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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420화 (419/1,559)

제 420화

“내려와.”

짧은 목소리에 짙은 마기가 서린다.

쿠웅!

“으억! 나르샤! 왜 이러는 거……, 으아아아아악!!”

“정신 차려라! 콜트! 제발 정신 으악!!”

저항하는 흑룡을 제어하기 위해 고삐를 쥐고 흔들던 마족이 몸을 뒤트는 흑룡의 반항에 저항도 못 하고 지상으로 추락한다.

그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과하게 제어하려는 이들은 분노한 흑룡에게 물어 뜯겨 그대로 명을 달리한다.

쿠웅!!

이윽고 내게 모여든 흑룡을 뒤로하고 두 마리, 네 마리……, 여덟 마리.

마치 제식 군기를 잡듯 일사불란하게 내 앞으로 착륙하는 흑룡들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흉폭하기로 소문난 것들이 바로 이 흑룡이다.

보통 헤츨링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이 흑룡인 만큼 놈들은 지능보다는 본능에 몸을 맡기는 맹수 같은 기질이 강했다.

그렇기에 사육사들도 물려 죽는 일이 허다하다고 마왕 검신 하레스와 천일야장 수르트에게 들은 바 있었다.

그런 흉폭한 흑룡이 바로 이놈들이다.

“누가 흉폭하다고?”

-그르르르르…….

낮게 울며 내 손에 콧잔등을 비비는 이 검은 흑룡들은 이미 내게 매료된 후였다.

“커헉……”

바닥에 떨어지고도 죽거나 정신을 잃지 않은 마족들은 입에 거품을 물 것 같은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믿을 수 없다는 시선들이었다.

오랜 시간 돌봐준 사육사들도 물어뜯는 이 흉폭한 흑룡들이 생판 처음 보는 인간 소년에게 머리를 숙이고 애교를 피우고 있다니.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한 흑룡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왕 페르세르크의 앞.

흑룡부대 그림갈은 오로지 마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변질된 헤츨링 흑룡들은 오로지 마왕에게만 절대복종하니 그 외의 존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마왕은 둘이 존재할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의 마왕은 페르세르크로 옥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상황.

그러니 마족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일 터다.

[자네, 과도한 개입은 자네에게 득이 될 게 없네. 제발 자네를 우선하여 생각하게.]

‘나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짧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흑룡의 콧등을 문질러 주던 나는 쓰러진 마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말해.”

“크윽…… 인간……”

“말해. 이곳 촌락민들은 다 어디로 데려갔지?”

내 눈동자가 순간 붉게 번뜩이자 그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마, 마왕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진득한 마기를 퍼뜨리며 내가 묻자 쓰러져 있던 마족이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마족은 마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생명체.

그러니 이건 저들의 저항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모, 모두 추포하여 본성으로 끌고 갔습…… 니다. 저항하는 자는, 사살……”

“됐다. 알았으니까 잠들어라. 다만, 깨어났을 때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죽은 듯이 대기해.”

털썩!!

그 말과 함께 마족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내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래도 다른 마나에 비해 굉장히 그 기세가 적은 마기인데 이 정도에 노출되어 기절할 정도라면 이놈들의 그릇은 더 볼 것도 없다.

“여기서 기다려.”

“다. 당신은 누구…… 십니까.”

처음엔 혼란 때문에 저도 모르게 대답했고 내게 휘말렸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내게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아, 그러고 보니 일루전 마법이 꺼졌구나.

에오니샤가 혹여라도 나를 알아볼까 모습을 살짝 바꾼 것이 시작이었다.

“데이비다.”

하지만 워낙에 어린 시절에 죽임을 당한 이곳의 나인만큼 지금의 얼굴을 에오니샤가 본다고 알아볼 리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데이비라는 대답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손으로 얼굴을 한번 가렸다가 치우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환영마법이다. 알았으면 죽은 듯이 숨어있어.”

