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5화
분신체가 와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경계의 현장이었다.
마족들은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경계했고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직접적인 원한 관계는 없다 해도 그들은 지독한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인간을 멸시하고 증오했다.
물론 대놓고 나를 멸시했다간 소리 없이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건드리는 이는 없었다.
뭐라 해도 결국, 나는 참모장 닉스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갑작스레 나타난 괴물 같은 인간이니 말이다.
마족들이 나를 다시 부른 것은 반나절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동안 나는 본체를 통해서 전초기지의 인간 포로들을 빼내 이동시키는 데에 시간을 투자했다.
“따라 나와라, 인간.”
내가 구금된 허름한 방으로 들이닥친 마족 병사들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창을 들이밀었다.
“거, 묶고 있던 사슬이나 풀어주고 경계나 하지?”
“닥쳐라!”
본래라면 당장 구타가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그들은 내게 두려움을 품은 것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 좋은 예로 나를 보며 파르르 떨고 있는 몸을 쉽게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폐, 폐하께서 찾으신다!”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직접 전쟁을 종결 낼 필요도 없다. 내가 할 것은 그저 존재의 각인뿐. 이미 저지른 일은 저지른 일이니 더는 무력을 쓸 것도 없이 그저 저들이 알아서 판단하게 유도만 하면 된다.
물론 이것 자체만으로도 간섭력이 되지만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조자는 그 정도 틈새 공략은 자신이 어떻게든 무마해볼 수 있다고 말했었다.
잘못해서 꼬이면?
다 엎어버리는 수밖에, 이 세상을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끼이이익!!
“폐하! 인간을 대령하였나이다!”
병사의 외침과 함께 어전의 문이 열리며 몇몇 마족의 시선이 내게 쏘아져 들어왔다.
처음에 비하면 정말 극소수의 몇몇이었다.
대공급으로 추측되는 마족과 뱀파이어 통치자인 글러트니, 이외에 여러 마족.
역시나 경계와 적의가 가득했다.
왜, 불만들이 가득한 표정들이신가.
아쉬울 게 없는 내 입장에선 최대한 느긋한 표정이 우선이었다.
불만이면 덤벼봐라. 사실 나는 한 대만 맞아도 죽는다!
분신체에 담아둔 힘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흑룡을 타고 내가 분신체를 이곳으로 날려 보낸 이유는 이들과 푸닥거리를 해서 얻을 것이 손해가 더 크기 때문이었다.
“결정은 내렸나?”
내 물음에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는 짧은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자리를 비켜주겠느냐.”
“폐하! 속을 알 수 없는 자이옵니다!”
“폐하의 옥체에…….”
“이자의 육신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 짧은 물음에 모두가 침묵했다.
“어떻게 만들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체를 가진 분신체로구나. 술자로부터 한참이 떨어져도 멀쩡히 움직이며 술자와 실시간으로 연동되어있지. 본체가 아니기에 그 힘 또한 미약하기 그지없어.”
마법사인 그녀 답에는 빠르고 정확한 분석이었다.
“제법 눈치는 빠르네.”
내 미소에 그녀는 파리해진 표정으로 마족들을 둘러보았다.
“명령이다. 다들 물러가 있거라. 이자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폐하.”
명령은 명령이다. 이거지.
불만은 있지만 대놓고 표출하지는 못하고, 그녀를 두고 다른 마족들이 하나둘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끼익…… 쿵!
이윽고 페르세르크와 나만이 남은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전쟁을 막고자 한다고.”
“그래.”
“어째서지? 본녀가 본 그대는 그때도 그랬지만 힘의 반절도 드러내지 않았어. 마치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눈치 빠른 그녀의 말에 나는 침묵을 고수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어 수단이 있던 회랑과 다르게 이곳에서 마냥 내 힘을 깡그리 털어내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감당되지 않는다.
지금만 해도 머릿속에서 광기와 충동이 날뛰며 당장에라도 페르세르크를 자빠뜨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만한 힘이 있다면 전쟁을 막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을 부흥시키는 것도……”
“나름대로 사정이라는 게 있다. 본래라면 인간이 어찌 되건 마족이 어찌 되건 이쪽 사정은 관심 없다만,”
그리 말하며 나는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아직 내 몸에 남은 잔류 심연의 힘으로 활성화한 상태창.
분명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던 공란이었지만 지금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최소한의 간섭으로 균형유지, 이루어낼 시 데이비 올 라운의 육신 상태에 무관하게 환골탈태 스택을 적용,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의 유전자 정보 획득.
