겼다.
스르르륵.......
투쾅!!!
동시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응축되며 화살에 스며들었고 곧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화살이 두꺼운 타깃을 박살 내며 땅에 처박혀버렸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폐하."
"쯧. 마스터라는 자리가 어디 노름으로 따내어 지는 줄 알았더냐."
"보통 마스터들도 그리 쉽게 투사체에 오러 블레이드를 남기긴 쉽지 않지요."
황태자이기에, 그리고 가장 그를 가까이서 봐왔던 첫째아들이기에 잘 알 수 있었다.
린디스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예 폐하."
박살 난 타깃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데오르트의 담담한 질문에 조용히 다가온 황태자가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활시위에 화살을 메긴 뒤 조용히 말했다.
"메아리 길드원이 정보를 가지고 왔었습니다."
"진척은 있다 하더냐."
"좋은 소식과 어정쩡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부터 들으시겠습니까."
"허, 아비를 놀릴 줄도 아는구나."
"그래도 나쁜 소식이 아니니 다행이지요."
그의 말에 황태자가 희희낙락 웃어 보였다.
"그래, 어정쩡한 소식부터 말해 보거라."
"링튼 백작과 콜리오 백작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명명백백히 비인도적인 행위를 적발당해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쯧......."
링튼 백작은 중앙 질병 관리단의 소속.
그리고 콜리오 백작은 몸의 불편함을 핑계로 데오르트 황제가 질병 관리단에 소속시켜준 수하였다.
"라운 왕국의 외곽 영지인 오르뎀 영지에서 일부러 병을 퍼뜨린 후 치료를 명목으로 검증되지 않은 인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모양입니다."
이 세계의 귀족이나 왕족에게 평민의 목숨은 실상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성질 더러운 귀족이 제 길을 막았다고 해서 평민의 목을 날려버렸다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욕심을 광기에 맡긴 자의 말로는 어딜 가나 똑같은 법이지. 그래, 누가 죽였다 하더냐."
"라운 왕국의 1 왕자입니다."
"아, 요즘 이름을 날리는 쟁쟁한 애송이 말이군."
"하하."
물론, 링튼 백작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데오르트 황제는 아둔한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위험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데오르트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혹여라도 이 일로 폐하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허어,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정도였으면 황제 자리도 못 해먹을 짓이지."
그 사실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좋은 소식이라 함은?"
"링튼 백작과 함께 악마의 피에 관해 연구하던 고르네오 남작이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악마의 피...... 그 병의 치료법을 개발했다 합니다. 그것도 고르네오 남작이나 링튼 백작이 아닌 라운 왕국의 1 왕자라더군요."
"......."
황태자의 말에 데오르트 황제의 눈가가 아주 잠깐 꿈틀거렸다.
"보통 좋은 소식이 아니구나."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데오르트 황제가 짧게 침음성을 삼켰다.
"치료는 거짓이 없겠지?"
"확인이 끝나 오르뎀 영지의 영지민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있다 합니다."
"라운 왕국의 왕자...... 아주 흥미롭구나. 혹여라도 이번 일로 라운 왕국의 애송이에게 드잡이질을 하려는 놈이 있을 터."
"어찌할까요."
"그만한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준 이를 모른 척할 수야 없지. 귀찮은 짓을 벌이려는 놈들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언제 한번 린디스 황실로 정식 초청을 할까요?"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만한 업적을 세웠다면 황실 일원과 혼담을 주선해도 나쁘진 않을 테지."
그의 물음에 황태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때였다.
고요한 정원 너머로 몇몇 시녀와 기사들이 작은 소녀를 대동한 채 이동하는 게 둘의 시야에 비친 것이다.
소녀는 반짝거리는 청록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온몸을 꽁꽁 싸맨 모습이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가면, 그리고 장갑.
겉으로 드러난 피부란 피부는 모두 숨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며 걸어가던 소녀는 곧 데오르트와 황태자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리고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제...... 제국의 쌍두룡께......."
"되었다. 그만하거라."
이에 데오르트가 그녀의 말을 끊자 그녀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지독하리만치 무거운 침묵이 내리 앉았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지독할 정도로 데오르트 황제가 그녀를 멸시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실상 그런 소문이 퍼진 것도 사실이었다.
린디스 제국은 수인을 배척하는 사상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마당에 막내 황녀가 수인 혼혈이라니.
황족이기에 멸시가 덜할 뿐 그녀가 받는 눈총의 따가움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거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고 진실은 조금 달랐다.
"왜 또 아버지라 불러주지 않는 것이냐."
