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9화
129. 네가 왜 마왕이야?!
거대한 균열 속에 버려진 심연의 공주, 울드는 삽시간에 육신 전체를 분해할 듯한 압박감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 인간과 싸우던 통로와 같은 공간은 이런 압박감이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으로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홀로 이곳에 버려져 급변하는 격류에 휩쓸렸을 때.
그녀는 그 튼튼한 자신의 몸으로도 버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지할 수 있었다.
반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흉폭하게 힘을 방출시켜 균열 전체를 뒤흔들 듯했지만, 그 여파로 인해 그녀는 더더욱 균열의 궤도 외곽 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이런 공간에 대해 대처하는 지식이 없었다.
금방 나올 거라는 예상을 했던 데이비와 다르게 그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그녀는 묵묵히 바스러져 갔다.
손등의 살갗이 마치 가뭄에 찌든 땅처럼 쩍쩍 갈라지고 전신이 깨진 유리병처럼 균열을 일으켰다.
서서히 죽어가던 그녀는 끝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생겨난 균열이 극도로 커졌을 때.
쩌적!!
공간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멍청한 년.”
비아냥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지만 울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을 할 힘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힘을 방출한 탓에 균열 전체를 뒤흔드는 기염을 토했지만, 목적이 없는 힘의 방출은 낭비에 불과하다.
침묵하는 울드의 목을 틀어쥐어 들어 올린 적발의 여성은 곧 한 손을 가볍게 저어 공간을 열어젖힌 뒤 그녀를 반대편으로 던져버렸다.
“꺼져버려라, 이 수치도 모르는 년. 네년이 그런 식이니 만년 서열이 하위에 있는 게다.”
“슬리지아…….”
“그 하찮은 입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천한 것.”
비아냥대는 말투를 지우지 않은 채 적발의 여성은 울드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짧게 혀를 찼다.
“무식하긴, 균열 일부를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놓았구나.”
경험이 부족하고 머리가 나빠도 힘 하나만큼은 놀라웠다.
적발의 여성은 천천히 균열 전체를 둘러보다 이윽고 손을 뻗어 다시 균열의 틈새를 열었다.
“쓸모없는 것이라고 해도 동족이 이리 당했는데 두고 넘길 수 없겠지.”
피의 대가는 피로 새기는 것이다.
적발의 여성은 일단 정말 혐오스럽다 해도 같은 심연의 공주라는 이름을 가진 울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이쪽이로구나.”
그리고는 익숙하게 그 인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티오니스 대륙으로 통하는 길목의 문을 열어젖혔다.
태생부터 차원 균열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지금처럼 앞면의 신이 가진 영향력이 약해진 때에는 그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티오니스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쩌적!!
이윽고 거대한 스파크와 함께 균열 속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야시시한 자신의 복장을 툭툭 털어내고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자랑하는 두 개의 달이 대낮의 시간인데도 희미하게 떠 있고 하늘은 마치 무언가의 힘에 잠식된 듯 어두컴컴했다.
“묘하게 거슬리는구나. 모조리 부숴버리기엔 내게 주어진 세상이 아니니 참는 수밖에.”
혀를 쯧쯧 차는 울드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가 걸렸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넝마를 입고 힘없이 걸어가는 인간들을 사정없이 채찍질하는 마족들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그녀의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포식자에게 주변을 경계하지 않는 먹잇감은 간단한 요깃거리일 뿐이었다.
“그 전에 예술작품을 조금 만들어야겠구나.”
그녀의 입술이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 * *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뜬 나는 양손을 들어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일단 진정하세요. 에이리아 황녀님.”
“누, 누구세요?! 여긴 또 어디……”
기겁하면서 말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눈물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쫄지 말아요. 헤치지 않아요.”
[허허. 자네, 당황하면 말이 헛나가는군.]
내 말에도 그녀는 경계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었으니, 나와 함께 이곳으로 날아왔고 자신이 한번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조리 잊었을 것이다.
당연히 갑작스레 자신이 이곳에 있으니 경계할 수밖에.
