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5권 24화
-오크도 있군.
'어디? 오오.......'
내 어깨에 올라앉아 주변을 구경하던 페르세르크의 손짓에 고개를 돌리자, 깔끔한 정복을 입은 오크가 인간과 대화를 나누며 잔을 부딪치고 있는 게 보였다.
기본적으로 오크는 인간보다 짙은 피부색에 덩치부터가 훨씬 큰 편에 속한다.
종족 상의 문제인지 기본적으로 오크들은 몸의 근육 비율이 드워프마냥 대단한 편에 속하니 말이다.
오크들의 표면적인 특징을 꼽으라면 짙은 녹빛의 피부색과 2m에서 2m 10센티 정도 되는 키, 그리고 단단하고 두꺼운 근육질 몸매, 마지막으로 인간과 다르게 입술 밖으로 돋아난 아랫송곳니가 특징이기도 했다.
"어떤 세계에선 인간과 오크가 죽어라 싸우는 적이었는데 말이야."
웃기게도 이 대륙의 오크는 인간과 제법 사이가 좋은 편이다.
명예를 따지는 전사의 종족이라 불리는 그들은 주로 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편인데 정치적인 문제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주로 용병일을 업으로 삼고 인간의 국가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런 연회는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지간한 이가 아니면 올 일도 없다.
아마 저 오크는 오크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계급이 높은 족장급, 혹은 대 장로급 정도 되는 오크이리라.
이외에 이 종족을 찾아보지만 찾은 것이라곤 오크가 전부다시피 할 만큼 새로운 이들은 찾기가 어려웠다.
엘프는 공식적으로 300여 년 전부터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고 드워프는 마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수인은 린디스 제국에서 상당히 멸시받던 풍습이 있는 탓에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듯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던 찰나.
문득 남성들과 떨어져 한숨을 포옥 내쉬고 있던 윈리의 곁으로 다가가는 누군가가 보였다.
"어이, 천한 것들끼리 모인다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잔뜩 날이 선 말투에 윈리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칼루스."
"네깟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뭐?"
초장부터 시비를 걸어오는 그의 곁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가 고고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미친 게 틀림없군, 데이비 놈도 네년도, 이런 급이 높은 연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냐?"
"웃기지 마, 그래 봐야 결국 너도 떼를 써서 온 것뿐이잖아?"
윈리도 당연히 마냥 착하고 순해 빠진 성격은 아니었다.
윈리의 독설에 그의 눈이 꿈틀거렸다.
"네까짓 년이 분수도 모르고 여길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말로 할 때 왕국으로 다시 꺼지는 게 좋을......."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저 정신 나간 돌대가리는 이곳이 공식적으로 수많은 국가가 모이는 장소라는 것도 잊은 채 공식적으로 제 동생을 모욕하고 있다.
그래도 전엔 공사 구분은 하는 것 같더니, 내가 머리에 태양을 심어준 이후로 아주 앞뒤 가리질 않는다.
남들이 보이지 않게 중지를 둥글게 말아 엄지에 걸친 내가 기공을 아주 미약하게 끌어올렸다.
미친 개새끼에겐.
[무음기공]
[탄지풍]
파앙!
"커헉?!"
매가 약이지.
"꺄악?! 칼루스 왕자 저하!"
순식간에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구는 녀석의 모습에 그의 곁에 있던 귀족 영애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잔잔한 연회의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누가 비명을 지르고 바닥을 뒹굴면 쳐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행동에 의해 그가 날아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진 못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은밀한 공격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칼루스 놈의 곁에 있는 이라곤 그의 파트너인 귀족 영애가 전부이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칼루스가 혼자서 원맨쇼라도 펼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타국까지 와서 정신 못 차리고 있지."
"크윽...... 이게 무슨......."
놈은 갑자기 허공의 공기가 자신을 때리는 기분을 받았을 것이다.
"데이비...... 이 천한 놈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는 칼루스의 눈엔 혐오와 경멸이 가득 담겨있다.
마치, 제가 위에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진 주제에 아직 자신의 상황도 파악을 못 하는 이 돌대가리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물론, 때때로 말보다 행동이 더 큰 여파를 가져오기도 한다.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내 정수리를 가리키고는 칼루스 놈을 향해 가리켰다.
동시에 이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가 칼루스에게 꽂혔다.
"풉......."
"크흠!"
동시에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고 누군가는 씁쓸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칼루스는 제 머리가 휑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그의 앞에 그 머리에 자리 잡은 태양을 가려주던 가발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들반들하게 드러난 두피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에 닿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음, 그래. 귀공의 머리에 태양 있으라.
"흐억?!"
그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것 또한,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린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뭐라 항변하고 싶지만 그의 번뜩이는 머리는 이미 모든 이의 눈에 보인 후였다.
아직 20대도 되지 않은 젊은 소년의 머리에 태양이 잠들어있다!
시뻘게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던 그는 이를 빠득 깨물며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가발을 덮어쓰곤 연회장 밖으로 도망치듯 튀어나가 버렸다.
"탈모 저주는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이었던 거 같네."
