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2권 11화
99. 마탑 학회.
한참 동안 이동해 아무도 없는 곳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그녀를 천천히 내려주었다.
털썩!
제대로 설 힘조차 없는 것인지 그대로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나는 곧 나를 올려다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대체 무슨 일이......"
"네 발을 봐."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치마를 걷어 제 발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선명하던 그녀의 발은 어떻게 된 건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사람의 몸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오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나."
항원이 들어오면 인간의 육신은 자연스레 항체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즉.
세상의 규칙을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신의 의지와 세상의 규칙은 별개의 존재.
신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이 규칙이라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는 별개의 무언가다.
"그렇다면......저는......"
"그래, 잊히는 거다. 내가 말했지, 후회할 거라고."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검게 죽어갔다.
저도 모르게 자신들의 일행에 정이 든 것일 터다.
그녀와 그 일행들은 분명 그녀의 세상에선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였지만 반대로 이곳에선 그녀와는 일면식도 없는 아직 경험 미숙한 이들일 뿐이었다.
"그럴 수가......그럴......"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에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네가 여기 올 때부터 대충 예상했던 거, 아니었나?"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걸......이런 결과를 원하진......우웁!"
그리고. 그녀는 발작하듯 일어나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안아 든 나는 곧장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고 그녀를 침대에 뉘인 뒤 그녀의 곁에 앉았다.
"......"
침대에 누운 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육신은 문제가 없다만, 정신이 슬슬 흐릿해질 거다. 서 있는 것도 힘들 거고."
"저는......이제 죽는 건가요."
"그래."
담담한 내 말에 그녀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한참 동안 웃어 보이던 그녀는 곧 천천히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죽고 싶지 않아......"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녀에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그녀가 잃어버린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잊혀지고 싶지 않아요......."
"다들 그래."
"당신도 저를 잊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치워 냈다.
손을 빼낸 그녀의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왜......이제 와서......"
"후회할 짓이지? 다 부질없지? 복수가 허망하지? 쓸데없는 복수를 한답시고 날뛰지만 않았으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제법 오래 살았을 텐데."
내 말에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네는 무슨 얼어 죽을 네야, 누가 네 뺨을 치면 그놈 강냉이를 다 뽑아야지."
넌 성자나 성녀가 아니잖아?
내 말에 그녀가 천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잘했다."
"더 살고 싶어요......죽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내게 안겨왔다.
"제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두 시간 정도?"
"저를 품어주세요."
그녀는 점차 힘겨워했다.
"모두가 저를 잊어도 저는 잊고 싶지 않아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신은 내게 빛을 보여주었어."
차라리, 혼자서라도 행복한 꿈을 마지막까지 꾸면서 갈 수 있게.
"짧은 시간이지만 제게 그런 빛을 보여준 걸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더욱더 내 품에 파고드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당신이 나를 잊기 전에......"
이제 이 영지에서, 혹은 대륙 전체에서 용사 레이나의 존재는 모두 잊혔다.
아마 조만간 그녀와 그녀의 일행이 일궈낸 업적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리라.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자 그녀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올곧으시네요, 고마워요.......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나를 기억해줘서."
그녀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 팔을 잡았다.
"비록 모두 잊을지라도 저는 당신을 기억할 거에요. 당신이 주신 소중한 윤회의 기회가 있다고 해도."
영원히, 이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내가 조용히 그녀의 이마를 쿡! 하고 밀어버렸다.
반사적으로 침대 위에 밀린 그녀가 그대로 드러누워 버리자 내가 감동에 찬물을 끼얹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뭔 개소리야."
그녀의 표정은 조금 얼빠진 것처럼 변했다.
"네?"
"나는 망각을 못 해."
내 답변에 그녀는 침묵했다.
"지우고 싶어도 못 지운다고."
섭리에 따라 그녀가 없는 존재가 되어, 나는 단 하나도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저주였고, 고통이나 다름없다.
이윽고, 눈을 감고 있던 내가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아마 평소 붉은색이던 내 눈동자는 지금 푸른빛을 머금고 있으리라.
"살고 싶나?"
내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 굉장히 잔인하네요. 그래......살고 싶으냐고요......"
조용히 침묵한 그녀가 결국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죽기 싫어......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요."
이제야 좋은 삶을 찾았는데. 행복한 삶이 이렇게나 좋았는데.
이렇게 잠깐 느끼고 가기엔 그 행복을 향한 갈망이 너무 커졌다.
"그러면 이 악물고 버텨봐."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그녀가 누운 침대 전체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절대로 잊지 말라고. 혹시 아나? 기적이라도 내릴지."
