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6화
본인 스스로도 인지하고 싶지 않지만, 이 움직임은 마치 벌레들이 벽에 붙어 기어 다니는 듯한 모양새였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일었지만, 데이비가 하는 행동이 마냥 이유가 없진 않을 거라 생각한 그녀였다.
“에이리아 황녀님…….”
그때였다.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에이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흑발의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갑자기 물밀 듯이 밀려오자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결국,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 에이리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 *
자신을 돕겠다고 기이한 모양새를 따라 하는 에이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생각은 귀엽다였다.
보통 돕고 싶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황족체면까지 버려가며 저런 모습을 취할까.
결론적으로 놓고 보자면 ‘아니다’에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일어나려던 그녀는 몸을 지탱하던 팔을 멋대로 꼬여버린 탓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꺅!”
수치심으로 시뻘게진 얼굴을 내게서 최대한 숨기려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녀의 행동거지에 나는 괜스레 차오르는 가학심을 슬슬 억눌렀다.
일리나와 다르게 그녀는 괴롭히는 맛은 있을 것 같지만, 뒷감당이 자신 없었다.
버럭 화를 내는 일리나나 페르세르코와는 다르게 그녀는 연약한 마음 그대로 울어버릴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 그게……”
웃으면 안 된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기에 웃어선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누른 나는……,
“풉……”
결국, 터져버렸다.
“큽……크흡…… 푸하하핫!”
그대로 드러누워 대소를 터뜨리는 내 모습에 엎어져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눈물이 방울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으읏! 웃지 말아 주세요…….”
무어라 항변하지도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한참을 웃던 나는 결국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린 뒤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 하지만 저도 뭔가 해야……”
“직접 할 필요 없습니다.”
대충 이 유적의 시험이 원하는 바를 알았으니.
그렇게 말한 나는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요지는 누르기만 하면 된다는 이 말이야.
그러면 굳이 직접 누를 필요 있나.
[7서클]
[컨트롤 그라비티]
우웅…… 콰직!!
묵직한 공기가 짓눌리며 바닥에 강력한 압력이 가해진다.
동시에 내 시야에 비치는 각각 색의 장판들이 일제히 빛을 잃고 꺼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깔린 게 내 손과 발을 대신해줄 것들이니 무슨 상관일까.
삐릭! 그그그그그그그그극!!!
이윽고 마법 장치가 완전히 발현되었는지 다음으로 향하는 길목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부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경험상 이런 유적에서 마구잡로 부숴대다간 목표물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 * *
이후에도 이놈의 유적은 여러 가지 시험을 요구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칼날 함정도 존재했고, 새빨간 화염이 일렁이는 불지옥 같은 함정도 존재했다. 하나같이 위험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시험들이었지만 공략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칼날 함정은 거대한 세이프티 월을 설치해 이동 자체를 차단하고 지나가 버렸고 불지옥 같은 함정은 일대의 공기를 강제로 차단해 연소 자체를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제단까지 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30여 분가량으로 아주 짧게 되어버렸다.
“와아…… 아름다워요…….”
마지막 방은 거대한 연못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공동 전체에 마치 별이 촘촘히 박힌 것처럼 반짝거리는 그 연못을 보며 에이리아는 문득 욕망이 생긴 듯 입을 오물거렸다.
“여기선 아무도 안봅니다.”
이에 내가 조용히 입을 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멱을 감고 싶었던 거 아닙니까?”
이곳에 떨어진 뒤 그녀도 나도 제대로 씻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내 말이 정곡이었는지 말없이 자신의 손목 부분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던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울먹거렸다.
“죄, 죄송해요. 불쾌한 냄새가 나셨을 텐데…….”
“그렇진 않고요.”
이윽고 천천히 걸어 들어간 나는 저수지의 앞에 새겨진 석판의 문자를 읽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성스럽기 그지없음이니. 이곳까지 도달한 생자여, 그대는 과감함과 냉철함, 그리고 지략을 시험하는 방은 모두 통과하였다. 모든 진실은 죽은 자가 품고 있음이니. 죽은 자를 영접하기 위해선 몸과 마음을 깔끔하게 가다듬을지어다.”
내 중얼거림에 에이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내 말을 해석하면 즉 다음 방으로 넘어가고 싶으면 이곳에서 몸을 깨끗이 씻으라는 소리였다.
대상은?
당연히 침입자에 해당한다.
에이리아 그녀와 나를 포함한 전부.
“그냥 부수고 들어갈까.”
[자네의 힘이면 가능하겠지만 추천할 만한 행동은 아닐세. 마지막에 와서 일을 그르칠 수야 있는가.]
“무너지는 거 맞습니까?”
[십중팔구는 그러하겠지. 미안하네만 나로서도 이곳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네. 은율의 솔방울이 이곳의 끝에 있다는 것만 알 뿐.]
