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6화
123. 사라진 공주
놈을 제압하는데 죽을뻔한 사실은 어느 정도 반성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익숙하다는 이유로 안일한 싸움을 하다가 허를 찔린 횟수도 제법 된다.
싸움 자체는 그리 길 수 없었다.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그야말로 상남자 식 힘겨루기를 했으니 말이다.
메가로드리아는 본래 이렇게 무식한 싸움을 그리 선호하는 환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놈의 상황, 그리고 놈의 이성이 현재 반쯤 마비된 것.
그 외에 여러 요소를 고려했을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딱 한 가지였다.
놈을 소모전이 아닌 한방 전으로 몰고 가자고.
소모전으로 가는 순간 회복속도가 더 빠른 놈이 유리해진다.
그리하면 처음 한 방 먹인 게 큰 의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메가로드리아를 덮은 빛이 사슬처럼 변하며 그를 카드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성이 반쯤 날아가 버린 놈은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들어 가버렸다.
스르륵…….
동시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카드가 다시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변하며 내 손으로 돌아온다.
카드를 잡은 손에 칼날로 스친듯한 상처가 계속해서 생겨났지만, 절대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잡았다.
스르륵…….
이윽고.
이내 놈의 저항이 사라진 듯 카드의 떨림과 손을 찢어발기던 날카로움이 사라졌다.
“후…… 한 마리 잡기 힘드네.”
당장 이놈을 가둔 게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메가로드리아는 이런 카드로 계약해서 가둬놓고 사육할 큼 녹록한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용왕님, 조금만 참아. 내가 풀어줄 테니까.”
카드에 대고 조용히 말한 나는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시야를 가리기 전에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카드를 바닥에 휙 던지고는 두어 차례 짓밟아버렸다.
“아오! 망할 도마뱀 새끼. 얌전이 좀 쳐 잡힐 것이지 반항질이야.”
괜한 화풀이를 하니 카드가 미묘하게 반항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너무 격했나 싶은 생각에 말없이 카드를 집어 들고 툭툭 털어낸 나는 카드의 앞면에 그려진 거대한 존재의 그림을 흘끗 보고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서너 개 뽑았다.
“훅!”
그리고는 도력을 불어넣어 휙 불자 얼마 남지 않은 힘이 서로 나뉘며 서너 명의 분신체로 만들어졌다.
지금 꼬락서니로 봐선 전투능력은 높진 않겠지만, 그놈을 찾는 데엔 충분하다.
심연에서 넘어온 무언가로부터 힘을 얻은 존재 콜로서스 그리암을 말이다.
메가로드리아는 누군가에게 제압당해있었다.
그리고 그는 콜로서스 그리암에게 종속된 모습도 보였다.
그가 타차원으로 가서 메가로드리아를 제압하고 왔다?
어림도 없는 소리.
화이트노바가 터지고 섬과 바다 일대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을 때 다른 모든 이가 먼지처럼 사라져버렸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본인의 힘이 아닌.
익숙할 정도로 구역질 나는 심연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그놈의 심연.
이미 심연과 이 세상을 잇는 균열이 발생한 것은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넘어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몇 차례 헤라클래스의 힘인 금기의 업보를 이용해 규칙을 뒤틀고 그것을 검기로 만들어 놈에게 쏘아 보내본 결과.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
이전 ‘현’ 국에서 고대 유적을 찾았을 때, 스승이었던 헤라클래스의 클론으로 보이는 존재를 만났던 건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콰앙!!
“으아아아악!!”
멀리서 겁에 질린 비명과 폭발음이 들려온다.
‘거기 있었구나!’ 싶은 마음에 절뚝거리는 다리를 강제로 회복시키며 나는 천천히 나아갔다.
* * *
콜로서스 그리암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을 보호해주는 장막만을 믿고 덜덜 떨고 있었다.
그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진 못했는지 당황한 감정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를 포위하듯 감싸고 있던 내 분신들은 힘을 다하고 서서히 흩어지며 머리카락으로 사라졌다.
아이고, 내 소중한 머리카락.
잊지 않고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불태워버린다.
다음 생엔 꼭 두 가닥으로 태어나서 내 머리를 더 풍성하게 해다오.
회랑에서 몇 번 탈모 저주에 걸려본 경험상,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저주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콜로서스 그리암.”
이윽고 내가 그를 천천히 부르자 그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내 물음에 그가 바들바들 떨며 소리 질렀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대체 내가 네놈에게 무엇을 했다고!”
“뭘 하긴. 네가 시켜서 우리 마왕님을 건드렸는데 더 할 말이 필요한가?”
숨김없이 말하는 내 모습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역시! 네놈의 곁에는 마족이 있었구나!”
“그래서.”
“……”
“이제 와서 깨끗한 신자인척하겠다고?”
담담하게 말한 내가 그를 보호하는 장막을 또 한 번 후려쳤다.
“거짓 계시로 수많은 인간을 죽여놓고 네가 남을 평가할 자격이 있나?”
“마족을 비호하는 이상 네놈의 말은 무가치한 괴변일 뿐이다!”
“마족이 모시는 신도 프리아 여신이야 개자식아.”
콰앙!!
“흐윽!”
기겁하는 그를 향해 나는 주먹을 또 한차례 내리쳤다.
쾅!! 쾅!쾅!!
계속되는 굉음과 함께 금이 가 있던 단단한 방어막이 계속해서 일그러졌다.
주먹이 내려쳐 질 때마다 그는 비명이란 비명은 다 지르며 눈을 감고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를 보호하는 장막 때문에 그도 밖으로 도망치지 못했다.
쾅……!
이윽고 손에 피가 잔뜩 묻을 정도로 계속되던 공격이 멈추자 그가 화들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말없이 회색빛의 장막과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이놈!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이 장막이 부서질 것 같으냐?! 이건 강화 장막이다. 이놈!!”
