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3권 10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숨을 죽이고 레이나를 지켜보았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완전히 색이 변해 말끔한 백발이 되었음에도 전혀 나이 들어 보지 않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등 뒤에 돋아난 날개는 언제라도 펼쳐져 날아오를 것 같았다.
-안된다니?
"벌써 깨어나면 안 되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내가 륀느를 불렀다.
"륀느, 빠루."
"이해 불명. 하지만 명령 수행."
내 말에 륀느가 의아해하면서도 빠루를 구현해 내게 내밀었다.
-데이비?!
이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게 하려다가 멈췄다.
"으......으음......더, 더는 안 돼."
우물우물 중얼거린 그녀가 고요하게 침묵한다.
"휴. 말아먹을 뻔했네."
이에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빠루를 다시 륀느에게 던져주자 페르세르크와 륀느가 동시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데이비님, 어째서 공격수단을 취해?"
-레이나를 방금 부숴버리려 했지. 그대.
"지금 깨어나면 안 돼. 조정도 안 되어있는데 깨어나면 큰일 나지."
아직 그녀가 깨어나기엔 조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에 가장 큰 문제점은 다름 아닌 세상의 규칙에 의한 그녀의 존재 말소.
아무리 심연의 힘이라도 거대한 규칙 자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순 없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레이나에게 해둔 것은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객체는 네가 말소하려 했던 레이나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각성해버린다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바에 차라리 육신을 부수고 다시 만들어야지."
-사이코패스야?
"조금 극약 처방이긴 해도 이렇게 안 하면 살릴 수가 없잖아."
풍덩!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산소마스크와 비슷한 장치를 설치한 뒤 시험관에 밀어 넣은 나는 양손을 모았다.
기도문은 모르겠고, 마음가짐 자체는 제법 경건하다.
[수리수리 마수리.]
[7위계 성마법]
[생츄어리]
간이 성역 마법으로 일대를 신성화시키는 것으로 그녀의 육신을 안정화한다.
신성화된 영역 내에서 서서히 안정되었는지 몸을 아주 옅게 뒤척이던 레이나가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잠들었다.
-그럼 언제 깨어나?
"조만간 깨어나겠지, 그런데 당장 수술 직후는 아니야. 짧으면 며칠, 길면 한 달."
-큰일 하나 해결했군.
"일단은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지켜보자. 네가 좀 신경 써줘."
-단순한 감지 정도라면야.
레이나의 육신에 영혼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이제는 나머지 봉인석을 쓸 때가 온 것이다.
페르세르크는 내가 뱀파이어들이 만드는 육신 자체에 상당히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함부로 육신을 부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육신에 그녀가 들어가는 순간 마왕 페르세르크로서 그녀는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에 맞춰 내가 되었건 누가 되었건 대적자가 태어난다.
내가 피할 수 있는 범위의 흐름은 대적자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이지 그녀가 마왕으로 태어나서 내가 대적자가 되지 않는다는 선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레이나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은 일단 괜찮은 상황이었다.
"거의 완성했어요."
집무실로 돌아온 에오니샤의 말에 나는 하던 것도 멈추고 녀석이 가져온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손목에 끼우기 딱 좋은 형태를 지닌 시계였다.
"어디 보자."
녀석이 건네준 시계는 에오니샤의 구상과 드워프들의 기술력이 접합되어 만들어진 걸작이었다.
마냥 대단한 물건이냐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답하리라.
품질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만든 시계는 어디서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발명품은 누가 손을 대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다.
그런 점에서 에오니샤의 시계는 후자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존재해요."
우물쭈물하며 녀석이 풀이 죽은 얼굴로 답했다.
"문제라......, 이걸 볼래?"
그리 말하며 나는 작은 상자 속에 담긴 금속 덩어리들을 보여주었다.
"그게 뭐죠? 처음 보는 건데......"
"마나 순환석이라는 거야. 마나석과 다르게 힘을 충전하고 대량의 힘을 유동시킬 순 없지만."
"아......"
"내구성만 멀쩡하고 주변에 마나만 있으면 작은 에너지 정도는 상당량 유지할 수 있는 거야."
"설마......"
"물론, 이 금속 자체가 내구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 몇 달 정도 쓰고 나면 버려야겠지만."
내 말에 에오니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그런 물질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 내가 만든 건데 남들이 알까."
그 말에 에오니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렇게 단기간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요?"
"굳이 이걸 만든다고 예고하고 만들어야 하나? 이 정도면 충분해?"
"충분해요! 정말 사랑해요. 오라버니!"
"그래, 사랑까지 할 건 없고."
"흡!"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에오니샤가 기겁한 얼굴로 내게서 물러났다.
워낙에 기뻐서 내뱉은 말이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인지한 것이다.
"그, 그게......말이 헛나와서......죄송합니다......."
