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5화
이미 희망이 사라져버린 그들에게 괜한 희망을 불어넣진 않았다.
이제 내가 이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그들에게 마족을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쥐여줘 본들, 사실 그게 큰 효과를 볼지는 알 수 없다.
내 힘을 이용해 그들을 가르치는 것도 불가능하고.
영향력의 한계상, 그들을 대신해 마족을 몰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에이리아만을 데리고 촌락을 빠져나온 나는 관조자의 안내를 받아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커다란 바위가 박혀있는 거대한 흙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일세. 자네가 이 숲에 와서 느끼고 있는 마나의 흐름대로 마나를 열쇠에 불어넣고 저 돌과 접속해보게나.]
그의 말에 나는 목에 걸어둔 가죽 목걸이를 빼내 마나를 살짝 불어넣기 시작했다.
“여긴……, 정말 특이한 곳이네요.”
그때 나를 따라왔던 에이리아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양팔을 끌어안고 파르르 떨었다.
“마치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 드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아……, 네!”
잔뜩 긴장한 듯 크게 답한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내게 가까이 붙었다.
그녀가 내게 가까이 붙은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숲 전체를 감싸는 특이한 마나 흐름의 파장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5천 년 전의 잊힌 문명의 마나 흐름은 정말 신묘하기 짝이 없지. 보통대로라면 그 규칙을 찾아내는 게 불가능할 테지만 자네 정도라면 못해도 5시간 정도면 가능할걸세.]
5시간이나 잡아먹는다며 호언장담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능숙하게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고 멋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가져온 변화는 한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멩이가 옅은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한 것이다
[으잉?! 벌써 끝났단 말인가?]
‘뭐 어려운 게 있다고.’
[세, 세상에, 8서클 마법사도 몇 날 며칠을 고심해야 찾아낼 패턴들을…….]
눈 뒀다가 어디 써먹은 건지.
활성화를 시작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빛을 내뿜기 시작한 돌멩이는 겉보기에도 대단히 아름다워 보였다.
넋을 놓은 듯 돌멩이를 보는 에이리아를 흘끗 바라본 나는 천천히 거대한 바위 면에 돌멩이를 천천히 접속했다.
투웅…….
동시에 방금까지 평범한 바위였던 것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일변하기 시작했다.
“바, 바위가 변했어요!”
“들어갑시다.”
이어서 내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에이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나를 뒤쫓아 들어왔다.
* * *
프루그레프 왕고.
검신 하레스가 활동했던 3천 년 전보다 더 오래전의 유적으로 역사에서 완전히 잊힌 문명이다.
실제로 관조자가 말하기 전까지 나도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만큼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품고 있는 유적이라는 건 분명했다.
거대한 공간은 분명 어두운 실내일 텐데.
이곳은 마치 달빛을 받은 것처럼 은은했다.
그리고 신을 모시는 신전같이, 거대한 성기사의 석상들이 일렬로 가득 세워져 있었다.
진짜 거인에게 갑옷을 씌운 뒤 세워놓은 듯한 정교한 형태는 확실히 놀라울 정도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정도 기술력이면.
지금처럼 무뎌진 대장장이나 석공의 기술이 아니라 거의 전성기급의 실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눈동자만 봐도 섬뜩한 기분을 전해주는 그 형태를 보며 나는 말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히익!”
그런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찰나, 갑자기 나를 따라오던 에이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파르르 떨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아요?”
“……아, 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말끝을 흐린 그녀가 다시금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뭔가 섬뜩한 게 몸을 스친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기묘한 분위기는 숲 전체에 퍼져있었다.
정숙한 느낌보다는 차라리 음습하다고 하는 게 옳으리라. 나는 이곳의 형태를 알고 있을 관조자에게 물었다.
‘뭐 아는 거 없습니까?’
[말할 수 없네.]
‘이제 와서?’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네. 자네에게 이 이상 정보를 함부로 건네는 건 위험해. 다만 이곳에 오는 선택을 내린 것은 자네와 나, 모두에게 득이 될 거라는 사실일세.]
관조자라는 존재 자체가 제약 덩어리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였기에 내게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의 차이가 존재하는 듯 보였다.
“차가운 공기부터 기이한 느낌까지, 으스스하네요…….”
조심스레 말끝을 늘이며 에이리아가 두려운 듯 나를 따라왔다.
“어?”
이에 나는 괜스레 장난기가 돋아 멈추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에 에이리아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왜 그러세요.”
조심스레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놀란 표정을 유지한 채 말없이 에이리아의 뒤편을 가리켰고 그녀는 굳은 채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와, 왕자님……. 장난치시는 거죠?”
휘이이잉!!!
“꺄악!!”
그때 고요하던 석재 복도에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불어 닥쳤다.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타이밍이라 태생적으로 일리나보다 더 겁이 많은 에이리아가 기겁하는 건 당연했다.
소동물처럼 귀를 움츠러뜨리고 와들와들 떠는 그녀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기겁하며 내 품에 안겨들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푹푹 쓰다듬었다.
“거짓말입니다.”
