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6화
이 세계의 규칙에는 관심 없는 슬리지아의 목적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그녀의 동족이자 환수왕 메가로드리아를 잠식하고 있던 심연의 공주, 울드를 구하러 온 김에 그녀를 차원 균열에 가둬 서서히 죽어가게 했던 나를 한번 손봐주겠다는 목적성이 다분했다.
결과적으로 차원도약이라는 놀라운 힘을 지닌 슬리지아는 오로지 내 흔적만을 쫓아 이곳까지 날아왔고,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관심도 없는지 제멋대로 행동하며 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
전체적인 차원을 구분할 줄은 알면서도 세부적으로 나를 찾는 건 쉽지 않은 건지.
[어찌할 텐가?]
“뭘 어찌합니까. 그년 목적은 접니다. 여기 있는 걸 드러내면 알아서 와줄 거고.”
그녀는 이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건 세력구도가 어찌 되건 상관없다.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넘어온 멍청이일 뿐이니, 내 위치만 파악되는 순간 곧바로 날아오리라.
[그런 것치고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네.]
“안 움직인다고요?”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 그년은 무조건 옵니다.”
무조건이요.
결국, 남은 것은 나와 에이리아가 이곳에서 체류할 수 있는 시간과 그녀의 상태가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유르기안 대륙처럼 힘을 쓴다고 무작정 시간이 줄어드는 세상은 아니라지만, 이미 나는 많은 시간을 사용한 전례가 있었다.
그렇기에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대량의 시간이 소모되는 짓은 의미가 없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최소한의 간섭으로 균형유지, 이루어낼 시 데이비 올 라운의 육신 상태에 무관하게 환골탈태 스택을 적용,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의 유전자 정보 획득.
말없이 그 항목을 누르자 추가 요소가 마치 메모장처럼 드러났다.
[주신의 이름 아래에 뒤틀린 평행선에서 데이비 올 라운, 에이리아 알 린디스의 체류시간을 소수연장.]
[주신의 이름으로 평생선 세계의 주민에게 데이비 올 라운의 존재, 에이리아 알 린디스의 존재를 일차적 은폐.]
나름대로 확실한 백업이긴 하다.
꽉 막힌 세계의 규칙과 그래도 융통성이 있는 신의 영향력 싸움은 제법 흥미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주신 프리아 여신조차 내게 간섭력의 한계를 늘려주진 못했다.
그 말인즉, 약해진 신의 영향력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 걱정도 사라졌고 쓸데없이 환각 마법으로 혹시나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게 되었다.
마족 전초기지에 남아있는 막사.
간이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에이리아의 이마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준 나는 그녀를 천천히 등에 업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막사를 나섰다.
이곳에 잡혀 왔던 촌락민들은 곧바로 이곳을 떠났다.
그들이 남아있는 건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메가로드리아.”
이윽고 카드를 열어 환수왕 메가로드리아를 소환해냈다.
[계약자가 없는 이상 그 여자의 잠식은 계속해서 나를 좀먹을 거다, 인간.]
“알아. 그래서 해결책도 구해놨잖아.”
울드의 힘은 추측하기로 잠식, 혹은 장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심연의 공주들은 각기 자신만의 힘을 지니고 있다.
슬리지아가 공간 관련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 울드는 잠식에 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마치 서로 간에 관장하는 영역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슬리지아의 공간이동도 놀랍긴 하다만, 울드의 잠식능력은 계약자가 없다고 해도 엄연히 환수왕인 메가로드리아를 잠식시킬 정도였다.
[해결책?]
“그래. 네 본래 계약자의 유전자 정보를 내 몸에 대입해서 환수 소환사의 특질을 만들 거다.”
[나와, 계약을 하겠다고?]
“그래.”
넌 다른 차원의 존재니까.
존재해선 안 되는 이곳처럼 평행선이 아니니 세계의 규칙이 너를 제재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특히 환수는 차원에 상당히 자유롭게 불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던가.
