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24화
슬며시 떨어뜨린 손가락을 다시 붙이며 녀석이 혀를 찼다.
처음엔 제법 순수하던 녀석이었는데.
짧게 혀를 차는 륀느를 보니 손으로 눈을 가린 주제에 손가락 틈사이로 볼 건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치심보다는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륀느나, 페르세르크나 단순 연식으로 따지면 나보다 상위의 존재다.
륀느는 만년 단위로 잠들어있던 고대의 유산이고. 페르세르크는 삼천 년 이상을 혼으로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표현하자면.
나이도 한참 많은 어르신들에게 성희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감이 다 죽었나......."
주술이야 다른 힘에 비해 조금 특색이 있지만, 효율은 떨어지는 편이니까.
이 육체로 돌아온 후로 거의 손도 댄 적이 없었는데. 그 탓인지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에 주술이나 도술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다 보니 육체가 아직 완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회랑에서 내가 주술을 배운 건 한참 늦은 후였으니 말이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린 내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펑!!!!
동시에 내 앞에 있던 7명의 인간이 다시 연기로 변하더니 다시 모습을 바꿨다.
"됐네."
이번엔 똑바로 되었는지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한 데이비 분신체 7명을 보며 내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오른손 거수."
스윽.
"왼손 거수."
스윽.
"좋아. 일 시작하자, 흩어져."
애초에 명령을 들을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니 명령을 듣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생각이 없다.
신목이 유일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힘.
주술과 도술이라면 활동은 보장된 셈이다.
순식간에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분신체들을 보던 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서 대기한다."
"륀느 의문. 더 많으면 빠르게 찾을 수 있다고 단언."
"도력으로 만들어진 분신들은 세계수가 눈치를 못 채지만 나는 아니야."
내 몸엔 마나가 있으니까. 흔적이 남게 된다.
수색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 *
"......"
고심하듯 침묵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모습에 그녀의 눈앞에 앉아있던 장신의 엘프 사내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그리 혼란스러워하십니까?"
"별일 아니란다."
담담하게 말하는 이그드라실은 평소의 자애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로브로 가려 숨기고 있었다.
그 진실을 모를 순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 신목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나뭇잎이 말라 비틀어져 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본래 세계수의 힘을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뿌린 저주는 세계수와 신목의 성자의 생각을 아득히 넘어서는 지독한 수준이었다.
흑마법이 거의 사장되어가는 이 세계에서 이만큼 고도로 발달된 저주가 어떻게 다시금 살아난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세계수의 눈은 그녀가 마음을 먹는 순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소모되는 힘도 크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전쟁의 양상은 사실상 소모전으로 접어들었다.
단 한 번에 너무 크게 데인 탓일까.
자신의 아이 유르겐은 신중한 성격 탓에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게 나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고 하인스 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녀가 본 운명이었고 변함은 없다. 그렇기에 이그드라실은 엘프의 본 전력이자 자신의 수호대인 에이션트 가드를 따로 빼내 몇몇은 신목을 지키게 하고 몇몇은 우회시켜 하인스 영지로 은밀하게 보냈다.
곧 있으면 유리아를 탈환하였다는 보고가 들려와야 했다.
그것이 운명이니까.
전쟁에선 패배하나 싸움에선 이긴다.
분노한 데이비가 무리하게 유리아를 되찾기 위해 이 숲까지 들어오게 되고 신목의 성지를 발견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손에 눈을 감으리라.
그것은 새롭게 바라본 운명의 노선이었다.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진 흐름이고, 이것은 신의 의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평소와 다른 미묘한 불안감이 쉬이 떨쳐지지 않는 이그드라실이었다.
말없이 신목의 숲 전체를 굽어 돌아보던 이그드라실은 문득 있어선 안 될 무언가를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여가......잘못 본 것인가."
다시금 시선을 그곳으로 돌려보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흔적도 없었다. 어떤 생명체도 마나를 가지고 있는 이상 흔적이 남는다.
마치 좀 전 스치듯 본 것이 그저 헛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면 분명 자신이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너무 잔신경을 많이 쓰신듯합니다만."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남성 엘프가 중얼거렸다.
세계수가 고른 신목의 성자였다.
"그는 이곳으로 오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 만드신 결계가 있으니까요. 설사 온다고 해도 그가 결계를 뚫으려 시도한다면 어머니께서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시지요."
"여가 불안해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예."
단호한 답변에 이그드라실이 차갑게 웃어 보였다.
"웃기는 소리로구나. 미래의 흐름을 아는 여가 불안해한다니."
"어쩌면, 그 변수라는 것이 걸리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하는 신목의 성자를 보며 기분이 상한 이그드라실은 다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몸 안에 잠식된 저주를 마저 털어내기 위해 힘을 집중시켰다.
이 저주가 풀리는 되는 그때에.
그 추악한 인간을 직접 죽이리라.
신목의 숲에선 세계수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이상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니까.
이그드라실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미 숲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한 7명의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신목의 숲은 어마어마하게 넓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수색으론 몇 날 며칠을 헤매도 찾아내기 힘든 게 신목의 성지이지만 다행히 유리아가 준 정보를 종합해 찾은 결과 반나절 만에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데이비님. 신목의 위치를 찾았다면 륀느가 나서? 륀느의 후임들이 나서?"
질문을 던지는 륀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아직 신목을 보호하는 결계가 멀쩡하잖아. 저것부터 박살 낼 거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문득 장난기가 돋았다.
"신목의 성지엔 세계수의 본체가 있지. 그렇다면, 에나벨이 나서면 어떨까."
"에! 나! 벨!"
놀란 얼굴로 에나벨의 이름을 한 글자씩 떼어 말하던 륀느가 눈을 반짝였다.
"륀느, 특수작전에 륀느의 신입 후임의 능력을 매우 기대!"