100스택.
마나 신성수를 한번 받아들인 내 영혼은 육신과의 동기화율이 좋아졌다.
이제 본래 세계로 돌아가 육신을 다시 한 번 마나 신성수에 담그면 환골탈태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환골탈태 100 스택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한 번 정도는 완벽하게 가능하지 않을까.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환수 소환사이자 내 스승 중 한 명이었던 셰인 스크리프트의 유전자 정보였다.
그의 유전자 정보를 얻는다는 말은 단순 보면 별거 없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내게는 그 유전자 정보를 이용해 육신의 구조를 아주 잠깐 수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
주인을 잃고 방황하는 메가로드리아를 완전히 내 손에 거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현재 힘의 상당수를 발휘하지 못하는 놈을 포함한 세 환수왕을 내가 날름 해먹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기회 자체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원하나?”
“전쟁이라고 할 게 있느냐. 이미 인간을 포함한 대륙 연합 저항군은 패퇴했고, 남은 잔류인간들은 그저 도망자 신세인 것을.”
“너는 알 텐데. 한쪽이 극도로 균형이 불균형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왜 마왕과 대적자가 존재하고 균형을 맞추는지.
그녀는 알 것이다.
그 빌어먹을 동전 뒷면의 힘에 가장 많이 노려진 존재일 테니까.
“본녀는…… 전쟁을 멈추고 싶다. 이 이상의 무의미한 살생은 아무런 이득도 없어. 비록 닉스에게 제어를 당해 지금까지 전쟁을 유지해왔지만. 이제라도 닉스가 사라진 것이 확실하다면.”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결연히 뜨며 말했다.
“이 이상의 살육은 옳지 않아.”
“욕심부리지 마. 나는 네게 항복을 권유하러 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그대 혼자서 마족 전체를 상대하겠다?”
“다른 종족은 몰라도 마족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할걸?”
페르세르크도 그런 존재였지만 나 또한 마족의 왕.
마왕의 위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가져오는 메리트는 어마어마하다.
“선택을 내리면 돼. 괜한 욕심을 더 부리다 종족째로 멸절당하던지, 아니면.”
더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을 멈출지.
결정은 그녀가 내리는 것이다.
물론, 그녀 또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택할 인물이다.
“좋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땅덩어리로의 진격은 그만두도록 하겠다. 마족은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얻어냈으니까.”
“그거면 돼. 어차피 머릿수도 얼마 남지 않아서 땅이 많아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내가 아니라 인간을 이끌어나갈 이를 데려와서 정하도록 하지.”
전쟁을 막고 싶어 하는 마족과 전쟁을 끝내버리려는 인간.
거기까지 보면 더는 복잡하게 의논할 것도 없었다.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상은 말이다.
그때였다.
“폐하, 기다려주시지요.”
갑작스레 난입한 목소리에 페르세르크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아스타로트 대공.”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둘만 있는 어전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그와 함께 로브를 뒤집어쓴 장신의 여성 또한 존재했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개 같은 냄새가 슬슬 풍기는 기분이었다.
“본녀가 분명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일렀거늘.”
“폐하, 이런 상황에서의 화친은 시기상조입니다.”
싸늘하게 말하는 아스타로트 대공의 말에 페르세르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복잡하게 그럴 거 뭐 있어. 결국, 저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거 아니야? 꺄하하하! 마족이라는 벌레도 결국은 겁많은 벌레구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이에 페르세르크가 싸늘한 표정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머, 귀여운 벌레가 제법 노려볼 줄도 아는걸?”
빙그레 웃으며 그녀가 로브를 벗어 넘긴다.
화아아악!!!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 거대한 힘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아스타로트 대공과 페르세르크의 몸이 그대로 짓눌리듯 비틀거렸다.
“크윽?!”
번잡한 로브를 완전히 벗어던지며 그녀가 가진 붉은 적발을 휘날렸다.
날카롭고 흰 이빨이 번뜩이며 얇은 혀가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이, 이보시오!”
“인간이라……. 퍽 웃기단 말이야. 마침, 내 동족에게 개 쪽을 준 것도 인간이었는데 마침 잘됐어.”
빙그레 웃으며 말한 그녀가 반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내게 덤벼들었다.
그녀가 방금 내뿜은 것은 심적 압박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내 힘으로도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했었던 심연의 공주, [울드]가 내뿜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심연의 존재와 같은 힘을 내뿜는다고?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존재가 이곳에 와있다는 것을 말이다.