담담하게 말한 나는 에이리아를 안아 든 채로 가장 큰 흑룡의 등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녀를 앞에 앉히고 한 손으로 복부를 끌어안아 떨어지지 않게 고정한 뒤 흑룡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자. 가자.”

목적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본능만 남은 흑룡은 내 대답을 알아차렸다는 듯 날개를 펄럭였고 이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거대한 흑룡이 주축이 되어 수십 마리의 흑룡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왕고로 들어간 직후 놈들은 촌락으로 들이닥쳤다.

무슨 방법으로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를 찾지 못한 놈들은 격노했고, 나를 수색하기 위한 그림갈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 군대를 이용해 촌락민들을 거칠게 끌고 갔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제 놈들이 그렇게 찾고 싶어 하는 내가 직접 머리를 들이밀어 보여주는 수밖에.

* * *

퍼억!!

“끄윽……”

거친 발길질에 여성 유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양팔을 뒤로 꺾듯 포박당한 그녀는 이미 몇 차례 구타를 당했는지 얼굴 곳곳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듯싶은 그녀였다.

“빌어먹을……”

욕지기를 내뱉으면서도 그녀는 눈동자에 독기를 빼지 않았다.

대부분 인간이 희망을 잃고 그저 죽은 듯이 살아가길 바라게 되어버린 세상이다.

구원자는 사라졌고, 신은 인간을 져버렸으니 이제 대륙에서 신을 모시는 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 되어버렸다.

촌락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저항 의지가 가득했다던 사람들은 현실을 깨달았고, 이제 대륙이 인간의 것이 아닌 마족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리스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한 외부인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됐다.

홀연 듯 나타나 촌락을 위협하던 마족들을 내쫓고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에오니샤 언니를 구해준 그 남자는 자신이 숲에서 주운 기묘한 모양의 돌멩이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연히 숲을 정찰하다 주운 물건이 필요하다는 말에 의심이 들긴 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목걸이를 주었고, 그는 같이 따라온 귀여운 수인 소녀와 함께 어디론 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때까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후 마족들이 들이닥쳐 모든 것을 부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언가를 찾는 듯 들이닥친 마족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저항군을 괴멸로 몰아붙였던 끔찍한 흑룡부대였다.

그리고 그 흑룡부대와 함께 대규모의 적들이 나타났다.

무언가를 찾듯 숲을 이 잡듯이 뒤지던 마족들은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는지 격노했고 촌락민들을 거칠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반항하다 죽임을 당한 이들도 다수 있었다.

그녀 또한 반항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좋아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전쟁포로, 그것도 여성 전쟁포로는 빌어먹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군사들에게 좋은 사기증진용으로 쓰일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마족놈들에게 장난감처럼 굴려질 바에 혀 깨물고 뒈져버리고 말지!’

그렇게 말하지만, 그녀는 쉽게 자살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산후 얼마 되지 않아 상당히 지쳐있던 에오니샤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오니샤는 유리스에게 제법 친언니 같은 존재였다.

한때 왕족이었다지만 그녀는 겁이 많았던 탓인지 평민에게조차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챙겨주고, 걱정하여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끌려왔다.

“어서 움직여라!”

퍽!!

뒤에서 거친 발길질을 당한 그녀가 또 한 번 바닥에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마족을 노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혹독한 매질이었다.

“이 건방진 년이!”

“어디에다 대고 눈깔을 부라려!”

철썩! 철썩!

“윽!”

가혹한 채찍질이 날아들자 이를 악물고 버텨보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처참한 분노였다. 풀지 못하는 분노는 그녀를 점차 곪아가게 했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녀는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멎어버린 채찍질에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는.

그녀의 앞에 선 거대한 존재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본능적인 공포가 그녀를 좀먹었다.

“눈빛이 마음에 드는 인간이로구나.”