그는 많은 것을 봤지만, 그의 의지가 존재해온 시점이 이 유적이 생겨날 때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이 이상은 알아낼 수도 없었다.
“흠……”
말없이 고민하던 나는 조용히 연못에 손을 담가보았다.
적당히 시원한 느낌의 물이 내 손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리자 청명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이 미묘한 느낌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마나가 풍부하게 머금어진 자연 연못이라.
동시에 머릿속에 있던 기억 하나를 찾아낸 내 눈이 번뜩였다.
“미친.”
놀란 눈으로 중얼거린 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내 행동에 에이리아가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들어갑시다.”
마나 신성수!
마나의 축복을 받은 물이라는 뜻을 지닌 물이다.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마나 하나 없던 인간을 익스퍼터급으로 만들 만큼의 효능을 지닌 연못이기도 했다.
고작 물병 한 컵 정도 만드는 데에 수백 년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 연못에 든 힘을 모조리 집어삼켰을 때…….
현재 불안정한 내 환골탈태 상태가 완벽하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런 게 있으면 냉큼 먹어야 인지상정이 아닌가.
어차피 한 명에게 해당하는 한계치는 명확하니, 결국 그녀와 나 둘 다 들어가는 게 가장 큰 이득이리라.
계산을 마친 내 눈이 번뜩였다.
“어서요.”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굳이 옷을 벗을 필요 있습니까? 그냥 들어가면 되지.”
내 말에 에이리아는 잔뜩 겁을 먹은 듯하더니 이내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 그렇네요. 알겠어요! 도움만 받고 있을 순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할게요!”
그리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연못 내부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옷이 그녀의 몸에 순간적으로 빠르게 달라붙는다.
굴곡진 형태가 드러나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오로지 땡잡았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연이 이런 식으로 해 처먹는 거구나.
가만, 여기에 이게 있다는 말은…….
본래 세계에 돌아가면 이게 있을 거란 소리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관조자를 향해 의지를 내비쳤다.
‘다른 곳도 전부 말해주세요. 깡그리.’
[자, 자네 설마…….]
이건 세계의 규칙과는 상관없잖아요, 안 그래요?
* * *
차가운 느낌 때문인지 에이리아가 몸을 웅크리고 파르르 떨었다.
몸을 씻을 땐 어느 정도를 벗어야 하겠지만 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연못의 중앙 부분에서 멈춰 섰다.
“꺅!”
그때 나를 따라 연못으로 들어온 에이리아가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렸다.
“왜 그러……”
“보, 보지 말아요!”
당황한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리자 양손으로 제 가슴께를 가린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연못에 푹 담가버렸다.
그리고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앞에서 제 몸의 굴곡이 드러나니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린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수치심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믿기로 했지만, 이전 나를 맹신하던 때와는 달랐다.
아직 그녀의 무의식 어떤 부분이 본능적으로 내게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본래라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기도 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에이리아는 내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들어왔고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연못의 중앙에 천천히 앉았다.
수심은 앉은 상태에서 가슴 정도였던 탓에 물에 잠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침묵하는 에이리아를 뒤로한 채 나는 마나 신성수를 통해 내 육신에 밀고 들어오는 대량의 마나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 현상은 아마 나뿐만 아니라 에이리아도 함께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얼굴로 들어와서 마나 신성수가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느낌에 매료된 그녀는 내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빛을 내뿜는 연못을 말없이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신기하네요…….”
그리고는 말없이 물을 손에 담아 마치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듯이 자신의 귀를 쓰윽 닦아냈다.
마치 개나 고양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다른 이도 아니고 그녀가 하니 굉장히 색다르게 보였다.
“아아, 상쾌해…….”
묘하게 귀여운 그 모습에 괜히 떨떠름한 심정이 된 나는 문득 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이야, 기회가 왔잖아?
차려진 진수성찬을 무시할 셈이냐?
멍청한 놈! 우유부단한 짓은 당장 집어치우고 한 마리의 우악스러운 존재가 되어라!
마치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파묻었다. 안 그래도 충동이 몸을 순간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 이런 속삭임이라니.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자 에이리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탄탄한 근육이 잡힌 내 상체 부분이었다.
물로 인해 옷이 착 달라붙은 데다 겉옷을 벗은 탓에 흰색의 옷가지 안으로 근육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
본능적으로 침을 꼴깍 삼킨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은 뒤 내게서 물러났다.
“데이비 왕자님? 괘, 괜찮으세요?”
당황한 그녀가 조심스레 내게 손을 뻗어오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부릅뜨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꺅!”
“이건 황녀가 시작한 겁니다.”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그리고 내 눈에 담긴 어떤 욕망을 눈치채고 파랗게 질렸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저, 저는 마음에 품은 사람이……”
그렇게 외치던 그녀가 멈칫했다.
“어라……”
자신이 말하고도 스스로 이해를 못 했는지 그녀가 움찔거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는 그녀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