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18화
콰지지지직!!!!
순식간에 퍼져나간 오갈 곳을 잃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들이 모여들며 빛을 잃고 흩어지는 정령 마법진을 먹어치우고 새로운 마법진을 스스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반경 5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마법진의 존재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마법진을 이루는 언어는 룬어도, 엘프의 고어도 아닌 최상위 언어인 정령의 언어.
인간이 엘프의 정령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건 엘프의 고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엘프들은 정령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라고, 알려져 있는 게 상식이다만.
정령이든 엘프든 쓰라고 만들어놓은 말을 쓸데없이 꼬아놓는다고 못쓸 내가 아니었다.
쿠웅!!
지면이 크게 한 번 울렸다.
[내 의지는 곧 그대의 의지, 그대의 의지는 곧 나의 의지이니.]
쿠웅!!
[나는 그대의 힘을 갈구하고, 그대는 나의 존재를 갈망하리라.]
쿠웅!
이어지는 영창을 끝으로 천천히 일어난 내가 팔을 들어 올리며 눈을 떴다.
그그그그그극!!!
그리고, 나의 행동에 발을 맞추듯 거대한 정령마나가 일대의 생기를 다시 불어넣으며 거대한 흙의 거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신장 수십 미터.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해지는 거대한 흙의 거인이 제 존재감을 여지없이 뿌려댔다.
* * *
"이......이게 무슨?!"
콘대 장로는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지금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유리아 헬리샤나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려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보수파 장로들도 그랬지만 확실히 유리아 헬리샤나는 하이엘프들 사이에서도 물의 정령과의 친화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재능을 지닌 존재인 건 분명했다.
그가 모시는 신목의 성자가 말하길, 유리아의 재능은 친화력의 보조만 있다면 분명 최상급 정령의 소환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실패하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 준비하고 시행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더는 상급 물의 정령 운다인과 교감하고 동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미흡하게 최상급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를 소환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렸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최상급 정령 소환에 성공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까지 내렸다.
그 덕에 숲은 빠르게 오염되었고, 실제로 유리아 헬리샤나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엘레스트라의 소환에 실패하는 듯 보였다.
거기까진 그의 계획대로였다.
그런데.
마치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유리아의 앞에 있던 추악한 종족인 인간이 나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고대 정령의 힘을 정체 모를 구슬의 힘을 깨워내며 집어삼키고는 뒤이어 유리아의 힘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리고.
숲을 뒤덮는 거대한 오염 따윈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거대한 흙의 거인을 소환해내고야 말았다.
고서에도 등장한 적이 없던 절대적인 존재를 말이다.
"수......숲의 오염이......."
"사라져 간다."
좀 전까지 생기를 잃은 채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하던 일대의 식물들이 다시금 빛을 되찾으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자 콘대의 시선이 거대한 흙의 거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의 귓가로 정령왕을 소환한 주제에 느긋하게 서 있던 인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륀느."
"명령 대기 중."
"제압해."
"롸져."
콰앙!!!!
의미 모를 대화.
그후 콘대 장로는 갑작스런 격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처박혔다.
"륀느, 감정 회로가 매우 급속도로 가열. 매우 흠씬 두들겨 패는 걸 요청. 륀느가 직접 두들겨 패는 걸 추천!"
"일단 기다려."
천천히 몸을 돌린 소년의 눈동자는 평소의 붉은색이 아닌 신비로운 분위기의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 * *
막대한 양의 정령마나가 빠르게 증발했다.
내가 가진 마나와 신성력, 그리고 사령마나가 빠르게 정령마나로 변하며 그 뒤를 채우고 있지만 이래서는 마냥 좋지 못했다.
거대한 흙의 거인을 말없이 지켜보던 내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했다.
"정말 연비 안 좋네."
그러면서도 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움직였다.
애초에 정령 계약을 하기 위해.
또한, 주신 프리아 여신이 내건 거래를 완수하기 위해 이 숲에 온 게 아니던가.
"계약을 요구한다."
[순수한 엘프의 향취. 하지만 그대는 달라, 순수한 염원도, 최상급 정령과의 제대로 된 완전동화도 이루지 않았다. 나를 속였군.]
하위 등급의 정령과 완전 동화를 해야 그 이상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
그것은, 상위 정령이 자신과 계약할 자격이 충분한지 보는 시험과 같았다.