“으읏……, 그러지 마세요.”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린 그녀가 나를 흘겨보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괜찮아요?”
“아……. 네, 이상하게 자꾸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또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아이, 참…….”
의도하지 않게 눈물이 또 흐른 탓에 그녀의 표정에 곤란함이 어렸다.
“죄송해요. 보기 좋지 않은 꼴을 자꾸 보여드려서…….”
“무서우면 기대도 됩니다.”
“그럴 순 없어요. 데이비 왕자님께 폐가 되는걸요, 그리고……”
이상하게 누군가에게 함부로 안기면 안 될 것 같아서…….
아주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인 터라 누가 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내 귓가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는 두리번두리번하며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저놈의 석상들 움직여도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내 말에 에이리아가 옅게 웃어 보였다.
“왕자님과 대화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그러면서 이상하게 이쪽이 쓰리기도 하고……”
“부정맥인지 한번 진찰해볼까요?”
“괘, 괜찮아요!”
당황한 그녀가 물러났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한 채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거대한 문이 있는 커다란 공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거대한 석상은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세상에 으스스하긴 하지만 정말 웅장해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고대유적이 그래서 매력적인 겁니다.”
원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참고로 이곳의 시간은 바깥과 조금 다르게 적용되고 있네. 이곳에서의 하루는 바깥에서의 4시간 정도이지.]
뜻밖의 정보에 나는 침묵한 채 공동의 끝에 있는 문에 손을 올려놓았다.
신비로운 문자였다.
고대 문자는 대부분 그림 형태의 문자가 많다.
하지만 이 유적에 있는 문자는 엄연히 상위의 고등문자였다.
말없이 벽면에 쓰인 문자를 천천히 쓸어내리던 나는 문득 문자에 옅은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반사적으로 마나를 불어넣어 반쪽을 맞춰 채우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문의 문자가 빛을 내뿜으며 내 시야에 다른 문자로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고…….”
“네?”
“산 자에게 저주를 내리노라.”
말없이 벽면에 쓰인 문자를 쓸어내리며 내가 중얼거리자 에이리아가 내게 다가왔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이 문자들을 읽으실 수 있는 건가요?”
“차가운 흐름은 그들의 영체이며……, 고요한 공기는 그들의 숨소리일지니.”
이어지는 내 말에 문의 문자들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이곳의 이름은 태초의 요람이라. 산 자여, 지금이라도 돌아갈지니. 허락받지 못한 자가 발을 들이밀었을 때 그대의 목숨을 명계의 망자들이 노리리라…….”
뜬금없는 소리이지만 이 문자들을 해독하는 게 키워드였던 모양이었다.
우우웅!!!
이윽고 문 전체에 새겨진 균열에 연녹빛의 빛이 머금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닥과 벽면, 천장에 새겨진 균열 전체에 연녹의 빛이 빠르게 머금어졌다.
갑작스런 고동의 변화에 에이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천천히 밀착해왔다.
그그그그그극!!!!
그리고, 큰 소리 끝에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하며 어두운 공간이 다시 나를 반겼다.
문 너머의 공간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하지만 내 시선에는 작은 빛의 구체들이 몇몇 바닥에 깔려있었다.
함정, 혹은 시험의 방.
말없이 내부로 걸어 들어간 나는 천천히 바닥에 그려진 빛을 머금은 동그라미 하나를 천천히 밟았다.
우웅!!!
동시에 바닥에 새겨진 빛이 꺼진다.
딱히 마나의 흐름에 변화는 없었기에 다시 발을 떼어내자 꺼져있던 빛이 다시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음…… 전부 다 끄라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이내 다시 발판 하나를 발로 밟아 꺼뜨린 다음 나머지 발을 움직여 다른 색을 가진 원을 밟았다.
그러자 두 번째 발판도 빛을 잃고 사라졌다.
바닥에 그려진 원은 총 4개.
말없이 손을 뻗어 나머지 두 개도 짚고 나자 주변에 마나 흐름이 일변하기 시작했다.
삐릭!
동시에 내 발과 손이 짚고 있던 곳과 다른 곳에서 또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맞춰서 빛을 끄라는 건가?”
이에 다시 손을 뻗고 움직인 나는 양손과 양발을 사용해 불을 모두 꺼뜨렸다.
마치 작은 퍼즐을 풀 듯 계속되는 그 행태에 나는 묵묵히 그것들을 수행해나갔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에이리아에겐 내 행동거지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 * *
에이리아는 갑자기 공동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밟고 손으로 짚는 데이비를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바닥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네발로 걷는 동물처럼 몸을 웅크려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드려야 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그녀의 기억을 되찾게 해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위해서 저렇게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자신은 대체 하는 게 무엇인가.
민폐라는 생각이 드는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울상으로 찌푸려졌다.
‘내가…… 내가 도와야 해.’
체면이 문제인가.
그녀에겐 생판 처음 보는 저 소년이 그녀 자신을 위해 저렇게까지 노력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에이리아는 머리를 굴려 데이비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는 그녀도 조심스레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양손을 짚고 엎드렸다.
그리고, 마치 벌레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