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6화
"오라버니! 준비 다 됐어요!"
고급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적어도 이동하는 동안 불편함이 없을 커다란 마차에 오른 윈리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본래라면 하인스 영지의 적탑 지부에 볼일이 있는 율리스와 나만 돌아가는 게 맞겠지만 바리스의 부탁도 있는 터라 윈리도 당분간은 내가 보호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당연히 영지의 일을 혼자 떠맡아야 하는 바리스로썬 기함을 토할법한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녀석은 윈리 녀석을 내게 보내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의견을 내비쳤다.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사흘 정도만 이동하면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흐음......."
"가는 길에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많아요! 그러니까 제가......."
말을 하던 그녀가 문득 제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포트나?!"
"정말...... 감사드립니다. 데이비 왕자 저하."
"그래."
"저뿐만 아니라 영지에서 병에 노출되어있던 모두가 왕자 저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는 상당히 칼 같은 성미를 지니고 있는 듯했지만 그렇기에 감사를 빼먹지 않았다.
"저하께서 살려주신 이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윈리 왕녀 저하를 지키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내가 말했다.
"살았으면 된 거다. 은혜를 소중히 여길 거면 살아난 목숨 중하게 챙겨."
"명심하겠습니다."
"데이비 님, 슬슬 출발할 시간입니다."
이윽고 마법 마차의 상태를 확인한 율리스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지직...... 지지직.......
품 안에 넣어둔 통신용 수정구가 옅게 진동하며 연락이 왔음을 알려왔다.
"에이미?"
내 전속 시녀였고 이제는 영지의 대리 관리에 대해 배우고 있는 에이미의 연락에 내가 수정구를 들어 올리자 구슬 내부에서 에이미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저하!!...... 여...... 영지에!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38. 유치한 만남.
에이미의 호들갑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
연락용 수정구는 마치 이어폰처럼 내게만 들리도록 설정해둔 것이기에 에이미의 호들갑을 다른 이들이 듣지는 못했지만 쓸데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바리스가 왜 저까지 보낸 걸까요?"
"글쎄요. 바리스 왕자님은 데이비 님처럼 총명하고 정직한 분이더군요. 제 좁은 소견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순 없겠지만...... 잠시라도 편히 쉬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윈리가 고민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래는 그 이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형님, 죄송하지만 당분간만 윈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같은 놈보다는 녀석을 더 잘 보호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녀석에겐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지 내에서도 아직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어요. 다만...... 부모를 잃고 맡겨진 고아원 측에서 몇몇 아이들의 소재가 불분명합니다. 명백히 이번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일이에요.]
녀석의 부탁은 이해타산을 떠나 동생을 지키기 위한 쌍둥이 오빠의 조바심이었다.
링튼 백작의 일도 아니었다.
-그 일, 아무래도 조금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페르세르크가 새초롬한 미소를 띤 채 내 눈앞으로 떠올랐다.
가벼우면서도 우아한 복장을 툭툭 털어내며 내 앞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인 그녀가 평소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워프들이 살고 있던 황색 바위 부족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리고 하인스 영지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사항이 아니기에 조사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3곳에서 동시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확실치 않을 만큼 확인된 것이 거의 없는 사안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아이들만 노리고 데려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묘하게 무언가가 있다.
'제물 쪽으로 해석하면 흑마법사 부류를 생각해야 하나?'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마왕을 소환한답시고 신선한 어린아이의 피를 바쳐야 한다는 사이비 같은 계통이.
-그건 아닐 게야, 흑마법사란 작자들은 흉포하지만 바보는 아니지 그렇기에 제물로 쓸 아이를 납치한다 해도 신중에 신중을 기할 자들, 이렇게까지 대놓고 움직이진 않아.
그렇게 대놓고 당당하게 움직일 정도였으면 현재 대륙에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거의 전설 급으로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소문이 거짓이거나,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애초에 심증일 뿐 확실하게 아이들이 실종된 건지 확인된 것도 아니니.'
결과적으로 바리스는 외부의 일과 함께 이번 일을 조사하는 데에 윈리가 방해가 될 거라 여겼다.
방해라기보단 사고를 몰고 다니는 제 동생이 걱정돼서 참을 수가 없었으리라.
결과적으로 바리스는 더는 문제가 생기지 않게 차라리 윈리 녀석을 비교적 안전한 내 쪽으로 보내는 것을 택했다.
그저 내게 도움을 요청해도 될 일이었겠지만, 녀석은 이번 일도 링튼 백작 때의 일도 스스로 해결하려 필사적인 노력을 보였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고 했던가. 내게는 그리 와 닿는 말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는 녀석을 너무 과보호하는 건 마냥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범위가 오르뎀 영지뿐만 아니라 황색 바위 부족이나 하인스 영지도 포함이니 다른 방면에서 조사해볼 필요도 있었으리라.
"최대한 늦게 가고 싶은데."
"영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내 중얼거림을 들었던 것일까, 맞은 편에 앉아 말없이 윈리를 바라보던 율리스가 의문을 던져왔다.
"조금 껄끄러운 사람이 와있다고 하네요."
정말 아름다워서 보는 대로 눈 호강이 되는 것과 다르게 껄끄러운 면은 분명 남아 있는 인간상이다.
불안한 직감 상, 대부분의 일을 알고서 나를 찾아온 것일 터.