"아무에게나 내리면 기적이 아니겠죠....... 어쨌거나, 고마워요. 만약, 제가 당신을 기억한다면, 그땐 당신에게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빙그레 웃는 그녀의 육신이 서서히 빛으로 화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그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곳에서의 저는 당신과 친우 사이라고 하였나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발뒤꿈치를 들어 내 뺨에 자신의 입을 살짝 맞추고는 샐쭉하니 웃어 보였다.
"저를 잘 부탁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완전히 빛이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그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엔 작은 빛무리만이 남았고.
모두의 기억에서 그녀는 잊혔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살릴 순 없다.
섭리에서 벗어난 건 내 몸과 내 영혼이지 레이나가 아니니 말이다. 그녀는 섭리에 따라 수명을 다 사용했고.
그렇게 사라졌다.
유일하게 나에게만이 그녀에 대한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아마 모두가 이날 이때를 기억하는 일은 없으리라.
제법 짜증 나는 상황이지만 나는 묵묵히 그녀가 사라지고 남은 빛의 덩어리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스스로 빛을 뿜는 영롱한 백색의 돌이었다.
단순 보석이 아니라.
영혼이 굳어서 생긴 결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소멸한 줄 알겠지만.
숭고한 희생을 치른 신성한 영혼이 남기는 파편이라고 하였던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흔적을 남겼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기억하는 존재가 단 하나라도 존재하고, 그녀가 살고 싶다는 마지막 미련을 끝내 떨쳐내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마법의 효과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9서클]
[대 법칙계]
[라플라스의 열쇠]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딱 한 가지. 다른 방법을 닉스와의 싸움에서 찾아냈다.
-음? 데이비, 무슨 일이 있었기에 표정이 그러는 게야?
"별거 아니야."
다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다.
만약 그때까지 살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유지한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내가 널 구원해 주마.
주신이 내게 굳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써서 거래를 해온 이유는 뻔했다.
그리고, 나 또한 구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기에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편이고.
동시에 활성화 시켜두었던 상태창에서 가련한 자의 마지막 구원에 관한 항목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레이나가 사라진 후 페르세르크는 물론, 륀느 조차 레이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세상은 평소처럼 굴러갔고. 그녀가 남긴 업적은 단순히 내 손으로 해결된 것처럼 남아버렸다.
덕분에 더욱 귀찮아지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애초에 신과 소통하는 성자라는 입장에 있는 이상 괜한 의혹은 따라붙지 않았다.
웃긴 일이었다.
마치 하룻밤 꿈을 꾼 것처럼 이렇게 말끔하게 한 사람에 대한 흔적이 깡그리 사라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오라버니, 마탑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율리스님이에요."
적탑의 최연소 장로. 레이나와 비슷한 연배로 천재이면서도 겸손하고 제법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호감형의 사내였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연락을 한 것이다.
"마리아 공주님과 타냐 언니는 달의 숲으로 갔어요. 두 사람 다 활을 좋아하니까. 엘프의 궁술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유리아님이 두 분을 정식으로 초청했다고 들었어요."
바리스는 왕명을 받들고 처음으로 국정을 결단하기 위해 왕궁으로 떠났다.
남은 것은 윈리 하나뿐이었지만 윈리 또한 적절한 타이밍에 초대를 받았다.
"세상에!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해요. 오라버니. 저, 적탑에 다녀올게요."
그녀의 말에 서류를 빠르게 처리해나가던 내가 손을 멈췄다.
"적탑이라고?"
"네. 율리스님이 학회에서 이번에 정식 논문을 발표한다고 해요. 거기에 저도 초대받았어요! 세상에 꿈만 같아요! 그곳은 마법사 중에서도 쟁쟁한 인물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일단 저래 보여도 윈리는 4서클의 마법사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마법에 관한 항목에 한해선 관심이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마침 잘됐다."
책상 한편에 놓인 약품에 담긴 살점 덩어리를 노려보던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탑에 의뢰할 게 있거든. 직접 데려다주마."
적탑은 거리가 멀지 않지만, 이쪽도 직접 의뢰를 해야 할 것이 분명 있었다.
그냥 이곳에 있는 적탑 지부의 마법사를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지금 부탁을 던지려는 인간은 적탑의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헬리슨 발레스티아.
7서클의 대현자라 불리는 적탑의 마법사였다.
그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적어도 지금 내가 이 망할 심연의 생물체를 가지고 하려는 짓에 필요할 재료 정도는 가지고 있으리라.
"오라버니께서요? 뭐......상관은 없지만요. 마침 편지에도 오라버니께서 관심을 가지신다면 꼭 좀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있었어요."
편지를 휙휙 흔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는 윈리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학회란 말이지......"
"정말 기대되지 않나요?!"
눈을 반짝이며 동조를 요구해오는 윈리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뛰어난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 지식을 논하고 갑론을박하는 학회.
대륙 마탑 중 세 곳에서 참석하는 그러한 거대 행사이며, 마법의 극한. 혹은 정수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니까......
재롱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