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22화
72. 성흔을 가진 자와 그러지 못한 자
대치하듯 마주 서기가 무섭게 성기사들이 묵묵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지키듯 일 열로 도열했다.
그 행동은 마치 내게서 그녀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필요 없을 때엔 대놓고 배척을 했던 주제에.
결과적으로 스스로 불리해지기 시작하니 상황을 돌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을 부리려 든다.
제법 약삭빠른 행동이다.
실제로 내가 여기서 조금만 대처를 잘못해도 애꿎은 비난의 화살이 날아드는 건 분명할 테니까.
그렇기에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이 덧없이 죽어가는데 그 고집이나 부린다고 방관하겠다니. 그게 악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저 단순히 사과만 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그 알량한 자존심 지키겠답시고 돌파구를 걷어찬 본인에게 듣기엔 조금 뻔뻔하지 않나?"
느긋한 내 비꼼에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신의 역할은 그저 다량의 신성력으로 나를 보조하는 정도였습니다. 성흔을 하사받았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당신이 신성마법을 익힌 것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저는 5살 때부터 신성마법을 익혀왔어요! 그런 제가 할 수 없는걸 성흔을 받았다고 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나요?"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녀의 행동에 절로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저는 솔직히 주신 프리아 여신님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당신이 아니라 제가 성흔을 받았다면! 제가 진짜 성녀가 되었다면! 사람이 이렇게 죽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녀의 외침에 나는 말없이 청단이의 그립 끝 폼멜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스릉!!
성기사단이 검을 뽑는 건 한순간이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 그녀의 목에 홍단이를 겨누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제지하기 위해 뒤늦게 검을 뽑아 든 성기사단의 대치가 이어졌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그래서 성녀가 못된 거다."
성흔을 받는 것에 사람 수의 제한 따윈 없다.
"내가 성흔을 받았기 때문에 네가 성흔을 내려받지 못한 게 아니야."
단순히 네 역량이 딸려서 못 받은 거지.
"시대를 거쳐 성녀나 성자는 한 세대에 반드시 한 명이었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게 단 한 명만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그러는 너는 주신 프리아 여신에 대해 뭘 아는데."
내 질문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그 잘나신 신의 어록? 성경? 넌 그게 인간이 만든 것인지 신이 만든 건지 어떻게 알고 있나."
자애의 여신? 웃기는 소리.
태초부터 프리아 여신은 그 어떤 것도 인간에게 가르침을 내리지 않았다.
스스로 생명체가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힘과 은혜를 뿌렸을 뿐.
"그런 근본적인 것도 모르는 주제에 네가 뭐가 대단하다는 건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도 프리아 여신의 속마음 따위는 알지 못하지."
"신성 모독입니다. 역시 당신은 절대 상종 못 할 이단이군요. 신실한 신자는 절대 마귀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예요."
"그건 그쪽 입장이고. 이곳 수성전이 지속될수록 넌 고립될 거다."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19025/20000
목표치까지 약 천명.
"데이비 왕자니이이임~"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를 내며 내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정성이 담긴듯한 빵이었다.
"이거라도 좀 드시면서 하세요."
"괜찮습니다. 리나 성녀후보님."
"그러면 안되요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라도 먹고살아야 움직이는 거라고요오."
버릇인지 말을 죽죽 늘리는 그녀였지만 그런 말투 때문에 더욱 정감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나 성녀후보.
앨리스와 같은 성국에서 보유한 두 명의 성녀후보 중 하나로 맹하고 어리숙한 성격 탓에 토벌 시작부터 앨리스의 등쌀에 밀려 나와 같이 후방에 배치된 여성이었다.
말끔하게 웃어 보이며 어서 먹어보라는 듯 빵을 내 입에 들이미는 그녀의 행동에 퍽 웃음이 나와 받아먹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헤실거리는 그녀였다.
"정말 왕자님이 오신 덕분에 환자분들이 아파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기뻐요. 역시 울상보단 미소가 좋죠."
그녀는 이권 관계를 떠나 사람 하나하나를 치료하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기뻐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보면.