“……”
“곧 내 주인께서 나를 구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공주님께서 오신다면! 네깟놈이 문제겠느냐!”
그의 외침에 나는 곧 생각을 접었다.
역시, 이 힘은 오로지 헤라클래스의 금기 업보를 이용해 규칙 일면을 뒤틀어야만 타격이 가해지는 방식이었다.
스르르륵…….
동시에 검은 기류가 아주 미약하게 내 손에 머금어지기 시작하자 소리 지르며 광소하던 그가 움찔거렸다.
“아직 한방 더 남았다.”
콰앙!!!
여전히 똑같은 파괴력이다.
하지만 효능은 확실했다.
헤라클래스의 힘은 다른 곳을 떠나서 신과 심연에 아주 치명적이다.
그 결과.
버티고 버티던 장막은 결국 깨어져 버렸고, 보호해줄 힘을 잃은 콜로서스는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도망치려 버둥거렸다.
그런 그의 멱살을 틀어잡은 채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단 심판관들이 불을 참 좋아하잖아. 안 그래?”
“사, 살려줘!”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를 좀 물을 거야.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아. 알기 때문에 메가로드리아를 그렇게 부려먹은 거겠지.”
담담하게 말한 내가 그를 바위에 밀어붙이듯 처박았다.
그리고는 내공을 불태우듯 끌어올렸다.
[삼매진화]
[흑마법 저주의 낙인]
[병합기]
[심문의 불]
니들 불 좋아하잖아? 안 그래?
“끄, 끄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 그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확실히 이놈의 화염은 상대에게 극한의 작열통을 전해주지만 실제로 몸을 태우진 않으니까.
“네게 이 힘을 전해준 게 누구야. 그 작자에 대해 안는 걸 전부 말하는 게 좋아.”
“마, 말할게! 말한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꼴에 이단심문회 수장이라고 입이 무겁네.”
화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그는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온몸을 버둥거렸다.
당장 미치기 일보 직전인 듯 보이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내 눈은 보랏빛으로 변색해있었다.
미치는 걸 내가 허락할 거 같나?
서서히 거세지는 화염이 일순간 꺼졌다.
“흐억…… 헉…… 헉……”
“자. 이제 말해보라고.”
“마, 말할 게. 말한다고……. 그…… 분…… 그분의 존함은……”
“말 안 한다고? 알았어, 조금 더 태우자.”
“그으으으으아아아아아악!!!!”
처절한 괴성과 함께 또 한 번 새카만 화염이 그를 뒤덮었다.
“말한다고!!! 말한다고 했잖아!!!!”
“아, 이 인간 더럽게 질기네. 뭐 이리 뚝심이 깊어. 그래. 내가 감명받은 김에 확실하게 태워줄 테니까 걱정 마!”
이제야 그는 눈치챈 듯 보였다.
내가 지금 당장 그의 입을 통해 무언가를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네가 태워죽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사령 술사의 입장에선 그런 원혼들이 들러붙으면 밤잠 설치게 한다고.”
이어지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그러니까. 딱 반나절만 불타자.”
화르르륵!!
“끄으으…… 끄으으으으으!!!”
완전히 폐허가 된 섬의 해안가에서 벌어진 심문을 빙자한 고문은 곧 어둠이 저물어 밀물이 밀고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넋이 나간 듯 웅얼거리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곧 홍단이를 꺼내 그의 목을 쳐 날려버린 뒤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는 금제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멍청하게 당해줄 내가 아니었다.
심연이 나를 파악하고 이곳을 잠식하기 시작했듯.
나 또한 내 방식대로 놈들을 침식하고 먹어치웠다.
누군가가 심연을 볼 때.
심연은 그들을 본다고 하였던가.
언뜻 들으면 참 섬뜩한 말이다.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선 내가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라는 소리니까.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보는 것 또한 가능하다.
심연이 나를 들여다볼 때.
나 또한 그놈들을 들여다본다.
놈들이 이곳을 멋대로 잠식하는 그 순간순간, 나는 놈들을 파악하고 나 또한 놈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놈들이지만 그건 규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규칙을 이용하고 있다.
즉, 내가 놈들의 규칙을 찾아내 이용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쉬워질 수밖에.
금제를 완전히 푸는 건 불가능해도 콜로서스 그리암의 죽음을 잠시 미룰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릿속을 강제로 각성시켜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해내게 하였다.
“동족을 찾으러 왔다라…….”
단신으로 삼대 환수왕을 모조리 격살하고 제압한 것도 모자라서 그걸 데리고 타차원으로 넘어온 존재.
그의 입장에선 정확히 어디에서 넘어왔는지 모를 존재라고 했지만, 출발지야 뻔한 법이다.
그녀의 이름은 [울드].
그녀의 목적은 제법 간단했다.
동생이자 같은 공주이며, 이미 울드의 손에 개작살이 나버린 룩스대륙이 아닌 티오니스 대륙을 잠식하기 위해 넘어온 베르단데를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베르단데라…… 베르단데?”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던 중 익숙한 이름이라는 사실에 눈을 찌푸렸다.
가만, 가만. 곰곰이 생각하니 곧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왜 이 이름이 익숙한가 했더니 그 범인이 에이리아 알 린디스와 일리나 데 팔란 때문이렷다.
“분명…… 대륙 6대 미녀 중 하나……”
베르단데라는 이름은 거기서도 제법 유명했다.
그 이유는 크게 복잡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대륙의 6대 미녀와는 조금 다른 존재로 취급을 받곤 했다.
보통 황족이나 귀족들인 다른 6대 미녀와는 다르게 베르단데는 평민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고 할 만큼 그녀는 조금 모호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