"그...... 그것이......."
린디스 황제는 제 막내 딸아이를 너무 귀여워한 탓에 남들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심했던 게 문제였을까.
언제부터인가 황실 내엔 린디스 황제가 에이리아를 혐오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조심스레 그녀가 물러났다.
"주변 시선도 있고...... 저 같은 비천한. 수인을 가까이하시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뭐라? 비천해?"
그녀의 말을 끊은 데오르트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그...... 그것이......."
"알버스."
"처리할까요?"
좀 전의 과묵함과 교양은 버린 듯 알버스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철저하게 찾아내."
"네."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게 잘근잘근 짓밟아도 좋다. 감히 황족에게 헛바람을 불어넣다니, 간도 크군."
"아...... 아바마마!"
놀란 에이리아가 허둥지둥거렸다. 반사적으로 폐하 대신 아버지라 부르며 그녀가 데오르트의 옷깃을 잡았다.
"저 때문에 그...... 그리하시면 안 되어요......."
이에 두 사람이 시선을 돌리자 에이리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횡설수설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머리 위로 돋아난 귀가 정신없이 까딱거릴 지경이었다.
"넌 내 사랑스러운 딸이다. 감히 제국의 황제의 딸을 그리 말하는 자가 있다면 구족을 멸해도 모자라지 않음이지."
"괘...... 괜찮아요. 저 때문에 나서시면 아바마마와 오라버니의 위신에 폐를 끼치게 될 거에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못 본척해 주셔요. 약속...... 해주시는 거죠?"
"후우...... 그래. 약속하마. 알버스."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아...... 아바마마!"
당황한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하지만 데오르트 황제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에이리아, 넌 이 린디스 제국의 황제, 나 데오르트 알 린디스의 딸이다. 그 누가 너를 비천하다 할까!"
"하...... 하지만......."
"내 걱정을 할 생각이면 집어치우거라, 성국에서 지내는 동안 쓸데없는 걱정만 늘었구나. 이제 너를 업신여기는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그 모습에 그녀가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제 오라비를 바라보지만 이미 알버스는 그녀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아......."
결국 포기하는 건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 실상 지금 그녀에겐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에이리아가 생각 이상으로 조용히 물러나 버리자 데오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저...... 그게, 실은......."
뭔가 고민하듯 그녀가 우물쭈물한다.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 말투에 두 사람의 표정이 아주 미약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두 사람이 석상이 된 듯 굳어버렸다.
"소녀의 병이 언젠가 나으면...... 소녀가 연모하는 분과 이어질 수 있게 해주신다는 약조...... 아직 유, 유효한가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오랜 시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봐왔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무슨 상황인지 모를 이들이 아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알버스였다.
"에...... 에이리아? 설마......."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분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아직 이름도 잘 모르는 분이지만......."
그리고, 그녀의 태도에 데오르트가 과감하게 판단을 내렸다.
"알버스, 린디스 제국 황족의 가장 중요한 소양이 무엇이더냐."
"제 사람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는 나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지요."
"꽃에 벌레가 붙은 것 같구나."
"예 폐하, 철저하게 알아내서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아...... 안돼요!!"
비명을 지르듯 그녀가 격하게 소리쳤다.
물론, 두 사람은 에이리아 알 린디스가 말한 남자가 병의 치료제를 개발했던 이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 * *
약 일주일 정도.
그동안 오르뎀 영지에서 융해 가속바이러스의 박멸에 박차를 가한 결과,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결국 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가 없진 않았지만. 그 정도의 희생에서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리라.
덕분에 오르뎀 영지에서 성자라는 오글거리는 칭호로 나를 칭송하는 말이 많아진 모양이다만.
소형 마나 게이트.
기본적인 마나 게이트와 다르게 소수의 인원을 한정된 공간으로 보내는 대신 자체적인 충전 기능과 휴대성이 간편한 대륙 급 비보 중 하나이다.
문제라면, 한번 사용하고 나면 일주일 이상 충전을 해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공간 이동, 그것도 걸어서 며칠 이상 걸리는 장소를 단번에 이동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하하...... 죄송합니다. 아직 충전이 덜 돼서요."
"느긋하게 주변 경치나 구경하면서 가는데 뭐 문제라도 있을까요. 특히 오르뎀 영지는 근처의 절경이 좋은 곳이기도 하고."
나쁘진 않았다.
딱히 바쁘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시작부터 거대한 사업을 터뜨려 성공을 하지 않았던가.
느긋한 삶을 지향하는 바로써 일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은 그리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