인격적으로나 잠재적으로나 그녀가 앨리스보다는 더 성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저 자신의 재능만 믿고 남을 찍어누르기만 하고 제 명성을 따지는 앨리스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음 같아선 직접 성흔을 찍어주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만능인 것은 아니리라.
"대부분의 급한 환자는 치료가 끝났어요. 이제 제가 볼 테니 조금 쉬고 오세요."
"그리 힘들지도 않아요."
"아니에요! 쉬고 오셔요오!"
내 등을 떠미는 그녀의 활발함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 물러나자 그녀는 마치 배웅이라도 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외성에선 지금 수성전이 시작되고 있을 텐데, 걱정도 안 됩니까?"
"저희는 저희의 일을 해야죠. 마음 같아선 직접 나서서 다친 병사분들을 치료하고 싶지만......, 제 능력으론 언데드의 사기를 막을 수 없는걸요오."
무슨 상황이 벌어져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거의 다 찼군.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2만 명을 모두 채우는 순간 이 불편한 대치관계도 끝을 맺으리라.
그때였다.
"서......서쪽 외성이 뚫렸습니다!! 모두 퇴각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입니다!!"
다급히 뛰어오며 소리치는 병사의 외침에 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무슨?! 서문이면 앨리스 성녀후보께서 막고 있던 방향이 아닌가요?!"
"이럴 때가 아닙니다! 곧바로 후방의 성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가십시오! 외성이 뚫리면 내성은 길어야 며칠을 못 버틸 겁니다!"
"이...... 이를 어째!"
당황하며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다 리나를 불렀다.
"리나 성녀후보님."
"예......예?"
"치료 계속하세요."
"그 무슨......."
"언데드가 여기까지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공세는 계속될 것이고, 나는 2만 명을 모두 채우기 전까지 이곳을 빼앗길 순 없다.
생각 이상으로 성녀후보가 무능한 게 조금 짜증이 나지만 어차피 반쯤 나를 의심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초기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보여주어 불화의 횃불에 불씨를 붙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할수록 앨리스의 입지는 줄어들 테니까.
키가 작은 리나 성녀 후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던 것이 버릇이 된 탓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버린 꼴이었다.
"그......그......"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전장으로 가시는 건가요?"
"네. 적당히 손만 거들고 돌아오지요."
"몸조심하세요. 아 이걸 가져가 주세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 그녀가 품 안에서 작은 십자가를 꺼내 내밀었다.
상당량의 신성력이 머금어진 십자가 아티펙트였다.
"신께서 당신께 축복을 내리시길."
"좋은 물건이네요. 감사합니다."
내 미소에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 * *
끝도 없이 밀려 올라오는 언데드.
하늘을 날아다니며 병사들을 낚아채 요새 밖으로 내던지고 있는 와이번과 데스나이트의 공세.
거대한 체격을 지닌 머드웜들이 언데드들을 입안에 담고 땅굴을 파고들어 와 쏟아놓는 탓에 요새의 서문은 아주 난장판 그 자체였다.
물리는 순간 언데드 확정인 만큼 단순한 거리 유지용 수성전과 다르게 서문의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아악!!!"
"죽고 싶지 않아!"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 사방에서 속출한다.
언데드에게 물린 병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언데드로 변해 동료였던 이들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최악의 사태라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문을 지키던 성녀후보 앨리스는 계속해서 같은 외침만을 반복했다.
"물러서지 마세요!! 마(魔)의 존재와 타협은 없습니다! 이건 성전입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이 대륙은 마에 굴복하게 되는 겁니다!!"
격하게 외치며 효과가 크지 않는 신성력을 방출하고 있는 그녀는 한 손에 피가 묻은 검과 나머지 한 손에 작은 십자가를 든 채 직접 전장으로 뛰어들어 싸우고 있었다.
"퇴각해야 합니다! 앨리스 성녀후보!!"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연합의 참모, 살리반 황자가 급히 그녀를 붙잡고 퇴각해야 한다며 소리쳤지만, 그녀는 거의 강박증세라도 생긴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여기서 물러나면요! 그다음은 어디죠?! 내성인가요?! 팔란의 수도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대륙 전체입니까! 여기서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합참모는 납니다!! 아무리 성국과의 조약에 따라 당신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지만 월권행위는 적당히 하세요!"