[……]
“뭐냐? 그 의심스러운 눈빛은?”
문득 저놈의 붉은 안광이 기이함으로 물드는 것을 느낀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계약,”
[……셰인이 죽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환수왕들은 각기의 영역에서 세상을 지키고 조율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상도 없어져 버렸군. 멸망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의 광명을 찾으려면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곳도 그리되게 둘 순 없다. 넌 내가 아는 한에서 그 괴물 같은 여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하지만 네 말은 이해할 수 없군. 유전자를 대입한다니. 그리고, 현재는 몰라도 저쪽 세계에 있을 때의 네 몸은 내 힘을 감당할 만큼 강한 육신이 아니었다.]
그의 우려에 나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벼 팠다.
“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고,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대답은 물론 정해져 있지만 말이다.
나는 에이리아를 안아 들고 그의 손에 안겨주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말없이 받아든 메가로드리아는 자신의 손에 누워있는 에이리아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조용히 물어왔다.
[어쩔 생각이지?]
“여기서 한바탕 할 거다. 내가 일을 치면 넌 이곳을 떠나.”
[내 힘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의 우려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힘이 필요해?”
미안하지만 전혀 필요 없어.
담담하게 말하며 전신으로 기세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메가로드리아가 침묵한다.
그녀는 내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 여기 있소, 한다면?
[9서클 역회전]
[어스퀘이크]
[대 격변]
쿠웅!!
내가 선 자리를 기준으로 거대한 파장이 일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어디 오딘표 특제 지형변화 마법 좀 쬐금만 맛봐라.
쿠르르르르릉!!!!
마치 똬리를 트고 있던 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대 균열이 터져나가며 그 안에서 시뻘건 마그마들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라면, 대륙 반대편에 있어도 이 미친 마나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만한 존재감이었다.
콰드드드득!!
거침없이 갈라지고 마그마를 내뿜는 지면은 곧이어 뒤틀리고 갈라지며 일대의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간단한 어스퀘이크 마법이지만, 마나가 들어간 만큼 효율이 극대화되는 역회전 마법이다.
3서클의 파이어볼 마법이 심판의 날 떨어질 운석마냥 파괴적인 화이트노바가 되는 마법인데 5서클 어스퀘이크라고 다를까.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해버리는 평야를 보며 나는 금방이라도 공간을 열고 나타날 그녀를 기다렸다.
[터무니없군!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냐!]
“아, 기다려봐. 알아서 튀어나와 줄 거야.”
그년은 꼭 온다.
“10초 정도.”
짧게 숨을 고르며 느긋하게 10을 헤아렸다.
9, 8, 7……
“3, 2, 1.”
……
고요한 침묵 속에서 지면이 파괴되는 소리만 들려온다.
[미안하네만 자네, 그 슬리지아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네. 그녀는 이번 일을 무슨 유희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야.]
“이 미친년이?”
당장에라도 미끼를 물고 와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겁이라도 자셨나.
뻘쭘할 정도로 허무한 결과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애꿎은 지형만 박살 났군, 향후 수백 년간은 이곳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겠어. 아이고, 아깝네! 아까워.]
마치 비아냥거리는 듯한 관조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군.]
멀찍이서 지켜보는 메가로드리아 또한 나를 의문스레 바라본다.
그 둘의 목소리에 조용히 지면을 들쑤시고 있던 나는, 곧장 양손을 펼쳤다가 강하게 마주쳤다.
짜악!!
동시에 수백, 아니 수십 킬로미터를 집어삼켜 버렸던 지옥도를 열어젖힌 균열들이 일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극…… 쿵!! 쿵!!
연쇄적으로 파괴활동을 일삼던 균열들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메가로드리아의 등위에 올라탔다.
“이제 여기서 어그로를 끌었으니, 그 멍청한 여자는 이곳에 내가 있는 줄 알 거다. 가자."