"그래,"
아공간에서 꺼낸 큐브를 허공에 던지자 마치 생체조직처럼 일그러진 큐브가 곧 커다란 형태로 변하더니 일사불란하게 모여들며 한 명의 엘프 여성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에나벨이었다.
"에나벨. 잘할 수 있지?"
[명령 대기 중.]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줄게."
내 말에 에나벨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눈을 떴다.
녀석의 분홍색으로 변색된 눈동자가 옅게 빛났다.
* * *
에나벨이 내게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아공간에서 초월의 종언을 꺼내 들었다.
녀석이 엘프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골렘이라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녀석이 신목의 성지로 들어가려면 세계수의 시선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주변을 덮고 있는 결계를 한 차례 부숴버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단순한 보조가 아니다.
권능 발현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마나량에 숲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세계수 이그드라실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터다.
알았다면?
인사라도 해드려야지.
-데이비, 세계수는 세상을 떠받치는 나무야. 마구잡이로 부숴버렸다간.......
"괜찮아. 조절하고 있으니까."
우우우웅!!!!
스스로 공명하며 떨리기 시작하는 초월의 종언을 한 손에 강하게 쥔 뒤 나는 심장에서 회전하고 있는 서클들을 하나둘씩 역으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서로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던 마나서클이 역으로 뒤틀리며 대량의 마찰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몸 안의 마나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팔의 혈관이 부풀어 올랐고 피가 멋대로 쏠려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데이비?! 미쳤어?!
물론, 잘 돌아가던 마나서클의 일부를 역회전시키는 미친 짓이 상식적으로 정상적인 행위는 아니지만 말이다.
되든 안 되든 꼴아 박아보는 게 내 마법사로서의 신조라 할 수 있다.
순식간에 비어있던 내 손위로 축구공만 한 화염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페르세르크는 좀 전까지만 해도 미쳤다고 외치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쩌적!!
과부하 된 서클에서 삐걱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번외 서클은 타이밍이야, 데이비. 뒤지기 싫으면 내 말 잘 새겨 두는 게 좋을걸?]
그 성질 더러운 마법 스승 오딘조차 조심히 다룰 정도로 예민한 마법이다만.
그 히스테리가 터지는 순간 화력은 보장 못 한다.
본래 서로 기어가 맞물리듯 회전하며 고출력의 마법을 시동하는 방식과 다르게 이것은 역회전하는 서클끼리의 반발력을 이용한다.
정확한 이론상으로 따지면 서클의 개념을 메기는 게 의미 없는 공격 방식이기도 했다.
2서클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고. 9서클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숙련도가 따라붙으려면 어지간한 서클론 어림도 없겠지만 말이다.
-데이비? 뭔가 심상찮은.......
쿠우웅!!!!
아니나 다를까.
내 존재를 눈치챈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구나, 어떻게 여의 시선을 속이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의문이다만. 여가 그리 우습게 보였더냐."
"말은 잘하네."
"네가 어떤 방식을 쓴다 한들 여가 만든 결계를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거대한 나무줄기가 바닥에서 솟아오르며 모습을 드러낸 세계수는 나긋한 말투였지만 상당히 날이 서 있었다.
"됐고. 네가 아끼는 엘프들이나 지키는 게 좋을 거다."
네가 막지 않으면 수만에 달하는 엘프들 모조리 몰살엔딩이니.
담담하게 말한 나는 과부하 된 마나를 그대로 끌어 올렸다.
어지간한 8서클 원소 마법으론 결계를 부수고 놈에게 타격을 주는 게 힘들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주작, 불닭이를 소환하지 않았다. 녀석은 아직 세계수의 눈에 띄면 안 되니 말이다.
결국, 상성 하위에 있는 마나만으로 결계를 박살 내야 한다는 소리인데
상식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질문을 던진다면 평상적인 방법으론 힘들다고 답하리라.
다만.
그 평상적인 방법이 싫어서 멋대로 마법을 개조했던 스승 밑에서 마법을 익힌 내가 배운 것은 무식한 실험 정신이고.
이건 제법 내가 고평가하는 상위 마법 중 하나다.
실패하면?
다 같이 날아가는 거지.
화르륵!!
내 손에 피워 올려진 축구공 사이즈만 한 화염구를 보며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차갑게 조소했다.
"고작 그 정도의 힘이로구나. 어디 날뛰어 보아라, 여가 그 재롱을 기꺼이 지켜볼 터이니."
"재롱인지 재앙인지 구분도 못 하나?"
"뭐라?"
화르륵!!
서서히 회전하는 화염구로 빨려 들어가는 마나가 평소의 양 이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데이비! 파이어볼에 과도한 마나를 넣으면 그 자리에서 폭발......!
급히 소리치던 페르세르크가 눈을 크게 떴다.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화염구가 새하얗게 변하며 터지지 않고 더욱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이그드라실의 눈동자 부분이 크게 뜨여진다.
"대체 그건 무슨......."
단순한 파이어볼이라고?
"내가 가진 원소마나를 최소한의 양만 남기고 모조리 때려 박았으니 꽤 아플 거다."
내 말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이그드라실이 거대한 나무줄기를 뽑아 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나무줄기들이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륀느의 고열광선이 앞서 이그드라실의 공격을 모조리 차단해버렸다.
[8서클 역회전]
[폭염계 파이어볼]
[화이트 노바]
짜드드드드드득!!
순식간에 한 개의 소형 태풍이 된 백염구체가 하늘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나를 공격하던 이그드라실이 공격 대상을 급히 화이트 노바로 바꾸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나는 백염구체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초월의 종언을 휘둘렀다.
"커져라. 뚝딱."
새하얀 재앙 덩어리가 거대한 운석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공간 자체를 불태우며 낙하하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