짧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어 와 멋대로 정신을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차고 오르는 구역질에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와들와들 떨며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어찌 모를까, 최후 저항군의 사령관이 이 빌어먹을 존재를 해치우기 위해 떠났다가 살해당했는데.

마족 참모.

초대 리치 닉스.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빠져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오는 거대한 해골이었다.

그는 푸른 안광을 빛내며 유리스를 노려보았다.

“말하라. 널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이 무엇이더냐.”

대답을 하진 않았다.

“이들 때문이더냐?”

하지만 닉스는 마치 머릿속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손짓했다.

“꺅!”

동시에 어딘가에서 끌려온 여인이 보였다.

“언니!! 영감님!”

마족들의 손에 거칠게 끌려온 것은 촌락의 촌장과 에오니샤였다.

촌장은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 몸이 성한 곳이 없었고, 에오니샤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상황임에도 거칠게 다뤄진 탓에 치마 부분이 시뻘건 피로 가득했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 두 사람을 보며 유리스는 눈물을 터뜨리며 악을 썼다.

“빌어먹을 대머리 새끼! 널 저주해! 내가 죽어서라도 네놈을 죽여버릴 거다!”

공포를 이겨선 분노가 터져 나오자 그는 흥미롭다는 듯 다가와 유리스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공포를 이기다니 제법이로구나. 허나, 네년이 모르는 것이 있다.”

“……”

“나는 죽은 자의 주인이며, 군주이니. 나를 헤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족의 신이신 폐하뿐이며, 그 어떤 것도 나를 헤칠 수 없노라.”

섬뜩한 목소리에도 유리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 밑으로 들어오거라. 네게 힘을 주마.”

“x까 미친 대머리 해골 새끼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숲에 처박혀서 조용히 살겠다는데 대체 우리에게 왜 그러냐고!!”

격한 언사에 닉스의 안광이 한차례 흩날렸다.

“네가 저항할수록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받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닉스의 손이 휘저어지자 마족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촌장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고, 한쪽에선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는 에오니샤의 옷을 마구잡이로 잡아 뜯으려 들기 시작했다.

“시, 싫어! 싫어!!”

트라우마가 자극되었는지 에오니샤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마족들의 손 속은 거침없었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냐고!!!”

“왜 이러냐라…….”

짧게 중얼거린 닉스의 목소리에 섬뜩한 웃음기가 어렸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본래 그 작은 촌락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않았느니라. 하지만 네년, 제법 마나 친화도가 좋은 편이구나. 조금만 기혈을 자극하면 아주 강한 말이 될 수 있겠어.”

그 말에 유리스는 참았던 울분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절망감이 차올라 엉엉 울고 싶어진 그녀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닉스의 해골을 낚아챘다.

“빌어먹을 대머리 해골 새끼!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제발 두 사람을 내버려 둬!!”

결국, 굴복이었다.

처절한 말투로 굴복하는 유리스의 외침에 닉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구타가 멎었고 에오니샤의 옷을 잡아 뜯던 마족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좋다. 따라오거라.”

“대체 날 어떻게 하려는 건데.”

“타천사 프로젝트. 과거 한 실험체가 도망친 탓에 불완전하게 완성되었지만, 네년이 그것에 참가해준다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타천사고 나발이고 뭔지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당장 두 사람이 안전하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닉스가 내민 손을 천천히 잡았다.

검은 기류가 뱀처럼 스멀거리며 그녀의 전신으로 스며든다.

“계약은 끝이 났다.”

닉스가 몸을 돌려 이동하기가 무섭게 다시 행동을 개시하는 마족들은 마치 짜인 각본의 광대처럼 보였다.

“꺄아아악!!!”

“가만히 있어!!”

퍽퍽!!

한쪽에선 다시 구타가 시작됐다.

그 모습에 유리스가 기겁하고 소리쳤다.

“영감!! 언니!! 이야기가 다르잖아! 두 사람을 그냥 둬!!”

