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3화
66.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저런, 정말 아쉽게 되었구나.......]
씁쓸하게 말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화신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거짓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 진심 어린 마음이 더욱 섬뜩한 느낌을 준다.
쌔애앵!! 카앙!!
공격에 신호는 없었다.
순식간에 아이나를 향해 파고든 에이션트 가드 하나가 허리춤에 매어두었던 레이피어의 날카로운 끝을 그녀의 심장에 겨누고 그대로 찔러넣는 것까지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녀를 압박하는 다섯 명의 엘프들은 마치 다섯이서 한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칼 같은 합격진을 보여주며 그녀를 압박해 들어왔다.
카앙!!!
순식간에 파고들어 레이피어를 찔러넣는 두 명의 공격을 흘려내기가 무섭게 바람의 칼날에 머금어진 화살이 그녀의 급소를 향해 파고들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파악!!!
틈 없이 호흡을 맞추고 압박하는 적이 다섯.
게다가 하나하나 수준이 마스터급 이상이라면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대인전의 경험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숨을 짧게 들이쉰 아이나 헬리샤나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동시에 그녀의 미간을 노리고 연녹빛의 섬광이 날아들었다.
정령의 힘을 덧씌운 레이피어.
공격이 실패하기가 무섭게 다시 검을 회수하고 빠지려는 엘프의 다리를 걸어 넘긴 아이나는 곧바로 사각으로 파고드는 다른 에이션트 가드의 검을 팔째로 낚아챈 뒤 균형이 무너진 엘프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촤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붉고 뜨거운 피가 허공에 튀지만,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푸욱!! 푹!!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충분히 치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짧게 숨을 들이키며 크게 베인 팔을 내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강해....... 벌써 하나를 내주면 곤란한데......'
이제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5명의 에이션트 가드를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가장 위험한 존재가 남는다.
이런 식이라면 몇 분 못 가 바닥에 쓰러지는 건 저들이 아니라 자신이 되리라.
그녀는 목숨을 걸고 싸울지라도 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죽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아이나 헬리샤나는 조금 과감한 수단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들을 움직이는 핵심은 어디까지나 세계수의 화신체.
그렇다면.
'세계수의 화신체를 무력화시킨다!'
그녀의 예상대로라면 화신체는 권능을 발현할 수 있되 육체 능력은 거의 없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세계수의 의지가 교체된 건 고작 300여 년 전.
뛰어난 존재일 뿐 전투능력이 그리 높진 않으리라.
기회를 엿보듯 공격을 피해내던 아이나는 에이션트 가드를 견제하듯 작은 천으로 감싸진 비도 서너 자루를 빠르게 투사했다.
빛을 반사하지 않는 비도는 확실히 기습적이었지만 그리 빠르지 않았다.
푹!! 푹푹!!
물론, 노리고 던진 게 아닌 만큼 그것을 맞아주는 이는 없었고 결국 비도는 힘을 잃고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숨이 거칠어지고 상처가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나 헬리샤나의 눈은 더욱 이채를 띄었다.
푸욱!!
이윽고.
힘겹게 버티던 아이나의 복부에 레이피어가 연달아 꽂히며 그녀의 커다란 체구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쿨럭......"
고통 어린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역류한 피가 절로 고통스런 기침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저항했다.
하지만 제압은 무자비했다.
콰앙!!
사정없이 바닥에 처박히고 팔을 꺾여 제압당한 아이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를 들어 이그드라실과 5명의 에이션트 가드를 노려보았다.
"저항하지 마라. 세계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광적인 맹신이 담긴 목소리에 아이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만두거라, 모두 같은 숲의 자식이거늘 과격하게 제압해서 어쩌겠다는 게냐.]
"죄송합니다."
이그드라실의 타박에 엘프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이나.]
"......"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려무나. 네 타락은 어찌할 수 없으나 네가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의 곁으로 온다면......]
"하......잘못이요."
싸늘하게 내뱉은 아이나의 눈에 독기가 돋았다.
콰악!!
반사적으로 그녀를 제압한 에이션트 가드들이 움직였지만, 그녀의 입을 막진 못했다.
"내가 데이비 그 남자의 곁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빌어먹을 색골 같은 남자이지만 그는 진정으로 능력이 있었고 신의가 있는 남자였습니다. 당신과는 달라, 그러니......"
[흐음?]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이그드라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나는 천천히 주먹을 뻗은 뒤 중지를 치켜들었다.
"엿이나 드십시오."
파악!!
그 말과 동시에 아이나의 손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푸쉬이이이익!!!!
바닥에 꽂혀있던 비도들이 일제히 발광하며 지독한 독연을 내뿜었다.
"읏?! 신목의 어머니시여! 피하십시오!"
당황한 에이션트 가드들이 일제히 이그드라실의 앞을 막아선다.
하지만.
'가급적 뒤져버리라지.'
화신체는 몇백을 죽인다 한들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의 본체는 움직일 수 없는 거목.
한번 화신체를 잃으면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다.
그 괴물 같은 소년인 데이비에게 에이션트 가드가 해를 가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우려되는 존재는 오로지 세계수 단 하나.
콰앙!!! 쾅!!
거대한 폭발음을 바라보며 아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퍼진 독연은 독연 자체만으로도 생명에게 치명적이지만 제대로 된 효능은 일정 트리거를 통해 독연을 그대로 폭파시켜버릴 수 있다는 것.