됐어, 자연스러웠어.
[……]
뭐, 왜.
* * *
곧바로 튀어나와 나를 맞이할 줄 알았던 슬리지아가 이것을 유희라고 여기게 만든 근원은 아마 아스타로트가 아닐까.
내 예상대로 내가 떠나고 아스타로트는 페르세르크까지 제압한 슬리지아를 혓바닥으로 구슬려 자신들의 전력으로 이용하려는 듯 보였다.
그 점에서 나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왜 심연의 공주는 페르세르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페르세르크를 보고 그녀를 여왕, 혹은 어머니라 부르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던 다른 심연의 존재와 다르게 심연의 공주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었다.
모든 일에 관심 없는 슬리지아, 그리고 동생에게만 관심이 있는 울드.
마지막으로 페르세르크가 있는 티오니스에 오래전부터 와있었으면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던 베르단데까지.
베르단데라는 심연의 공주는 직접 만나본 적이 없지만, 나머지 둘은 분명 페르세르크에게 관심이 크게 없었던 게 분명했다.
마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엔 본래 세계의 페르세르크는 엄연히 마왕이 아닌 일개 마족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서도 뭔가 알력싸움이 있는 건가.”
생각해보면 울드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어찌할 생각인가?]
슬리지아를 처리하는 데엔 힘을 아낄 필요가 없는데.
마족은 예외인 상황, 내 입장에선 빌어먹을 슬리지아가 마족의 뒤편에 숨어있는 꼴이었다.
“안 나오면 직접 끌어내야지요.”
[그 여자는 전쟁유희쯤으로 여기고 있네. 그 탓에 마족들은 그녀가 심은 무언가에 조종당하기 시작……, 이런!.]
그때였다. 관조자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녀가 공간을 찢었네. 마족들을 이용해 서부대륙을 급습하기 시작했어! 저항군들과 생존자들이 모인 곳이네!]
공식적인 저항군이 사라지고 소수의 저항군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곳.
그들까지 죽임을 당하면 인간은 완전히 끝이다.
균형유지는 실패한다는 소리였다.
이걸 정말 그저 유희로만 생각했기에 나타낸 일일까.
아니면, 그녀 또한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생긴 것일까.
“진군을 시작했다고요?”
[그녀의 공간 전이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네!! 늦으면 다 죽을걸세!]
서부라면…….
저항군이 있는 위치이며, 내가 흑룡을 이용해 촌락민들을 보내버린 곳이다.
[중간에서 그들을 가로막는다면 저지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거기서 힘을 써서 마족에게 영향이 가는 순간…….]
“어떻게 안 됩니까?”
내 질문에 관조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꼭 죽여야 하는 인물인가?]
“그냥 두면 아주 위험하죠.”
담담한 내 답변에 그가 말했다.
[좋네. 내가 힘 좀 써봄세. 하지만 아주 잠깐일세. 10분……,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10분? 10분이라고?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합니까?”
[역시 불가능하겠지?]
“3분이면 됩니다.”
그들이 도와준다면 말이다.
제 잘난 맛에 버티고 있는 그녀에게 인생 실전을 보여줄 때가 왔다.
“메가로드리아.”
짧게 메가로드리아를 부른 내가 천천히 메가로드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목적지를 말해라.]
“방향을 틀어, 서부대륙에 있는 ‘현’ 국으로 향한다.”
* * *
사박…… 사박…….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인간이 소수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벼운 경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유명한 마족 사단장 크리드의 위치는?”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곧바로 강습 가능합니다.”
몇몇 남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중년 사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두려울 거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잊지 마라. 인간은 멸절했고, 이제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소리다.
“그들의 손에 죽어간 우리들의 소중한 사람, 가족 모두를 잊지 마라.”
짧게 중얼거린 그가 단검을 뽑아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가죽 물주머니에 피를 떨어뜨리고 그 물을 마셨다.
그러자 나머지 인원들이 똑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다.