-그대가 심어둔 저주는 두고두고 트라우마가 될 게야.
내가 저주를 거두어들이기 전까지는 저 반들반들한 태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죽어도 그 저주를 풀 생각이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베네디트나 리네스 왕비에게도 같은 저주를 걸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당혹스러워하던 이들은 곧 칼루스가 도망쳐버리자 의아해하다가도 이해한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들에게 소국 왕자의 씁쓸한 해프닝은 관심 밖의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황당한 일이긴 해도 저들은 닳고 닳은 자기 관리의 전문가들이다.
게다가 칼루스는 딱히 내세울 것 없이 왕자라는 직급만 가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오라버니가 하셨어요?"
내가 다가가자 윈리가 조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냥 두면 할 말 못할 말 안 가릴 거 같아서."
"흐응......."
"그래도 데이비치고는 제법 잘 참는데?"
급기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일리나가 율리스를 대동한 채 다가오며 쿡쿡 웃어 보였다.
"저 칼루스라는 왕자, 너와 사이가 극도로 안 좋잖아.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그럴 리가. 조만간 궁지에 몰린 쥐는 크게 일을 치는 법이야."
내 말뜻을 깨달은 듯 일리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쩌자고 이 싸이코에게 싸움을 걸어서......."
"윈리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 와중에도 율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윈리를 향해 한 손을 내밀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연회의 주빈 격에 속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던 이들은 율리스가 갑자기 윈리에게 춤을 신청하자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윈리가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란 듯 보였다.
어찌하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윈리의 모습에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윈리가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었는데 그가 제때에 도움을 준 꼴이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내 허락에 윈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도 곧 환하게 웃으며 율리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상당히 곤혹스러워 보이시네요. 데이비 왕자님."
"별로 취향에 맞는 장소는 아닙니다. 황녀님."
마치 서로 연기를 하듯 대화를 하자 그녀가 처음으로 싸늘한 표정을 지우고 쿡쿡 웃어 보였다.
"첫날은 그저 맛보기이니까. 정 무리하기 싫다면 들어가는 것도 좋을 거야. 네가 원하는 경매는 내일이거든."
그녀의 말에 적극 찬동하고는 싶지만.
한편에서 율리스와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그저 조금 더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만 더 구경하지."
"그럼 나도 조금만 쉬어볼까......."
피곤함을 숨기지 못한 말투로 짧게 한숨을 내쉰 일리나는 내게 와인잔을 가볍게 들이밀었다.
"건배하실까요, 왕자님?"
"속이 메스꺼우니 마음에도 없는 연기는 집어치우지요."
"개자식."
짠!
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울림소리가 옅게 울려 퍼졌다.
"그 은발 꼬마 골렘 아가씨는?"
륀느를 말하는 것일 터다.
외향은 십 대 후반이지만 체격이 워낙에 아담한 탓에 사실 굉장히 동안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처를 보고 싶어 하길래 두고 왔어."
혹시나 싶어 대기시켜놓긴 했지만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라 아마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확률이 높다.
들키면 곤란하기야 하겠지만, 녀석의 은신능력은 제법 뛰어난 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안 보이네."
"관심 있어?"
주변에선 일리나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에 상당히 놀란 듯 보였지만 그녀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쉬이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에이리아 알 린디스 황녀. 린디스 제국의 막내 황녀로 이번 연도에 성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만나 본 적은 없고?"
"어릴 때 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몇 년간 성국에 있었다는 모양이니까. 알잖아, 성국 사람들은 이런 연회가 극단적으로 드물다는 거."
일리나의 설명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끼이익! 덜컹!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에이리아 알 린디스 황녀 저하께서 드십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노집사의 목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드디어 이 연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음알음 들은 대로 이번 연회는 막내 황녀님의 성년식과 함께 성국에서 복귀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수인 혼혈이라 수인족을 천대시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 린디스 제국에선 상당히 찬밥신세를 피할 순 없지만 황제는 그녀를 내세워 수인족을 천대하는 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릴 심산인 듯 보였다.
"저 애는......."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소녀의 모습에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는 사이야?"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물어오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아는 사이는 아니다. 숲에서 언뜻 지나친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백색의 장갑, 그리고 목까지 뒤덮는 수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드레스.
마지막으로 얼굴을 감싸는 백색의 가면까지.
환한 청록색의 머리카락에 수인족 특유의 귀만 없었다면 아마 알아보지도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저나...... 병에 걸려서 맨살을 드러낼 수 없다던데...... 진짜였나 보네."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데이비. 그 병이야.
'고르네오 남작이 말했던 이가 저 아이였구나. 그런데 시간이 꽤 흐른 거로 아는데 치료를 못 했나?'
특이체질이라 바이러스가 변질한 게 아니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미묘하게 움츠러들면서도 억지로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소녀의 존재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몰려들었다.
소식을 들어 접하고 있는 이들은 린디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막내딸의 존재에 호기심을 품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그동안 한 번도 공석상에 드러난 적이 없는 그녀였으니까.
그 탓에 순식간에 귀족들이 그녀에게 모여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