그 외침에 닉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혀를 쯧쯧 찼다.

“넌 이미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네 정신의 잠식이 끝났으니, 저항은 무의미하다.”

그 말에 유리스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그리고, 패배자들에게 인권 따위가 존재할 거로 생각했는가! 하찮은 인간.”

닉스의 싸늘한 목소리에 유리스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x발…… x발…….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 지옥에서 구해주기를.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신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빌고 싶었다. 제발 누가 도와주기를.

그런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닉스의 말대로 그녀의 육신은 기이한 힘에 의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망자의 군주, 골렘의 왕이니. 내 꼭두각시가 된 네년에게 자의식 따윈 허락하지 않는다.”

그 말에 유리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혀조차 깨물지 못하는 육신은 입술을 터지도록 깨무는 게 한계였다.

분해도 너무 분한 그 지독한 상황 속에서.

유리스는 문득 닉스가 걸음을 멈춘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닉스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의 키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한 소년에게.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빛의 눈동자.

인간이었다. 대체 어디서 들어온 것인가. 또 언제 저기 나타난 것인가.

촌락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인간이 짓고 있는 미소는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그래, 자신들에게 홀연히 찾아온 그 인간 남자처럼.

“말재주가 제법이다?”

“음?”

닉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소년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말, 공감한다. 패배자에게 인권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마족들의 전진기지에, 홀로 유유히 나타난 인간. 그제야 유리스는 알 수 있었다. 저 미소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에오니샤를 도와주고 자신의 목걸이를 받아갔던 그 정체불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왜인지 외향은 변했지만, 처음보다 저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인간? 네놈은 어디서 나타난 것이지?”

소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닉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마족들이 잡아온 인간 중에 그 같은 이는 없었으니까.

홀연히 나타난 인간이 앞을 막아서고 있자 닉스의 안광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흠…… 네놈도 마찬가지로구나 제법 마나의 그릇이 훌륭해. 네놈도 나를 따라라. 그렇게 하면……”

“솔직히 너 같은 돌팔이 리치 밑으로 들어갈 만큼 내가 막돼먹진 않았는데.”

적, 그것도 최대의 적을 눈앞에 두고 저게 할 소리란 말인가. 주변엔 이미 소년을 포위한 마족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소년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마족 최대 전력인 초대 리치 닉스.

즉 최종 보스다.

그런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소년은 너무 여유로웠다.

저항군 사령관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도 결국 닉스에게 큰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전멸하지 않았던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라고, 눈앞의 그 거대한 해골은 단순히 홀로 맞설 존재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걱정대로 닉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단죄를 내리려는 듯 거대한 힘을 내뿜었다.

“겁이 없구나! 인간.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내 의지면 네놈은 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가……”

“거, 더럽게 말 많네. 다 삭아 빠진 해골이.”

짧은 침묵 끝에 닉스의 눈이 번뜩였다.

콰드득!!

동시에 지면이 뒤틀리며 거대한 입으로 변했고 소년을 한입에 집어삼킬 것처럼 덮쳐들었다.

순식간에 닉스가 본능적으로 내뿜는 힘이 움직임을 제한한다.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서 소년에게 남겨진 미래는 곧 거대한 입에 집어삼켜 지는 것뿐이었다.

저 미치광이가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비명을 지르려던 유리스는 곧 이어진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소년을 집어삼키려던 거대한 대지의 입이 일정 거리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마치, 술자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처럼.

“넌 그냥 운이 없었던 거다. 닉스.”

저 운이 없었다는 말도 닉스가 유리스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소년은 마치 닉스를 잘 아는 듯했다.

“넌 날 모르지? 나는 네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데. 그냥 재수가 없어서 죽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그 말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미소와 함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소년의 전신에서 세상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닉스의 골체가 일순간 삐걱거리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닉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돼, 새끼야.”

반면 이 사태의 주범인 소년의 목소리는 느긋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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