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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93화 (93/1,559)

# 9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7화

실제로 하인스 영지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떠오르는 영지라곤 하지만 제국, 그것도 대륙 최대강국인 팔란 제국의 금지옥엽이 찾아올 만큼의 큰 가치를 지니기엔 시기상조라는 소리였다.

실제로 이곳에 자리를 튼 수많은 상단이나 마탑, 연금학파는 다양한 편이지만 대부분이 지부를 늘린 것일 뿐 딱히 이렇다 할 인물이 직접 오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율리스는 예외로 친다고 해도 확실히 [일리나 데 팔란]의 방문은 소문이 퍼지기엔 충분한 행보이기도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대륙 최강국 황제의 금지옥엽이 아니던가.

어지간한 귀족, 혹은 왕국의 왕족들이었다면 당장에라도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을 터다.

병사들의 막사에 사단장이 들이닥친 꼴이다.

실제로 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그렇게 해야 하지 않나? 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

분위기가 그러하다면 그대로 편승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요청이라......."

"어떻게 할까요? 응접실로 모실까요?"

에이미의 질문엔 미묘한 불안함이 어려있었다. 왜 불안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건네줄 답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붉은색의 뿔테안경을 고쳐 쓰는 에이미도 곧 내 입에서 나올 답변 정도는 예상이 간다는 듯 그저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거절해."

"네...... 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얼이 빠졌다.

뭐. 왜.

그녀가 갑자기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것도, 그녀의 존재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게 내가 그녀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내 말을 아직 기억하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이미는 곧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나갈 뿐이었다.

* * *

-그대, 아무리 그래도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게야?

한차례 접견을 거절하니 저쪽에서도 오기가 발동했나 싶었다.

또 한 차례 거절.

거절, 거절, 거절, 거절.

무슨 고집 싸움으로 번지듯 접견을 요청하고 대놓고 거절하기를 반복.

이제는 저쪽과 이쪽 모두 상호 간의 예우라는 것은 집어 던지고 고집 싸움이 벌어진다.

시작은 내가 했다만 저쪽도 유치하게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을 택한 꼴이다.

덕분에 중간에 끼인 이들만 죽어 나가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일리나 황녀의 접견 요청을 거절한 사실 때문에 그녀의 기사단인 레드 드래곤 기사단이 노발대발한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가벼이 무시하는 거로 일축해버렸다.

저들도 생각은 있으니 난동을 부리진 않더라.

"이유 없이 거절하는 건 아니야."

-설마...... 이 와중에도 영지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게야?

그녀가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왕이면 비싸게 가자고."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게 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최대강국의 금지옥엽이면 홍보 효과도 이만한 게 없다. 정보 길드와 상단까지 몰려있어 방대한 양의 정보가 이동하는 이 영지에서는 더더욱.

-삶은 게임이 아니야, 정말 겁도 없지...... 상대가 그대의 생각대로만 움직여줄 릴도 없는데 어찌 그리 겁이 없어.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모르진 않았다.

"그 황녀님이라서 괜찮은 거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나는 한번 작정한 일에는 뒷일을 걱정하고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시작하기 전에 신중할 뿐.

덕분에 주변에선 의외로 질시를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략이 판을 치는 이 세계에선 최악의 악수나 다름없다만 나는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보다 전진을 택했다.

집념과 고집 싸움의 승부가 계속되길 며칠.

예상대로 큰 문제로 번지진 않았다.

상대측에서도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일리나 황녀가 먼저 백기를 내걸고 만 것이다.

그렇게 돌아갔느냐고? 결과만 말하자면 그건 아니었다.

계속되는 거절 때문에 조급해진 그녀가 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이봐요 데이비 왕자님."

"......요즘 제국의 황녀님들은 월담 기술도 배웁니까?"

월담이었다.

황당하다는 듯한 내 질문에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서로 간에 할 말, 많지 않아요?"

그녀의 미소는 대륙 최고 미녀 중 한 명답게 너무도 환하고 눈부셨다.

그런데 미묘하게 그 미소가 비틀린 느낌이다.

"많을 텐데?"

위상도 높지 않은, 그저 흔한 작은 왕국의 왕자를 만나겠다고 끈질기게 찾아와서 응접을 요청하는 대륙 최대강국의 황녀.

거기에 대고 대놓고 이유도 없이 거절을 남발하고 있는 소국의 왕자나.

누가 보면 얘들이 지금 장난치나 라고 생각하게끔 황당한 기분을 숨길 수 없는 이 유치한 고집 싸움에서 백기를 선언한 일리나 황녀는 그야말로 발군의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할 이야기라......."

내가 모른 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창문에 올라선 채로 배시시 웃었다.

활발하면서도 풍성한 그녀의 황금빛 머릿결과 머리 뒤로 묶인 비녀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며 밤하늘을 배경으로 푸르게 빛났다.

"없으신가요? 분명 있으실 텐데?"

"일단 내려오시죠, 바람이 찹니다."

내 말에 그녀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는 가볍게 방 내부로 들어섰다.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쇼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창문에서 내려왔다.

"누가 보면 밀회라도 즐기는지 알겠습니다."

"꿈에서라도 그런 이야기 들을까 두렵네요."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쏘아붙여 온다.