정령왕의 소환에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순수한 의지는 유리아의 것을 빌려왔고, 정령과의 동화를 더욱 안정적으로 보이게끔 만든 것은 내가 내뱉은 정령의 언어와 이곳에 풍부해진 정령마나였다.
"속은 놈이 잘못이지,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이 마법진, 정령왕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지 않나?"
정령계는 티오니스에 국한되는 차원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정령 여제의...... 정령 여제는 분명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닐 텐데, 그대가 어째서 이 지독한 마법진을 알고 있는 거지?]
"정령 여제를 아나?"
[어찌 잊을까. 그 여자의 계약 정령왕이 본인이거늘.]
"오, 우연 참 기구하네, 잘됐다. 내가 그 여자의 제자거든."
[악마가 악마를 키워냈군! 망할!]
"아, 모르겠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그대가 정령여제의 제자라면 내가 거부한들 선택권이 있는가?]
"당연히......."
말끝을 흐린 내가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없지. 계약 안 해주면 넌 절대 못 돌아가."
.......
뻔뻔한 요구에 흙의 거인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진 것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사기꾼. 계약에...... 응한다. 감히 내 눈을 속이고 나를 소환한 건 괘씸하지만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것은 본인이니.]
각 정령왕이 요구하는 것들은 대개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랐다.
그렇다면 정령여제 유리아나의 경우엔 어떻게 13명이나 되는 정령왕을 소환했는가.
그것은 일종의 사기극이었다.
어찌 보면 간이 불어터진 위험한 행위이기도 했다.
[말하라 계약자여.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겠다.]
"첫 번째 요구를 상납하지."
[응한다.]
"적의 제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를 공격하려던 에이션트 가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제압당한 콘대를 제외하고 이곳에 적이라고 하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윽?!"
반사적으로 정령의 힘을 일으켜 내게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행동은 제법 빨랐다.
반사적으로 정령 화살을 만들어내 반격을 가해보려 했지만, 그녀가 계약한 정령은 상급 정령.
두 단계 위의 존재이자 정령의 근원인 정령왕에게 정령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를 말려죽이기 위해 만든 공간이, 도리어 그들의 목을 조른 꼴이었다.
마치 대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도망치는 여성을 낚아챈 뒤 그대로 몸을 묶어 지면에 처박아버렸고 그 위로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정령왕의 분노가 내리 꽂혔다.
내게 속은 것에 대한 분노가 담겼는지 그 위력이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갔다.
콰아아아아앙!!!
대지가 일렁이며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고, 그대로 대지의 정령왕 노아스의 주먹에 맞은 여성이 반격도 못한 채 지면에 내리꽂혔다.
거대한 프레스로 내리찍은 것처럼 그대로 엘프 하나가 곤죽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지만.
노아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면을 움직여 그대로 엘프 여성을 집어삼켜버렸다.
특별히 준비한 게 없는 이상.
아무리 상급 정령사라 해도 정령왕의 공격을 버티진 못하리라.
이어서 나는 금방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에이션트 가드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끊고 입을 열었다.
강한 건 사실인데 정말 연비가 좋지 않았다.
"두 번째 요구를 상납한다. 이 숲에 퍼진 모든 오염의 정화."
[오염의 향취....... 역겨운 향이로군, 좋다. 승낙한다.]
"그리고, 너를 소환할 때 한 엘프의 의지가 깃들었을 거다. 그녀에게 가해진 저주와 리바운드를 해결해줘, 할 수 있지?"
신성력이나 흑마법의 저주와는 다른 정령의 저주.
그것은 정령으로밖에 풀 수 없었다.
[세계수의 저주.......]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거대한 흙의 거인, 노아스의 침음성이 들려왔다.
[신목이 미친것인가.]
"내가 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어."
짧은 중얼거림 끝에 거대한 흙더미가 쓰러진 유리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멀쩡한 엘프를 생매장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눈앞에 소환된 존재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상급이나, 최상급 정령도 아닌 정령왕 노아스.
그 존재가 가져오는 여파는 엘프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그그그극!!!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흙에 완전히 덮혀 있던 유리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듯 쓰러져 있던 그녀의 상태는 좀 전보다는 확실히 좋아져 있었다.
정령왕이 가지는 고유의 힘이 그녀의 몸 안에 엉킨 정령의 힘을 단번에 풀어버린 것이다.