그러면서도 크게 반항하지 않는 건 아마 병을 앓고 있던 당시 그녀가 얼마나 삶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게 안겨 필사적으로 절규하던 그것조차 모조리 말이다.
막상 그녀가 나에 대한 것을 잊는다면.
그녀의 종족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서 안전해진다는 뜻일 테니 나로서는 차라리 안도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이해 타산적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건 당연하다시피 한 진리이기도 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오, 오면 자결하겠어요!”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내게 소리쳤다.
내게 호의적이고 의지해오던 평소 에이리아가 아닌 생소한 모습이 나에겐 조금 신선하면서도 씁쓸함을 유발했다.
“어? 저게 뭐지?”
이에 나는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황한 소리를 냈다.
이에 에이리아가 내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그 짧은 찰나에 나는 빠르게 파고들어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가볍게 쳐내 빼앗아버렸다.
“앗!”
“괜찮아요.”
당황한 그녀가 눈을 크게 뜨기가 무섭게 나는 그녀를 안고 진정시키듯 토닥였다.
“나는 당신의 편입니다. 당신을 치료하는 것 이외에 목적은 없어요. 겁먹지 말아요.”
내 목소리에 에이리아는 어찌할 줄을 몰라 몸을 버둥거렸다.
“떠, 떨어져 주세요! 당신이 누구이건 저는 다른 이와 접촉하면 안 되는 흉측한 존재에요!”
“뭐요?”
“제 몸엔…… 제 몸엔 끔찍한 저주가 있어요! 이 가면도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서…… 떨어지세요! 자칫하면 당신도……!”
그렇게 소리치던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 가면이!”
“깡그리 잊었나 본데.”
상황은 심각했다.
병이 나을 때부터 그녀의 삶 대부분은 나와 연관이 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아아, 안돼!”
기겁하며 허둥지둥거리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틀어잡은 나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봉쇄한 뒤 조용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전혀 흉측하지 않아요.”
“놔주세요. 제발……!”
흐느끼며 말하는 그녀는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나는 간단하게 미러 마법을 발현해 그녀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자, 직접 보세요. 그리고 사람 말 좀 듣고.”
내 말에 허둥지둥하던 그녀는 미러에 드러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거울에 손을 올렸다.
청록빛의 귀가 쫑긋거리고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 또한 똑같이 손을 뻗어 거울의 표면을 만졌기 때문이다.
“이게, 제 모습……”
“맞아요. 황녀님의 몸에 융해 가속바이러스 같은 건 이제 없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 동안을 침묵했다.
* * *
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림으로써 병이 낫기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버린 그녀는 상당히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활발해졌던 성격은 온데간데없어진 것처럼 우울해 보였다.
“방법.”
혼란스러워하는 에이리아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준 나는 거대한 선박의 선실 최상층부에서 배가 정박한 발카스의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껄껄, 가능하지, 가능하고말고. 자네가 나와의 약속만 지켜준다면.]
“……”
[하지만 정작 자네는 내켜 하지 않는 느낌이군.]
“기억을 못 하는 게 때로 좋을 때도 있으니까.”
나는 그녀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 실질적으로 티오니스 대륙에서 대단한 위세를 지닌 왕족 귀족은 부인을 여럿 두는 게 기본적이고 정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정략혼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정략혼 같은 것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정작 페르세르크 본인은 에이리아를 내가 품어주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본인이 해결할 일이지. 나는 약속대로 그 여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네. 그러기 위해선 자네가 먼저 해줘야 할 게 있지.]
그의 말에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현재 이 세계는 극도로 밸런스가 불안정해져 있네. 관조자의 입장에서 어느 쪽도 편이 될 수 없지만…… 밸런스는 중요하지.]
그 설명에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관조자의 눈에서 사라져버린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주게.]
그의 제안에 나는 침묵했다.
[어느 쪽이건 소중한 생명이지, 이 세상은 자네가 온 세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를 거라 여기고 있네. 틀린가?]
“맞습니다.”
내 대답에 목소리가 흡족한 듯 껄껄 웃어 보였다.