아아, 스크래치!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네.

미녀의 미소는 좋지만 분노는 사양하고 싶은 편이다.

물론, 이기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아직 앳된 얼굴이나 작은 키 때문에 연애감정보다는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말이다.

"정말, 시간 한 번 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네요. 그렇죠, 데이비 왕자님? 제 입으로 말하긴 그런 내용이지만 어지간한 왕국의 왕도 이 정도로 만나기 번거롭진 않을 거예요."

"하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요."

"영지 내에 제가 왕자님을 만나고 싶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그걸 노린 겁니다."

내 능청스런 말에 그녀가 무표정으로 앞에 놓인 차를 들어 올렸다.

"설마 영지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그제야 내가 왜 계속 그녀의 접견 요청을 계속 거절했는지를 눈치챈 그녀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 하는 게 굉장히 재수 없는 건 아는데 너무 겁이 없는 거 아니에요?"

"제 간이 조금 크긴 하죠."

빙그레 웃는 내 말에 그녀가 짧게 혀를 찼다.

혀를 차?

-저 일리나라는 아이는 가끔 성격이 괄괄해지긴 했지.......

황녀 일리나는 페르세르크의 존재를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칼디라스의 내부에서 그녀를 계속해서 봐왔던 참이었다.

-데이비, 너무 놀리지는 말아. 심성은 착한 아이이니.

그래도 한때의 정이라는 게 있는지 페르세르크가 내 귀를 잡아당기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간지러워 인마.'

-후훗.

느긋한 미소를 띤 채 내게서 물러나는 그녀를 한번 쏘아본 나는 곧장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차 잘한 것 없으니 이 정도로 하지요. 이 밤중에 저를 찾아 월담하실 정도면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누구 때문에 조급해져서 말이에요. 우선 감사부터 드릴게요."

그녀가 담담하게 한 손을 가슴께에 올린 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전, 목숨을 빚졌어요. 그 사실은 명확히 해야 할 거 같아서요."

딱히 그녀를 구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실상 그때 당시 내가 신경 쓰던 것은 윈리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구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큰 제지를 하진 않았다.

"그리고, 당신 덕분에 칼디라스를 각성시킬 수 있었어요."

계약자라곤 하나 그녀는 칼디라스의 주인만 되었을 뿐 검의 형태로 각성시키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국의 검술대회 이후에 그것을 각성시켰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겠지만 그 일을 겪은 후 그녀의 경지가 높아졌거나.

[데이비이이!!! 이 망할 자식!!]

'칼디라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허들이 낮아졌거나.'

-눈치는 빨라.

일리나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브로치가 빛을 내뿜기 시작하더니 이내 흐릿한 소녀의 형태로 변해 내게 덤벼들었다.

나이는 6살 정도 되었을까.

외향은 페르세르크와 같은 청색이 섞인 은발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페르세르크가 나긋나긋하며 애교 있는 귀여움을 지녔다면 그녀는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아이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날아든 녀석은 에너지체라는 제 형태도 무시한 채 내 멱살을 틀어잡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칼디라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땍땍거리는 소녀, 칼디라스의 현신체를 잡아 뒤로 당긴 일리나가 말리려 했지만 칼디라스는 한참 동안 내 멱살을 틀어쥔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대로 떼어냈을 법한 행동임에도 나는 묵묵히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일단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도 사실이고.

[내가 얼마나 오래 기절했는지 알아?!]

"그래, 잘 잤냐?"

내가 머리를 툭툭 누르며 쓰다듬자 녀석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적어도 말은 하고 썼어야 할 거 아냐!!]

시시각각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걸 쓸 틈이 어딨을까.

그 사실을 칼디라스도 잘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녀석이 이렇게 나를 찾아 헤맸던 건 그때의 성마법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실감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녀석은 오랜 역경을 지나온 신검이다.

[페르...... 페르 어딨어.......]

예상대로 칼디라스는 페르세르크를 보지 못했다. 그녀를 보고 만질 수 있는 건 나, 그리고 내 영혼과 계약상태인 홍단이 청단이가 전부였다.

"안 보이나?"

[.......]

"잘 지내고 있어, 그때 의도하지 않게 성흔이 생기면서 내 쪽으로 넘어왔거든. 요컨대 공생 관계."

내 말에 그녀가 울먹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페르! 페르! 이 자식이 나쁜 짓 안 했지?! 괜찮은 거 맞지?! 응? 대답해줘! 제발.......]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애절하게 소리치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과거 적대관계였던 사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걱정과 아련함이 담겨있었다.

혹여라도 잘못된 게 아닐까, 페르세르크가 내게 없고 정말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 버린 건 아닐까.

그리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데이비.

그때 가만히 칼디라스를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나를 불렀다.

-마나를...... 조금만 빌려주겠어?

'얼마든지.'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칼디라스의 형상체를 그대로 허공에 띄우더니 저 자신도 날아올라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대었다.

우웅.......

상당량의 마나가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저게 페르세르크가 생각해낸 칼디라스와의 접촉법이라는 것을 알아낸 이상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카...... 칼디라스?"

갑자기 칼디라스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침묵하는 그 모습에 놀란 듯 일리나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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