이윽고, 내 의지에 따르듯 노아스는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한 손을 지면에 천천히 박아 넣었다.
동시에 대량의 정령마나가 내 몸에서 빨려나가며 노아스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대의 정화가 아닌 이 숲 전체의 오염을 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왕 하나 정도의 마나는 감당할 수 있다지만 역시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어마어마한 마나가 빠져나갔다.
아마 내게 삐질 대로 삐진 노아스가 과도하게 내 힘을 끌어다 쓰고 있다는 걸 모를 순 없었다.
이러한 정령왕의 투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 위해선...
"최소 9서클 급까지 마나를 끌어올려놓지 않으면 안 되겠네."
본래 정령이라는 것이 첫 소환에 유별날 정도로 많은 마나를 먹는다지만 역시 작정하고 힘을 끌어 쓰는 정령왕의 경우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투정을 부리며 바닥에 쓰러진 유리아를 안아들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던 시야로 나를 담아낸 그녀는 곧 내 뒤에 서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흙의 거인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땅의 정령왕....... 노아스. 정말로...... 성공하신 건가요?"
"어때, 멋지지? 어디 가서도 이런 거 못 볼걸?"
네 평생에 정령왕 구경하기가 쉬운 줄 아냐!
"하....... 역시 고용주님은 너무 터무니없네요."
"내가 말했잖아. 소환할 거라고."
"아니, 솔직히 고용주님이 해주신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믿겠어요."
희미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옅게 기침을 했다.
"리바운드를 노아스가 중화시켰다곤 해도 너는 당분간 정령 소환은 못 할 거다."
"각오했던 바에요. 숲의 오염은......."
"직접 확인해 봐."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는 생기를 잃어가던 숲이 다시 생기를 되찾아가는 모습에 옅게 웃어보였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신 놓치마.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나는 내 목적을 모두 이뤘다.
정령의 계약에 성공했고, 주신 프리아가 내게 내건 거래인 대숲의 정화를 해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부가적인 수입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증거는 확실한가요?"
"륀느의 기능은 다양하니까."
그리 말하며 나는 작은 하프엘프 소녀를 업은 채 묵묵히 서 있는 륀느와 콘대 장로를 제압한 채 바닥에 처박아두고 있는 메가트론을 바라보았다.
자아가 없는 골렘이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전기톱으로 목을 날려버릴 것처럼 위협적인 모습은 륀느의 불쾌함이 그대로 전해진 탓이리라.
콘대는 뮤우가 숲의 오염에 빠져 죽은 줄 알았겠지만.
나를 향해 친구라고 하며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던 소녀를 죽게 둘만큼 내 인성이 글러먹진 않았다.
"아....... 아아...... 이건 거짓말이야."
"콘대 장로, 조용히 하세요."
"이건 거짓말이란 말이오!!! 어찌 한낮 인간이!!"
격하게 소리치며 그가 침을 튀겼다.
"말해보시오! 왜 당신이 아니라 인간이 정령을 소환한 거요?! 게다가 정령왕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게 있지요."
싸늘하게 말한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있다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며 멍하니 있던 엘프 하나에게 입을 열었다.
"나의 친우 밀리아. 활을 주세요."
"아......아? 유리아 님?"
"어서."
차분하면서도 싸늘한 그 분위기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 때리고 있던 엘프가드 밀리아가 떨떠름하게 활을 꺼내 내밀었다.
이에 무심하게 활을 받아든 유리아는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는 그대로 콘대를 향해 겨누었다.
"콘대 장로. 당신은 신목의 성자가 내린 명령을 완수한다는 명목으로 이 숲의 오염을 가속화시켰고, 보호 받아야 할 아이를 오염의 근원에 던져 넣은 죄를 인정하나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유......유리아 님! 그게 무슨?!"
당황한 엘프들을 무시한 채 유리아는 콘대 장로를 똑바로 직시했다.
이번엔 경어가 아닌 하대였다.
"말하라! 콘대 장로."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건 모함이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 때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 ......커헉?!"
발작하듯 소리치던 그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가만히 있던 륀느가 맨발로 그의 머리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륀느, 영상 기록 능력 매우 높게 평가."
담담하게 말하며 녀석이 푸른색의 눈동자를 빛냈다.
우웅!!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퍼져 나온 빛이 앞으로 뻗어져 나오며 마치 영상 출력기처럼 영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