[그러니……]
“앞뒤가 안 맞잖아. 이 양반아. 더 이상 이놈의 세상에 간섭하지 말라면서 희망을 찾으라고?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이놈의 세상에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몇몇 종족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는데.”
모조리 뒤엎어버리는 것.
압도적으로 유리한 마족을 위한 밸런스를 뭉개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
퍽 웃긴 제안이다.
[자네는 냉철하고 눈치가 빠르지만, 의외의 부분에서 굉장히 고지식하군.]
“칭찬 퍽이나 고맙습니다만. 내 눈앞에 나올 방법이 없습니까?”
죽빵이라도 갈겨버리게.
[방법이 없진 않네. 관조자의 눈을 우습게 보지 말게. 마족은 인간과 다르게 압도적인 위계질서가 피에 새겨진 종족이지. 약속만 한다면 내 자네를 성의껏 도와줌세.]
“무슨 방법으로 돕겠다는 겁니까.”
[우선 관조자의 입장에서 본 자네와 저 여아에게 가해진 힘에 관해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군.]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명확하게 들려왔다.
나는 고요한 선내로 걸어 들어가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가가가각!!
아직 남은 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등 뒤에 커다란 알주머니를 매달고 내게 덤벼들어 오는 거대 바퀴벌레가 날카로운 턱을 번뜩이며 덤벼들지만 가까이 오기도 전에 극도로 가열된 화염 덩어리에 맞아 새카맣게 익어 사라져버렸다.
“바퀴벌레는 태워야 후환이 없지.”
[관조자의 눈에 비친 저 여아에게 가해진 힘은 조금 특이하군. 신의 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월적인 무언가도 아니야.]
관조자 노인의 말은 조금 의외였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흠……,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래,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데이비,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호오…… 오래전 죽은 라운왕국의 1왕자가 자네였군. 한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미래를 바꾸는 겐지, 어찌 되었건 자네의 이름이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도 많지만 그렇다고 자네의 이름이 다른 이름이 되는 건 아닐세.]
아주 작은 영향으로 가상을 현실로 바꾸는 연금학파의 가설, 혹은 비증명된 논리.
말도 안 되는 논리이지만 가능한 방식이 딱 하나 있다.
“세계의 규칙……”
세상의 바탕을 이루는 건 초월적인 의지인 [신]과 [세계의 규칙]으로 나뉜다.
실제로 세계의 규칙은 이물질인 레이나를 그 자리에서 지워버리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자네의 세상과 거울 격인 이 세상은 같은 규칙이 적용되면서 또한 부작용도 방향을 돌릴 수 있네,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해결할 방법만 찾는다면 그 과정을 뒤틀 수 있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세계의 규칙이 허가하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거대한 초월적인 의지가 강제적으로 고정시키는 힘과 다르게 해결방법이 존재하는 페널티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칭호라는 힘과 그 관련 힘을 내게 양도한 것은 이런 샛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던 듯싶었다.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는 나를 재촉했다.
[그 거대한 깃털 달린 존재를 불러내시게. 당장 상위 마족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게야.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더 좋겠지.]
에에리아의 상태를 회복시킬 가능성.
확실히 그녀의 미래를 생각하면 차라리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의 기억은 지우는 게 맞겠지만.
의원으로서의 자존심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을 때까지 되돌린 뒤, 그녀가 종족의 제한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게끔 하리라.
잔인하다고? 의술이란 본디 잔인하기 그지없다.
[아, 참고로 하는 말이네만. 관조자란 현재와 단편적인 미래를 볼 수 있지. 뭐, 지금 날뛰고 있는 그 대단한 마왕님만큼은 아니겠지만,]
뜸 들이는 그 말투에 나는 짜증이 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똑바로 합시다. 어르신.”
[자네, 소중한 아들을 위해서라도 고집을 꺾는 것도 훌륭한 사람의 모습이라네. 그것도 아니라면, 자네의 몸에 새겨진 운명처럼 신의 신부(新婦)가 되고 싶은 겐가? 껄껄껄!!!]
“개소리.”
세계수도 그렇고 알놈들이 다 저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져나간다.
그놈의 신부 타령.
내 발걸음소리는 상당히 투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