간단히 물려 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칼디라스는 다시 보기 싫은데.'
-당장 그대를 보면 멱살부터 틀어쥘 성격이긴 하지.
신검 칼디라스는 현재 나를 보자마자 멱살을 틀어잡을 만큼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거란 사실이다.
홍단이도 그랬지만, 칼디라스 때는 9 위급 최후 성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녀석의 신성력을 죄다 뽑아먹지 않았던가.
씁쓸한 웃음이 쉬이 가지 않는다.
* * *
느긋하게 가다 못해 아주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돌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이 엿가락마냥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랬다니까요? 그때 오라버니께서 나무에 막 오르시다가......."
"하하, 데이비 님은 예전부터 굉장히 독특한 분이셨네요."
"그렇죠? 헤헤."
본인은 입도 벙끗 안 하는데 윈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과거 자신과 내가 놀던 때를 떠올리고는 귀엽게 조잘거렸다.
-호오...... 그대에게 그렇게 파릇파릇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는가?
그때 당시만 해도 상당히 머릿속이 꽃밭이긴 했다.
'지금 내 이미지가 뭐가 어떻길래.'
-오락실에서 무한 재시작할 수 있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으면서 쥐꼬리만 한 용돈 들고 와서 부단히 노력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인 같군.
아주 그냥 흑막 같다고 대놓고 비난을 하시든지.
'뭐냐 그건.'
내 기억을 일부 읽어낸 그녀인 만큼 비유가 참 장난이 없다.
-그대는 솔직히 비정상인 게야.
'그래 보이나?'
대답하기엔 나로서도 답하기 힘든 문제이기도 했다.
-한번 죽으면 끝이고 다음 생에 대한 미지의 공포를 지닌 자가 살아가는 것과 그대가 살아가는 방식을 비교해본다면 확연히 알 수 있음이지.
그녀는 내가 가진 비틀린 점을 그대로 집어냈다.
괜히 심지가 꼬인다.
'팩트로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말 못 들어봤냐.'
-가끔은 묵직하게 맞아야 정신을 차릴 때도 있는 법이지.
키득키득하며 나를 놀리듯 돌아다니는 페르세르크.
그녀를 낚아채고 싶다만 허공에 손짓을 하면 괜히 시선을 모을 것 같아 조용히 분만 삼켰다.
히히힝!!
그때였다.
조용히 이동하던 마차 너머로 경치를 구경하던 중 갑자기 말이 멈춰 선 것이다.
"음?"
"무슨 일이지?"
갑작스런 제동에 놀란 윈리가 창문을 천천히 열자 마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누...... 누구시오! 마차에 타고 계신 분이 누군 줄 알고 길을 막는 거요?!"
이윽고 마부가 잔뜩 긴장한 어조로 앞을 막아선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윤기가 흐르는 털을 가진 고품종의 말. 튼튼하고 위엄 넘치는 갑옷을 입은 이들은 흔히 깊은 산 속에서나 보이는 산적과는 달랐다.
정식 기사단. 그것도 어지간한 중소규모의 영지가 아니라 굉장한 입지를 가진 기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둑.......
이윽고 말에서 내린 기사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정중하게 숙여 보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레드 드래곤 기사단장 듀리스라 합니다."
나이는 3~40대 정도 되었을까.
짧고 정갈한 수염을 한 사내가 투구를 벗으며 조용히 자신을 소개했다.
"레드 드래곤 기사단이라면...... 설마!"
그리고, 소개를 들은 율리스가 가장 먼저 그들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일리나 황녀의 호위 기사단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율리스와 윈리는 현재 하인스 영지에 누가 와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렇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오시는 길에 혹여라도 생길 문제가 없도록 저희가 호위하고자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불쾌하셨다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야말로 정중함 그 자체.
오히려 거북해질 정도의 정중함에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런 스타일은 굉장히 거북한데. 베르닐 시종장도 차가워 보일 뿐이지 의외로 능글맞은 영감이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선 긋기에 질린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솔직히 호위가 필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호의를 그냥 무시하기엔 레드드래곤 기사단의 입지가 너무 크네요."
허허롭게 웃어 보이면서 율리스가 의견을 물어온다.
느긋하게 시간 때우면서 최대한 늦게 가려고 했더니, 이 여자, 내 심리를 순식간에 파악한 모양이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어.'
-칼디라스의 계약자는 그대와 동갑이네.
'그래 봤자 꼬맹이.'
정말 아름다운 외모, 대륙에서 최고 신붓감 1위에 오른 그녀지만 그녀를 향한 내 판단 또한 애석한 사실이다.
-아쉽게 되었어, 본녀는 이렇게 느긋하게 무언가를 보는 게 아주 좋았는데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아쉽다는 것치고는 굉장히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 * *
정확히 나는, 펠리스티 공국에서 빠져나오면서 일리나 황녀에게 귀찮은 모든 것을 떠넘기고 도주해버렸다.
아마 내가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찾아가 멱살을 틀어쥐고 마구잡이로 흔들지 않았을까.
그런 것치고는 제법 오래 참은 모양이다만, 결국은 이리 만나게 되어버렸다.
"팔란 제국의 일리나 황녀님이 찾아뵙길 요청하고 있어요."
그녀의 존재는 단순히 표현해도 거물이라는 답 밖에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