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2권 12화
"아저씨!"
유리아의 품에 안겨있던 뮤우는 내 손을 잡고 자박자박 걸어가던 청단이와 홍단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가 그대로 내게 달려와 안겨들었다.
하프엘프 뮤우는 아직 성년이 아닌 어린 엘프다.
그렇기에 자주 달의 숲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그 때문일까.
굳이 달의 숲에 잘 들어가지 않는 나로 인해 뮤우는 그동안 상당히 나를 그리워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달의 숲에서 자연 재배되는 최상위 품질의 달의 풀 잎사귀가 필요해진 터라 직접 들르면서 만나게 된 것이다.
"아저씨! 나빠! 뮤우 보러 온다고 했으면서! 친구라고 했으면서!"
내 품에 안긴 채 마구 가슴을 두드리는 녀석의 솜 주먹에 나는 말없이 녀석의 뺨부터 손을 쓸어 올려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하다. 그동안 잘 지냈지?"
"흥!"
자신이 삐졌음을 온몸으로 나타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쿠키 상자를 꺼내 뮤우에게 보여주었다.
"아저씨가 선물 가져왔는데."
"서...... 선물!"
눈을 반짝이며 손을 뻗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내가 고민하는 척을 하자 뮤우는 곧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아저씨 나빠......"
"장난이야. 자 받아. 친구들하고 나눠 먹어야지?"
내 말에 상자를 받고 내게서 내려온 뮤우가 후다닥 달려가더니 청단이와 홍단이에게 다가갔다.
"유리아."
"말씀은 먼저 전해 들었어요. 이곳에서 자라는 달의 풀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래. 의도하진 않았지만, 양이 상당히 많이 필요해."
"실례지만 영지에서도 상당히 많은 양의 달의 풀 잎사귀를 재배하고 계신 거로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 부족하신가요?"
엘프의 입장에서 웬만해선 자연적으로 자라는 정령의 보금자리에 손이 가는 것을 달가워할 순 없었다.
"거기서 자라는 것만으론 안 돼. 달의 빛을 제대로 받은 이곳의 잎사귀가 아니면 불가능해."
내 말에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영지에서 재배하고 있는 달의 꽃과 이곳에서 자생하는 달의 꽃은 조금 다르긴 하죠. 달의 풀 잎사귀는 수많은 마법 시약, 혹은 도구의 촉매가 되기도 하죠, 헌데......무슨 이유로......"
그녀의 말에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현자의 돌 레플리카를 만들 거다."
현자의 돌은 레플리카조차 현재 내 준비물로는 힘들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등가교환이라는 절대 법칙을 개 무시하는 게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생각보다 위험한 모험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 말에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얼마나......필요하시죠?"
"여기 양으론 불가능해. 신목의 성지 쪽에서도 상당수 빌려올 거다. 너무 많이 따면 정령들의 힘이 약해지니까."
정령들의 힘이 약해지지 않고 달의 정원이 유지되는 선에서 가져갈 수밖에 없다.
"신녀 에밀리아와 알에게도 벌써 연락을 보내놨어. 에밀리아가 직접 온다고 하더라."
"세계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면 저는 따를 뿐이에요."
어지간해선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알 또한 나와 같은 비슷한 케이스의 운명을 보는 거목에 속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고 내게 협조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알은 전대 세계수와 다르게 상당히 개방적이니 말이다.
"아저씨! 아저씨!"
그때 뮤우가 후다닥 뛰어와 내 품에 안겨들었다.
쿠키를 얼마나 열심히 먹었는지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붙어있기에 나는 말없이 녀석의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떼어내 주고는 물었다.
"맛은 있었어?"
"응! 엄청 맛있었어!"
해맑게 웃는 그 모습을 보니 없던 것도 만들어서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뮤우. 아저씨가 선물하나 해줄까?"
"선물?"
"그래. 하고 싶은 게 있어?"
내 물음에 뮤우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앙증맞게 고민했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뮤우가 하고 싶은 거......으음......아! 있어!"
눈을 반짝인 녀석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망설임 없이 내게 말해주었다.
"뮤우! 공부할래요! 인간들은 아카데미라는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다고 들었어요! 뮤우도 공부할래! 공부해서 아저씨 곁에서 일할 거야!"
처음 정령을 소환해준다 하였을 때도 노아스가 보고 싶다 말하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이니 이 정도면 제법 소박하고 스케일이 작은 소원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다라......"
"뮤우는 하프엘프이니까요. 엘프의 삶도, 인간의 삶도 모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에요."
"뮤우는 커서 꼭 아저씨랑 같은 일을 할 거야!"
유리아의 해명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듯 가만히 침묵했다.
학교라......
* * *
학회가 열리는 곳은 적탑의 본 지부 레드리아가 있는 마법 도시, 린드홀이었다.
당연 마탑 중에서도 엄청난 위세를 지니고 있는 불의 마법을 연구하는 기관. 적탑 레드리아가 있는 만큼 린드홀은 대륙 내에서도 유명한 마법 도시 중 하나였다.
겉보기에도 아름다운 외관에 거대한 마법 구조물들이 가득해 실제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대도시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이 린드홀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바로 커다란 호수의 위에 지어진 도시라는 점이었다.
평원에서 이어진 거대한 다리는 린드홀에 대한 아름다움을 향한 기대치를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다그닥 다그닥!