다급히 외치는 녀석은 당장에라도 내가 화를 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귀여워라.
나긋나긋한 눈매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페르세르크가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어 하자 나는 재빨리 녀석을 내보냈다.
"자, 내가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직접 해봐야겠지? 기술자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건 네가 할 일이니까. 부디 좋은 결과 내길 바란다."
"네!"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부리나케 답하고는 후다닥 뛰어 사라져 버리는 녀석을 뒤로한 채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계약서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자, 그럼 공돌이 갈아 넣어서 벌어들인 돈을 갈퀴로 긁어볼까."
서류 내에는 한 상단과의 독점 계약서가 들어있었다.
에오니샤가 만든 시계는 손목시계로 내가 만든 마나 순환 전지를 이용해 동력을 공급받아 시침과 분침, 초침을 돌려주는 작은 시계였다.
보통 시간을 알기 위해선 해를 보거나 거대한 시계탑을 이용하거나, 그 외에 마법 아티펙트를 쓰곤 한다. 굳이 그 이외에 이런 값싸고 편리한 시계를 만들 기술도 부족하거니와 그렇게 할 필요성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누구든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즉 고객층의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평민, 용병, 상인, 이외에 자잘한 곳에 돈을 쓸 여력이 없는 기사들까지.
"뇌물은 받아먹을수록 맛이 좋아."
독점 계약서 한 장을 따내기 위해서 어디 개처럼 굴러보라지.
재주는 에오니샤가 구르고 돈은 내가 챙긴다.
내 음흉한 미소에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륀느와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대뜸 찌푸려졌다.
* * *
"신상품을 만들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뭐 같니? 에오니샤."
내 질문에 품에 작은 상자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에오니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장......중요한 거요? 음, 완성도?."
"땡."
"그럼 물건을 쓰는 사람들을 향한 마음 같은......"
"뭐라는 거야, 네가 자선사업가라도 되냐?"
"그, 그럼 물품의 문제를 되짚어보는 반성의 시간을......"
"땡."
모조리 틀렸다 단언한 나는 녀석을 대동한 채 영지의 거리로 나갔다.
에오니샤는 그런 나를 말없이 따라오며 그저 의문스레 지켜볼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이걸 딴 놈들이 날름해 먹지 못하게 침을 발라두는 거야."
흔히 말해서 판권 독점이라는 거다.
지구에서 좋은 시스템이 있지 않았는가.
특허라고.
"네가 만든 건 연금술 학파 쪽에서 특허를 따낼 수 있거든. 마침 하인스 영지에 가장 거대한 연금학파의 지부가 있으니까. 그리로 가자고."
내 말에 에오니샤는 조금 떨떠름하게 걸음을 옮겼다.
"뭔가...... 굉장히 세속적인 느낌인데요."
"꼬맹이가 그런 것도 아냐?"
"저도 교육을 받은 왕족이에요."
무시하지 말라며 불만을 표하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어이구! 어서 오십쇼!"
갑작스런 내 방문에 연금학파 베르실의 지부장인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안 그래도 이곳의 마탑이나 연금학파, 혹은 상단관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VVIP 고객은 내가 될 테니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직접 찾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반갑습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어이구!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해두었습니다! 자! 어서 드시죠! 절대 실망하지 않을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허겁지겁 들어가는 지부장을 보며 내가 에오니샤를 향해 말했다.
"봤냐? 이게 갑의 위치라는 거야. 넌 지금부터 갑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거다."
"그게...... 제가 연금술이나 공학을 배우는 데 중요한가요?"
"연구에 뭐가 들어가는지 잊었냐?"
"......돈......."
"그렇지. 영특하다."
-애한테 좋은 걸 가르치는구만.
혀를 쯧쯧 차는 페르세르크는 아직 모른다.
갑질이라는 게 적정선에서 지르면 내 입지가 올라간다는 걸 말이다.
연금학파 베르실의 지부장은 마치 부대를 방문한 사단장을 본 대대장 마냥 상당히 저 자세로 나를 맞이했다.
"하하, 준비가 미흡해서 죄송합니다."
말은 저러하지만, 최고급 차에 최고급 응접실을 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금학파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얼굴에 잔뜩 긴장감이 어린 것을 보면 내가 들어오기 전 얼마나 쪼아댔는지를 알 정도이기도 했다.
"하하. 누추한 곳이라 영 부끄럽습니다."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하지요. 오히려 환대가 과분할 정도입니다."
"하하하! 응당 해드려야지요! 헌데, 어인 일로 발걸음을......,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호출하시면 직접 찾아뵈었을 텐데요."
"굳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어서 말입니다."
"흐음."
내 말에 그의 눈에 복잡한 심리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에오니샤를 데려와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녀석은 곧 품 안에서 꺼낸 작은 상자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 물건이 정확히 어디에 쓰이는지를 알아본 지부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결국, 연금학파도 장사치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