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7화
67. 중부대륙의 소식과 부담스러운 손님
-데이비, 엘프들이 그대를 적대하면 인간 중에서도 그대를 적대하려는 이들이 나타날 게야.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한다. 하물며 남남 관계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엘프들이 갑자기 나를 적대시한다면.......
그 분위기에 편승해 나를 배척하려는 이들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 봐야 지금 당장은 어떻게 못 할 거야."
-못한다고?
"그래."
데스로드가 가르쳐준 저주는 엄연히 그 저주를 받아치고 방어하라고 배운 것들이지만 나는 그 좋은 것들을 묵혀놓을 생각 따윈 없다.
적어도 내가 걸어둔 수십 가지의 저주를 모두 푸는 데에만 몇 달에서 1년은 걸릴 터.
단순히 기분 나쁘다고 걸어버린 저주는 아니었다.
언젠가 엘프와의 충돌은 예상한바.
그렇다면 차라리 화끈하게 일을 치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보다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너를 부활시키려는 이들이 있다는 말."
내 말에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글쎄, 세계수의 말 중 유일하게 그것만큼은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네만.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만...... 데이비! 본녀가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즉!
"......"
그 와중에도 초월의 종언에 미련을 못 버린 그녀였다.
-데이비! 이건 그냥 두도록 해! 본녀는 반드시 육체를 얻어 부활할 터이니!
의욕을 극도로 불태우는 그녀였다. 다만 그 모종의 존재들이 그녀를 부활시키려 하는 데에 아무것도 제약을 걸어두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단 지켜보자."
-반드시 부활할 게야! 본녀는 그런 잘 빠진 스태프를 한 번도 못 만져 보고 성불할 생각 따윈 없음이니!!
"그래, 그래."
다행히 영지 밖에서 일어난 소란은 영지 내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늦어가는 밤.
아직까지 축제의 분위기에서 모두 벗어나지 못한 활기찬 거리를 창밖으로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걸음을 옮겨 고요한 상층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
그곳에는 침대에 누운 채 말없이 하늘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그 모습으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녀의 질문에 내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 볼 때부터."
"......"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였다.
나이는 분명 성년이 지난 엘프인데 키가 작은 탓인지 아직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선 살려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그래 고마워하라고, 이걸로 빚진 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싸늘하게 쏘아붙인 그녀는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전에 엘프가 싫다고 했던 말은!?"
"당연히 일부러 그랬지."
"이 사기꾼!"
냉담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표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속은 놈이 잘못이지 누굴 탓해. 그리고 거짓말한 건 아니야."
엘프가 싫은 건 여전하다.
달의 숲 엘프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트여있으니 내가 받아들인 거지, 고일 대로 고인 귀쟁이들은 호감 대상이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모습을 바꿔주는 아티펙트는 분명......"
"보이니까 아는 거지."
"그 말...... 처음에 저를 봤을 때도 하셨습니다만."
"그러니까. 그 말을 했지."
"하! 완전히 놀아났네요."
내 말에 허탈함이 들었던 것일까.
아이나 헬리샤나는 결국 허탈한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네 요청대로 남들의 눈에 닿지 않는 곳에 데려오긴 했다만, 왜 숨으려 드는 거지? 이제 이 영지에는 엘프라는 존재가 그리 비밀스러운 존재도 아닌데."
내 질문에 그녀가 침묵을 유지했다.
"다크엘프라는 이유로 숨는 건 조금 아귀가 안 맞고. 너 혹시......"
"부탁드립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십시오."
담담하게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영지의 그 누구도 제 본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남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활동한 거니까요. 이젠 부서져 버렸지만......."
그녀의 말에 고민하듯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아티펙트. 여분은 없나?"
"숲을 떠나 방황하던 당시 기인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입니다. 마나 감지에도 걸리지 않는 특이한 물건이라 이제는 구할 수도 없고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나 만들어줄까?"
"예?"
내 질문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려봐."
이윽고 아공간에서 단순한 루비 반지 하나를 꺼내 든 나는 그 위로 손을 뻗은 뒤 마나를 풀어 넣었다.
[메타몰포시스]
[일루전]
간단한 형체 변환 마법과 환상 마법.
"네가 쓰던 것만큼 완벽하진 못하겠지만, 당분간은 이걸로 만족해라. 시동어는 [변환]. 마나를 조금만 밀어 넣으면 금방 변할 거다."
반지를 받아든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반지를 검지에 끼워 넣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벼...... 변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그녀의 형체가 눈앞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가녀리던 육체는 점점 커지고 다부지게 변했고 밝은 갈색을 띠고 있던 피부는 점차 하얗게 변했다.
"조금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네요."
"급조한 건데 당연하지. 마나 감지에도 걸리고,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풀릴 거다. 그러니 알아서 처신 잘해."
이 정도도 많이 해준 거잖아.
내 미소에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는 줄게."
내 말에 그녀는 고이 간직하고 있던 반쯤 찢어진 지도를 꺼내 들었다.
"동부 대륙 남단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섬?"
"네, 과거 숲이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언데드의 땅이 되어버린 곳이고요."
"그래서, 여기서 보물찾기라도 하자고?"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저희가 바라는 건 그곳에 있을 보물이 아닌 증표 하나뿐입니다. 신목의 성자가 엘프를 배신하고 언데드의 힘을 빌려 썼다는 증표를요."
여기도 신목의 성자와 싸움질이다.
그녀의 단호한 요구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변을 들려주었다.
"싫어."
"흐읏?!"
-응?
"음?"
동시에 순간적으로 신음을 흘린 그녀가 움찔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자 그녀가 내 시선을 회피했다.