살리반의 외침에도 앨리스의 집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심각해지는 건 여전했다.
점차 수세에 몰려드는 서쪽 연합군의 상태를 말없이 지켜보던 내가 한 손을 허공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거대한 십자가 형태를 한 신창 롱기누스를 꺼낸 뒤 조용히 읊조렸다.
"저런 애 성흔 찍어주면 답이 뻔합니다. 절대 안 돼요. 내 마음 알죠?"
기도라기보단 단순한 잡담이었다.
신념이 비틀린 자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법이다.
내 손끝을 타고 신성력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른 성문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서쪽 성문은 그대로 두면 분명 뚫릴 게 틀림없었다.
콰아앙!!!!
그리고, 그 쐐기를 박듯 성벽 일부가 거대한 몬스터의 육탄돌격에 무너지며 구멍이 뚫렸고 그 틈 사이로 언데드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로 절망적인 상황에 표정이 거멓게 죽어가기 시작하는 살리반 황자와 이를 악물고 항전을 외치는 앨리스를 보며 내가 짧게 혀를 찼다.
"이래서 광신도들이 안 좋아."
-지금 이렇게 나서도 되는 게야?
"2만 명 다 채우기 전엔 뚫리면 안 돼. 이렇게 뭐라도 한 척이라도 하면 저쪽은 더 고립될 거다."
십자가를 가볍게 세운 내가 양손을 펼쳤다.
우웅!!
동시에 내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수십 가닥의 빛의 휘광이 꼬아지듯 바닥에서 하늘로 빠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저건......."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하자 공기가 뒤바뀐다.
빛줄기들이 이내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자 전쟁을 치르던 이들이 일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방대한 신성력에 눈을 부릅떴다.
반대로 언데드의 경우 내 언데드의 지배력에 이끌려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원시원하게 퍼부어보자."
담담하게 말하며 서문을 포함한 위태위태한 동문, 북문, 그리고 남서문을 락온 한 뒤 내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거대한 저항을 받듯 천천히 움직인 손이 끝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치잉.......
[8위계 성마법.]
[신의 지팡이(Rod of God)]
300여 년 된 리치, 클레르 오르판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던 신의 지팡이가 또다시 몇 가닥으로 나뉘어 폭격하듯 하늘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앙!!!!쾅!
닿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지우고 파괴하는 빛의 섬광이 추락할 때마다 수백 수천의 언데드들이 쓸려나간다.
좁은 지형으로 밀고 들어왔던 만큼 피할 곳도 없는 이상 그 여파는 고스란히 퍼져 나갔다.
"이게......대체......."
상식적으로 예상 못 했던 사태에 놀란 듯 살리반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투를 하던 병사들은 빛의 섬광을 낙하시키는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일순간에 신의 지팡이가 떨어지면서 들려오는 폭음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될 만큼 침묵이 주변을 휘감았다.
네크로 폴리스를 감싸던 배리어를 부술 정도의 출력은 필요 없었기에 그때 쏟아냈던 5개의 빛의 기둥을 분산시켜 수십 발로 나누어 추락시켰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듯 떨어지는 광선은 한번 추락하는 거로 멈추지 않고 일대에 있는 언데드들을 찾아가 불태워버린 후 사라지며 날뛰었다.
당연 창공에서 떨어지는 빛의 기둥에 휩쓸린 와이번들도 마찬가지였다.
피할 곳을 잃은 놈들은 썩어 문드러진 살점 채로 불타오르며 허공에서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갔다.
마스터급 데스나이트라 해도 8위계 성마법을 견뎌낼 정도로 힘을 강화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은 곧 마지막 빛의 섬광이 성벽을 박살 내버렸던 거대한 언데드 몬스터의 몸 절반을 불태워버리고 사라지는 것을 끝으로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됐다. 보여줄 만큼 보여줬으니 철수하자."
자리를 벗어나던 내 시선에 닿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절대 불가능하다는 듯한 시선.
그리고.
나를 향한 지독한 질시가 담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성녀후보 앨리스의 모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