그 순간 온도가 보통이 아니라 기습적으로 당하면 일반 인간의 육체 능력밖에 가지지 않은 세계수의 화신체가 견뎌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화마에 휩싸여버린 들판을 바라보던 아이나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처리된 건가......"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한 채 일어난 그녀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뭐가 되었건 기회가 생겼을 때......
푸욱!!
도망쳐야 할 텐데.
그녀는 제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레이피어의 얇고 뾰족한 검신을 내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콰작!!
동시에 레이피어의 날카로운 검 끝에 걸려 박살 나버린 해골문양의 목걸이가 깨지며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의 모습이 완전히 빛에 휩싸이기 시작하며 곧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190은 넘던 커다란 체격이었다.
하지만 점차 줄어드는 키는 190은커녕 160도 안 될 만큼 작은 키로 변해버렸다.
다부지고 튼튼하던 근육은 사라지고 매끈하고 유려한 곡선을 가진 밝은 갈색빛 피부로 돌변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하늘빛에 변색된 듯한 짙은 남색으로 변했고 짧았던 길이는 풍성하게 길어지며 마치 본래 모습이 이것이었다는 것처럼 두 갈래 아래로 가늘게 늘어트린 형태로 변했다.
"쿨럭......"
치명상이라는 건 분명했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대로 무릎을 꿇은 그녀가 유일하게 맑은 색을 띠고 있는 하늘빛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푸확!!
이윽고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던 레이피어가 빠져나가자 그녀의 몸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총기가 어려있던 눈동자는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면서 동시에 흐릿해졌고 초점조차 잡히지 않게 되었다.
'아......안 되는데...... 여기서 죽을 순.......'
입을 뻥끗거리면서도 억지로 중얼거리던 아이나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로 아이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5명의 에이션트 가드와 폭발 속에서도 멀쩡하게 걸어 나온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화신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기습공격이었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성공시켰건만.
결국, 개죽음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 * *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두거라. 목숨을 직접 거두진 말아.]
"명령이시라면."
짧게 답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엘프들을 보며 이그드라실이 미소를 지우고 쓰러진 갈색 피부의 엘프 여성을 바라보았다.
아이나 헬리샤나.
본래 신목의 성지에서 가장 재능이 높다 추앙받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타락했고.
다크엘프가 되어 숲을 등지고 떠났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지 30년도 더 되었건만 눈빛만큼은 한결같았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는지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운 이그드라실은 곧 아이나에게 처음 당해 쓰러졌던 엘프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우웅!!!
동시에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날카로운 금속에 구멍이 뚫려버렸던 가슴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죽을 정도의 치명상이 순식간에 치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그런 사실이 다른 에이션트 가드들에게 놀랍게 보이진 않았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권능.
숲의 아이를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손길.
세계수는 엘프의 근원이라 불리는 거목인 만큼 거목 자체가 가진 권능은 과거 삼천 년 전 대륙전쟁의 주축 중 하나였다는 마왕 페르세르크와도 견줄 만했다.
"아...... 세계수시여......"
[몸은 괜찮으냐?]
"예!"
[그래, 다행이로구나. 그럼 어서 가도록 하자꾸나, 시간과 힘을 너무 낭비하였으니.]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화신은 쓰러진 아이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별이 거의 뜨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어둑어둑한 밤의 풍경이 더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무언가가 미약하나마 남아있던 빛까지 집어삼킨 느낌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이상함을 눈치챈 에이션트 가드들이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려던 찰나였다.
"다크엘프의 눈 색은 마음의 변화에 따라 색이 바뀐다고 하던데."
그들의 귓가로 담담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타락하면서 색이 가장 먼저 탁해져야 하는 눈 색이 저렇게 맑을 정도면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지?"
"누...... 누구?!"
달칵.
아주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잠겨있던 것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검을 검집에 고정하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지는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레이피어를 허리에 차고 있던 엘프에게서 들려왔다.
"무슨?!"
푹!!
자신의 레이피어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에이션트 가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공기가 관통하는 듯 아주 날카롭고 깔끔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미간이 관통당한 것이다.
엘프에 한정해서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다.
그런 세계수의 권능조차 즉사한 이를 살릴 순 없다.
마스터 헌터에 중급 정령과 계약할 정도로 강한 에이션트 가드 하나가 절명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주변은 이내 마치 완전히 빛이 사라진 어두운 지하동굴처럼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목의 어머니를 지켜라! 기습이다!!"
자신들의 기감을 완전히 속이고 파고든 정체불명의 남성.
그 존재에 놀란 에이션트 가드들이 자신들의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느낄 수 있는 건 차디찬 공기였고.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이었으며.
그들이 맡을 수 있는 향기는 섬뜩하리만치 비릿한 혈향 뿐이었다.
"불청객이라 해도 축제에 찾아온 손님인데, 그냥 보낼 수야 있나."
"누......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남성. 아니 정확히는 20대 남성보다는 조금 앳돼 보이는 10대 중후반 소년의 목소리와 울려 퍼지며 싸늘한 공기가 마치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졌다.
"마침 좋은 이벤트가 하나 남았는데, 너무 자극적이라 고민하고 있었거든, 혹시 귀신의 집 좋아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