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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410화 (409/1,559)

제 410화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다시 장벽을 넘은 나는 육신과 혼이 다시 동기화되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중부대륙의 남부지역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프루그레프 왕고, 5천 년은 된 유적이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은 오래된 과거의 문물일세. 세상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로지 오랜 시간 이 땅의 모든 것을 보고 느껴온 나만이 알고 있지, 그 던전 안에 모든 것이 잠들었음에도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는 놈이 있네.]

그 이름은 [은율의 솔방울]. 세계가 만들어낸 수많은 규칙이 우연과 우연을 겹쳐 귀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의 설명대로라면 은율의 솔방울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한번 만들어지는 데에 수천 년에서 수만 년, 정말 극도로 낮은 확률로 만들어지는 귀물로 오랜 시간 일정 흐름대로 흘러가는 마나가 장애물에 막혀 쌓이고 쌓여 보옥이 되고 거기에 특수한 압력과 열, 그리고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지는 물건이다.

관조자의 말대로라면 그의 의지가 각성한 이래로 은율의 솔방울이 만들어진 건 단 한 번뿐이라는 듯 보였다.

그 효과는…….

면역.

신의 힘이 아닌 이상 가능성은 있다. 정체불명의 힘이 현재 에이리아의 기억을 삭제시키는 게 아니라 깡그리 긁어내서 어딘가에 봉인하고 있는 것이라면, 면역의 효과로 그 효능을 지워버림으로써 기억을 되찾게 한다.

관조자의 제안은 제법 간단했다.

그 오랜 세월의 결과물이 숨겨진 장소를 내게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은율의 솔방울 하나가 있었으면 레이나의 몸에 새겨져 있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녀가 세계의 규칙에 따라 주변에 잊힌 이유도 같은 존재인 일리나와 마주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마지막으로 불청객인 그녀가 사라질 가능성도.

그 솔방울 하나면 모조리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와서 레이나에게 그것을 사용하기엔 너무 늦기도 하였거니와 비슷한 상황으로 에에리아가 세계의 규칙에 따라 기억을 삭제당했으니 차라리 이곳에 쓰라는 게 그의 의도이기도 했다.

“애초에 영감님은 뭡니까. 내가 있던 세상에 당신 같은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는데.”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 세상은 불안정한 세계라고. 나와 같은 괴이한 존재가 생겨나도 이상할 게 어디 있는가.]

존재 자체가 우연스레 만들어진 세상의 의지체라 이건가.

후웅!!!

네 쌍의 거대한 날개를 멈추며 착륙한 메가로드리아의 등에서 내린 나는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곳을 떠나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다시 잠식될 가능성은?

“여기서 아예 처리했으니까 별문제는 없을 거다. 네 본신의 그랜드마스터급 힘도 서서히 돌아올 테고.”

그렇게 되면 이제 내가 있던 티오니스 대륙에서 심연의 공주를 제외하면 메가로드리아를 이길 존재는 없게 된다.

심지어 나조차도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할 강자가 되는 것이다.

이전의 싸움처럼 그가 약해져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가 환수소환사와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본래 그의 세계가 아닌 만큼 힘의 사용에 제약이 좀 더 있을 거라는 분석 때문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데이비. 다시 말하지만, 나의 의지를 되찾게 해준 데에는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잠식이 사라지며 내가 환계가 아니라 중간계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메가로드리아는 자신과 나머지 환수왕, 그리고 그들의 고향인 룩스 대륙에 대해 한차례 내게 설명한 바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심연의 공주라는 그 빌어먹을 [울드]와 그녀가 부리는 괴이쩍은 존재로 인해 수십 년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룩스 대륙은 극소수의 인간과 환수들을 남긴 채 멸망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심연의 공주, 그러니까 울드나 베르단데 같은 존재를 그냥 두면 티오니스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티오니스 대륙 본래의 세계에선 동기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가능하면 여기서 만났으면 좋겠는데.

후환을 남기지 않게 여기서 지워버릴 수 있게.