두 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가 린드홀의 입구에 도달하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깔끔한 로브를 입은 마법병단이 천천히 손을 뻗어 마차를 제지했다.
"어디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라운왕국, 하인스 영지에서 왔소이다. 1왕자님이신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과 2왕녀님이신 윈리 올 라운님이시오."
기어코 마부로 따라나선 이는 다름 아닌 이전에 내가 블랙마켓에서 구해냈던 수인남성 중 하나였다.
멧돼지 수인인 그는 본래 말을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그 덕분에 자신을 마부로 쓰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어필한 바가 있다.
"확인되었습니다. 마법 도시 린드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손에 쥔 간이 마법 방출봉을 치우며 문을 열어주자 도시의 내부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와아......"
눈을 빛내며 푸른 빛의 아름다운 도시를 바라보던 윈리가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저걸 봐요! 린드홀의 명물인 수체에요!"
윈리가 가리킨 것은 도시의 중벽 너머 보이는 거대한 탑과 그 탑의 꼭대기에 거대한 집게발로 유지되고 있는 투명한 물의 구체였다.
그 크기가 무려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구체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관을 통해 계속해서 물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물의 정화 시스템으로 저 거대한 투명의 구체 속에 담긴 물이 도시의 식수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시설이기도 하다.
"오라버니 알고 계세요? 저 수체는 이곳 린드홀의 심장이라구요. 저게 있기에 도시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동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적탑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윈리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자잘하게 듣고 모두 내게 알려주었다.
일단 공식적인 초대이기에 적탑 산하의 고급 숙소로 이동한 내 시야에 익숙한 사내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평소보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로브의 한쪽엔 장로를 상징하는 문양이 양쪽으로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적탑의 최연소 장로답게 율리스의 곁엔 그의 수행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이 조금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율리스님!"
윈리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어흠!"
그때 율리스의 곁에 있던 수행 마법사들 중 하나가 불편한 헛기침을 흘렸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가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율리스 중앙장로님은 적탑의 장로이자 전 마탑의 장로회 일원이 되셨습니다. 아무리 지인이라곤 하나......"
"괜찮습니다. 콜린."
"장로님,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장로님께선 이제 적탑 뿐만 아니라 전 마탑에서 선발된 중앙 장로회의 일원이십니다."
"제가 괜찮다지 않습니까."
율리스가 짐짓 불편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단호히 말했다.
"하오나 장로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탑의 체면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으셔선 곤란합니다."
그의 말에 윈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중앙 장로회라는 자리 때문인지 쉽게 말을 못 꺼내고 있었다.
거기서 따져본들 곤란해지는 건 율리스일테니 말이다.
"이분들은 제 친우이십니다. 만약 한 번만 더 제 친우분들을 모독하는 행동을 하신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그가 윈리를 향해 쓰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윈리님."
"아......아니에요."
그런 그의 사과에 윈리가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비가 올 거 같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조용히 중얼거린 내 말에 율리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렸다.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지요."
빙그레 웃는 내 미소에 율리스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하......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시오. 데이비님. 아! 이럴 게 아니라 가시지요. 학회는 내일 시작되지만, 오늘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걸어가며 말했다.
"헌데....... 데이비님은 다른 용무도 있으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내 대답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날 사람이요?"
"예, 적탑의 대 현자이신 헬리슨 발레스티아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내 말에 수행 마법사의 눈에 불이 튀었다.
"실례합니다만......혹 왕자님께서는 미리 연통을 넣고 오셨는지요."
"일단 초대장은 받았네."
담담한 내 답변에 그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호가호위 같으니라고.
"대 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님은 일국의 국왕이라 하여도 그렇게 마음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물며......"
"콜린!"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는 그의 언행에 결국 율리스가 눈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제지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서로 곤란해지니까 참아야 한다는데.
나는 모르겠고.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면 저놈은 자신이 옳았다 판단할 상이 분명하다.
"그대의 이름은?"
내 물음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콜린 버밀스 4급입니다만."
"그래, 콜린, 대 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님이 일국의 국왕이라도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이라고."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왕자님이라 하여도 제대로 된 절차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말을 무시한 내가 그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비 온다. 산성비는 모근을 아작내는 데에 아주 좋은 효능이 있다더라."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네 머리에 내가 뭘 심어 넣었는지 너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땅속에 심어진 씨앗이 빗물을 먹고 성장하는 것처럼.
아주 신나는 결과를 보게 되리라.
괜히 손을 대서 머리의 모양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
남김없이 뽑아버리는 것.
그 말과 함께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조금 특별한 비가 되리라.
갑자기 쏟아지는 보슬비에 주변에서 난리가 났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성력으로 나와 윈리, 그리고 율리스를 감싸고는 말했다.
"특수한 직위에 있는 이는 알현권이 있지요."
고개를 돌린 내가 천천히 말했다.
"내기는 내기지요, 게임판 받으러 왔습니다."
대 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님.
동시에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좀 전까지 없던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대 현자님!"
노인은 제법 놀랍다는 표정을 한 채 허허로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허허, 이거 참......이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어디까지 간파당한 겐지.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가."
"평범한 할아버지께서 보통 그 정도로 방대한 마나를 몸에 품고 다니시진 않으시지요."
빙그레 웃으며 내가 답하자 그가 껄껄 웃어 보였다.
"성자 정도 되면 그런 것도 보이는 모양이로군, 어찌 되었건 잘 왔네. 데이비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