“피가 섞인 마유주다. 모두 마셔라. 마지막 만찬이 될 것이니. 우리는, 복수를 위해 모인 원귀들이다. 죽더라도, 그 빌어먹을 놈들을 하나라도 더 데리고 떠난다.”
결연한 그 목소리에 희망은 없었다. 지독한 복수심과 증오심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조하듯 다른 모두가 같은 마음가짐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어둑어둑해진 평야.
수많은 귀족과 장군들을 암살했던 마족 사단장 크리드는 주로 부하를 많이 데리고 다니지 않기로 유명하다.
넓은 평야에 홀로 늑대 마수만을 데리고 있는 그는 모닥불을 지피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술을 데워 마시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이 퍽 음산해 보인다.
그런 그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 노려보던 저항군들은 침착하게 그가 한참 동안 취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한참 술을 마셨다고 판단했을 때.
저항군의 리더였던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잊지 마라. 우리가 여기서 저자를 막지 못하고 죽게 되면 다른 복수귀들이 많은 복수를 이루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노출될 거다. 반드시 이곳에서 놈을 죽여라.”
그 말과 함께 몇몇이 화살을 활시위에 걸어 당겼고, 나머지 몇몇은 검을 뽑아 들고 빠르게 그를 향해 쇄도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의 암살이었다.
하지만.
선두에 서서 빠르게 달려나가던 리더는 갑작스레 눈앞에서 찢어지는 공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퍼석!!
동시에 균열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에 맞고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갔다.
“끼히히히히히힉!!”
“마, 말도 안 돼!”
균열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몬스터였다.
그리고 몬스터에 이어 수많은 마수, 마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족들의 기동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건 저항군들로서도 처음이었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남은 저항군들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제압당했다.
“고요한 밤이야. 암살하기 좋은 밤이라고.”
그리고, 제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저항군 남녀들을 향해 말없이 술을 홀짝이던 사단장, 크리드가 다가왔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새카만 모습이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자네들을 잡느라 오랜 시간 고생을 좀 했네. 그동안 잘도 동족을 죽였더군.”
“이 악마!!”
“퉤!”
크리드의 말에 저항군들이 악을 쓰고 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한 명의 머리를 지그시 밟았다.
“그래. 암살실력은 대단하네. 하지만 운이 없었어. 이번에 본성에서 대단한 존재가 힘을 빌려주기 시작했다는 모양이야. 실제로 자네들이 보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지 않았는가.”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공간을 찢고 나타난 대규모 병력들.
저런 이동수단이 있다면 전쟁은 압도적으로 한쪽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인간이 불리한데 마족이 이제는 공간까지 넘나들기 시작하니 절망감이 더욱 짙어졌다.
“더러운 놈!”
“암살해볼까 하네.”
“다 보고 있는 데서 암살은 무슨!”
“허허, 보는 놈이 없으면 암살 아니겠나.”
느긋하게 말하며 손등에서 날카로운 클로를 뽑아낸 그가 저항군 여성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맞아. 죽이는 걸 보는 놈이 없으면 암살이지.”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수백 명의 마족이 포위하고 있는 곳에서 누가 이런 느긋한 말을 한단 말인가.
크리드는 자신의 부하도 저항군도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을 크게 뜨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등에 한 소녀를 업은 채 느긋하게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한 인간 소년의 존재를 말이다.
“인간?”
너무 의아스러운 모습이라 크리드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그러니까 나도 너희들을 암살하마.”
쿵…….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무언가가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늘하게 식는 분위기 속에서 크리드는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꼈고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임퍼펙션 데스로드의 이름으로 명한다.]
[정리해.]
콰드드드득!!!
동시에.
마족들을 포위하듯 사방에서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는 수많은 토병들이 일어나며 흙으로 된 무기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지배자의 은총에 보답하라!!!]
왕관을 쓴 토병의 외침은 놀라울 정도로 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