이 이상 들어가 봐야 별 의미도 없기에 메가로드리아를 내버려 둔 나는 이곳까지 나를 조용히 따라와 준 에이리아의 손을 잡았다.

본래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장막을 넘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관조자의 힘 덕분인지 에이리아에게 아주 잠깐의 간섭 권한이 부여되었다.

“아……”

깜짝 놀란 그녀가 나를 본다. 처음 보는 외간남자와 손을 잡은 꼴이 되어버린 그녀는 어떻게든 내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내려 들었다.

“놔, 놔주세요!”

“혼자서 가면 다칩니다.”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계속해서 민폐를……”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세계에 처음 보는 남자와 단둘이 떨어져 있고, 병으로 인해 흉측하던 제 얼굴은 어떻게 된 건지 너무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내리 한 시간 가까이를 서럽게 울어댔다.

마치 과거에 그녀가 겪어온 시선과 수군거림에 반항이라도 하듯 말이다.

처음과 다름없는 행동이지만 그녀가 그만큼 일관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어차피 남은 이틀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버텨야 합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환자를 치료할 방법이나 찾아야지요.”

“데이비 왕자님은…… 정말 자상하시네요…….”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옅게 웃어 보였다.

“왕자님과 결혼하실 분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아요.”

“그래 보입니까?”

“네.”

묘하게 단호한 대답이었다.

“저…… 왕자님?”

“네.”

“저는 왕자님과 잘 아는 사이였나요?”

조심스런 그녀의 질문에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과거 나를 연모하던 작은 소녀와는 다르게 나를 경계하면서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그녀의 행동은 상당히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고 미묘하게 찝찝한 생각이 들게 했다.

“저…… 이상하게 왕자님이 낯설지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녀의 그런 말에 나는 담담하게 답해버렸다.

“스톡홀롬 증후군이라는 겁니다.”

“스…… 뭐죠 그게?”

“그냥 인질범과 인질이 서로 동화되는 겁니다.

[스톡뭐시기는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건 아닐 텐데.]

닥치세요.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내 귓가에 묘한 땀 냄새와 함께 숲 속에서 날카로운 화살 서너 발이 에이리아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꺅?!”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화살을 낚아챈 나는 관조자를 향해 대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아무도 모르는 곳?”

[크, 크흠. 잊고 있었군. 이곳에 인간 저항군의 생존자가 은신해 있었지.]

이 영감이 꿩을 먹는 도중에 알까지 먹으려 드네?

[크흠! 자네도 급하지만 나도 급하다네! 원 인간이 그리 깐깐해서 쓰는가! 약속은 약속이니 멀리 갈 것 없이 저들을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 것을!]

“일에 순서라는 게 있을 텐데.”

[아 모르네! 나는 몰라! 도와주기로 약속했잖는가! 두 가지 일을 병행해서 하시게! 그토록 강한 신부의 운명을 타고난 이가 그리 치졸하게 굴진 않겠지!]

관조자의 목소리는 마치 떼를 쓰는 아이 같았다.

* * *

“폐하!”

옥좌에 앉아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페르세르크를 향해 그녀의 충신들이 모여들었다.

“감히 지고의 폐하께 이런 불경을 저지르다니!”

“엘프들이 아주 미쳤군! 감히 폐하의 옥체에!!!”

거대한 체격을 가진 거구의 마족이 격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의 옥체에 상해를 입힐 정도라니 이건 쇠약해진 세계수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조심스레 손을 든 뇌쇄적인 복장을 한 서큐버스 족이 천천히 의견을 제시해왔다.

신목의 성지로 향한 마왕 페르세르크, 그리고 그녀를 호위하는 호위대 둘.

두 호위대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의식을 잃었고 페르세르크도 무언가 머릿속이 복잡한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신목으로 향했던 자신들의 왕이 엘프들에게 기습을 당했다는 것 정도였다.