"드......들어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싫어졌어."
"흐읏!"
단호한 대답에 다시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들은 게 아니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나는 페르세르크에게서 빌려온 정보확인 능력을 끌어다 사용했다.
모르면 알아봐야지.
삐릭......
남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며 그녀의 정보가 일면 드러났다.
"......"
그만 알아보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진짜 귀쟁이들은 하나같이 골때리는 군.
어느 숲의 수장은 숨겨진 사디스틱 심성을 숨기고 있더니.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 * *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실패작도 이런 실패작이 없다.
전날 밤. 영지를 습격했던 엘프들은 모두 뒤처리를 마쳤다.
몇몇 인원만을 데리고 시체가 된 다섯 명의 엘프를 모두 깔끔하게 매장한 뒤 묘비를 만들었다.
가장 씁쓸한 시신은 다름 아닌 자결한 엘프.
페넬라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성에겐 딱히 유감이 없지만, 그녀가 품고 있던 아이까지 죽은 것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프든 인간이든 아이가 빛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것만큼 씁쓸한 일이 없는 법이다.
아이나는 내가 그들의 묘비를 만들어주는 것을 극렬히 반대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든 주범들인데 어째서 묘비까지 만들어주냐며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그들의 묘비를 만들었다.
나름대로 이유와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노림수가 없었다면 방치했거나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렸거나 화장을 했을 것이다.
이들의 죽음은 그렇게 숨겨져선 곤란했다.
반드시 여기에 있었고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증거로 남아야 하는 게 내 입장이었다.
큰 그림을 그릴 땐 처음 이게 뭔가 싶은 작업도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묘비엔 이름도 알지 못하고 종족도 기입할 수 없었다.
그저 나뭇가지로 간단하게 십자가를 세우고 봉분을 쌓아 올리는 게 전부.
애초에 땅을 파고 덮는 것이야 대지의 정령왕 노아스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도 없었다.
당시엔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내가 노아스와 계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나의 경악한 모습은 퍽 흥미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반짝반짝 자근벼얼~"
"아~아름답게 비치네에!"
나는 눈앞에 나란히 선 채 딱 붙인 무릎을 구부리며 손을 흔드는 두 아이의 재롱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간단히 알려준 율동과 노래였는데 이 두 아이에겐 그런 것도 제법 흥미가 있었는지 금방 익히고 내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재롱이었다.
"아이구 귀여워라.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엽냐."
사심 없이 웃으며 두 아이를 끌어안아 주자 두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륵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륀느, 뮤우는?"
"......륀느...... 세 명은 난이도가 너무 급상승......추가수당을......요구."
바닥에 추욱 늘어진 채 온몸으로 파업을 선언하고 있는 륀느가 고개를 살짝 든다.
"뮤우, 엘프 유리아와 함께 행동 중이라 보고."
"그래. 오늘은 내가 데리고 다닐 테니까. 푹 쉬어."
"륀느...... 휴식을, 높게 평가."
마치 잠에 빠져들 듯 그대로 눈을 감고 침묵하는 녀석은 편안해 보였다.
상당한 이동으로 과열된 동체를 식힐 때 륀느는 주로 인간처럼 수면이라는 선택을 하곤 했다.
그 덕분에 륀느의 모습은 골렘보다는 그저 머리에 링 하나 달고 등허리에 날개가 달린 이종족처럼 보였다.
콘대장로의 일 이후 유리아는 과할 정도로 뮤우를 많이 감싸고 다녔다.
아마 그동안 주지 못한 애정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주겠다는 심산인 듯 보인다.
물론, 정말 그 이유뿐인지는 지금까지 해온 짓을 보면 의문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홍단이 청단이, 오늘은 아빠랑 어디로 갈까?"
"머......먹거리 장터!"
"마싯는 거! 막 막! 어~엄청 많은 데!"
인간의 축제 구역에 있는 먹거리 장터에 관심을 두는 두 녀석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온다.
"그럼 그렇게 할까?"
"응! 응!"
"꺄아!"
기분이 좋은지 내게 파고들어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녀석들이었다.
"아바 조아아!"
"청다니가 더 아빠 조아!"
서로 경쟁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비록 검이 본체인 아이들이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성장하고 커가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을 보듬고 정서를 바로잡아줄 엄마라는 존재가 생기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들은 페르세르크를 엄마라 부르며 따르긴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혼령이 아니던가.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후보라면.......
-역시 그대의 이상형에 맞을법한 여인은 린디스 제국의 그 귀여운 황녀님밖에 없어 보이네만.
'너는 어떤데.'
-예끼! 본녀는 1000년 이상 어린 남자에겐 관심 없음이야.
관심이 없으시다?
헛웃음이 나온 내가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너, 세계수의 말대로 정말 부활하면, 그때 보자.'
-하 본녀가 그대를 두려워할까.
'초월의 종언 빌려준다.'
-본녀의 이상형은 사실 그대 같은 남자인 게지. 암.
왜 저렇게 타락했을까.......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부아! 홍다니 조아?"
"그래, 홍단이 청단이 둘 다 좋다."
"그,그럼 홍단이 볼에 뽀,뽀뽀!"
애정을 숨긴 없이 표하는 순수한 그 모습에 절로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아......아빠요?"
익숙하지 않은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내 귓가로 들려왔다.
"음?"
이에 당황한 내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잔뜩 꾸민 차림새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작은 소녀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상당히 놀라기라도 한 것일까, 환한 청록빛 머리카락 위로 돋아난 여우 귀가 긴장한 듯 뾰족하게 추켜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