“세계수에게 쓴맛을 보여줄 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계수가 데이비의 손에 소멸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세계수는 세계수입니다. 어찌하시려고……”

“일단 세계수가 정말 폐하를 공격한 것인지 알아봐야……”

“아닙니다!!”

그때 고요한 어전의 문이 열리며 다크 엘프 여성이 뛰쳐 들어왔다.

다름 아닌 페르세르크의 호위로 따라갔던 이들 중 살아남은 소수인 다크 엘프였다.

쿵!!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대공 아스타로트를 시작으로 몇몇 대공들과. 페르세르크의 상태를 확인하던 초대 리치 닉스까지.

어마어마한 압박의 시선들이었다.

“폐하의 옥체를 지키지 못한 불충! 죽어서라도 갚을 수 없사오나 진실은 알려야 한다 생각하여 병상에서 뛰어 왔나이다!”

“네 이년! 폐하의 옥체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만. 그녀의 보고를 먼저 듣도록 하지.”

고요하게 침묵하던 닉스의 울리는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폐하를 공격한 건 세계수가…… 아니었습니다.”

힘겹게 말한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이었어요. 그것도 단신으로 세계수를 죽인, 지금껏 전쟁 중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완전히 새로운 적이었습니다! 그는 강합니다! 절대 가벼이 보셔선 안 돼요! 자칫 모두가 물거품이 될지도……!”

그 말에 어전 내에 있던 모든 마족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어전에는 박장대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인간? 인간이라고?! 웃기는 소리! 고작 3개의 군단에 대부분이 쓸려나간 인간 놈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족대공 포르말리온의 말은 조금 과하긴 했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쉬이 믿어주지 않는다. 다크 엘프 여성은 마족들의 이런 태도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절대 충돌은 해선 안 되었다.

그 인간 소년의 눈빛에 보인 것은 지독한 광기, 그리고 세상을 무너뜨려 버릴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군주인 페르세르크는 그와 직접적인 충돌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족 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였고, 단순 무력만 따져도 역대급 마왕 중 최고라 불리던 존재였다.

물론 지금이야 과거의 위명만 못 하지만 그녀가 권능을 발현하기 시작하면 이깟 대륙에 있는 인간을 말살하는 건 한순간일 거로 생각하는 게 공통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권능을 발현하지도 못하고 충격을 받았다.

대체 그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동안 오랜 전쟁 중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인간이 나타나 이 같은 파장을 일으킨단 말인가.

혼란에 휩싸여있던 다크 엘프 여성은 이윽고 마족들을 중심으로 이끈 닉스를 바라보았다.

뼈만 남은 거대한 리치는 말없이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이 되었건 감히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댄 인간 놈을 그냥 둘 순 없지. 폐하, 그림갈(흑룡부대)에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오로지 온전한 마왕의 위계에 오른 자의 명령만 듣는 그들이라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닉스의 눈이 한차례 번뜩이자 지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옅게 입술을 깨물며 고통스러워 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 마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그림갈은 당장…… 그를 찾아……”

억눌린듯한, 혹은 지친듯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인 그녀가 내린 명령이지만 닉스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다른 마족들과 다르게 닉스는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예부터 이 역대급으로 강했던 페르세르크라는 마왕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생명 중시를 외치던 소녀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실은 3천 년이 더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닉스는 독하게 그녀의 정신 대부분을 지배하는 육신을 만들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녀의 존재는 흩어진 마족이나 마족과 힘을 합친 모든 이들에게 큰 구심점이 될 테니 말이다.

이윽고 닉스는 왕이 빈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통치하는 섭정이 된 것처럼 명령을 내렸다.

“놈을 찾아. 그리고, 감히 마왕에게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뼈저리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닉스의 말에 마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그냥 인간이 아니라 작정하면 대륙 전체를 단신으로 쓸어버릴 괴물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마왕과 동일한.

아니, 오히려 만들어진 육신 때문에 불안정한 그녀와 다르게 온전하게 마왕의 위계를 모조리 물려받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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