문제는 그 힘이 울드 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이미 노출되어본 경험도 있고 지금 내 상태를 생각하면 당장 큰 영향은 없지만, 솔직히 또 다른 심연 공주의 출현에 놀라움이 앞섰다.
콰드득!!
목뼈가 부러진 것처럼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내 육신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뭐야. 속이 빈 껍데기일 뿐이잖아? 이런 하찮은 껍데기에 속았던 건가?”
그 말에 페르세르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본신으로 대뜸 찾아올 멍청이였다면 이야기를 들을 가치도 없었겠지.”
그녀의 말에 적발의 여성이 흥미를 잃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때, 벌레 한 마리를 밟아 죽이는 김에 몇 마리 더 밟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담담하게 말한 그녀의 시선이 나를 품평하듯 훑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내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뼈가 부러졌지만, 이 몸은 분신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머리만 남아도 말을 할 수 있는 몸이라는 소리였다.
“심연 쪽에서 여길 어떻게 넘어왔지?”
내 질문에 그녀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오호라, 너였구나? 울드를 그 꼴로 만든 하찮은 벌레가. 놀랍게도 나는 공간을 다루는 데에 재능이 좋은 편이라서 말이야.”
“차원 균열 너머에 처박아버리긴 했는데, 꽤 꼴이 보기 좋았나 본데?”
“어머나, 그걸 말이라고. 아주 곤죽이 되어있던 걸 겨우 구해냈지 뭐니.”
우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내 목뼈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내 목이 덜렁덜렁한다.
고작 머리카락 하나로 구현해낸 분신이라 내고성이 말도 못할 정도로 약하기 그지없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유쾌하진 않네.”
콰앙!!
그녀는 나를 들어 올린 채 근처의 기둥에 나를 처박아버렸다.
동시에 내 육신의 반절이 찌그러지며 단단한 흑요석 장식 기둥이 박살 나듯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참 특이한 곳이야. 묘한 기분이 오래 있고 싶게 만들지를 않아. 그래도 울드 그년을 그 꼴로 만든 벌레가 이곳에 있으니 찾아온 건데 말이야? 제법 빨리 찾았어.”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 지저분한 세계의 주민을 볼 줄은 나도 몰랐지. 바퀴벌레 같은 게 기어 나오긴 어딜 기어 나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면서 나는 머릿속에 생각해놨던 여러 계획을 모조리 리셋했다.
화친? 평화?
빌어먹을 눈앞에 있는 이 망할 여자가 있으면 그딴 건 지금 아무런 쓸모가 없다.
침묵한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 페르세르크가 다급히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다.
“그만!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이상 혼란을 야기하……”
콰앙!!!
페르세르크는 적발을 가진 심연의 공주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아직 모르기에 상황을 일단 종식 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적발을 가진 심연의 공주를 자극한 꼴이 되어버렸다.
“크윽?!”
순식간에 벽에 처박힌 채 그녀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촉수에 몸을 포박당한 페르세르크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저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생리적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외형에는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싶었다.
“그 입 닥쳐, 벌레. 이 이상 내 일에 끼어들면 먹어치워 버리는 수가 있어.”
“이, 이보시오! 슬리지아!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아스타로트의 격분한 외침이 들려왔다.
“마음이 바뀌었어. 그래도 벌레의 재주가 가상해서 유흥 정도는 즐기려고 했지만…….”
내 몸을 포박하고 있던 슬리지아라는 이름의 심연의 공주를 향해 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생명체에게도 먹힐지는 조금 미지수이지만, 인간의 외향을 베낀 것뿐인 이놈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반드시 먹힐 것이다.
팍! 파바바바박!
옅은 소리와 함께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가락이 그녀의 팔뚝을 수차례 찔렀다.
[이두상박 점혈기공]
[무장해제]
툭!
동시에 그녀의 손에 힘이 풀리며 내 육신이 풀려나자 나는 그대로 그녀를 걷어차며 슬쩍 거리를 벌렸다.
좀 전의 공격으로 분신체를 유지하는 마나가 대부분 증발해버렸다.
나는 손과 발, 그리고 머리의 일부가 연기로 변해버린 내 모습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미련 없이 힘을 풀어버렸다.
동시에 내 육신이 마치 힘이 빠지듯 순간 반투명해졌다.
그리고 나는 사라지기 전, 다른 대화 대신 그녀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인 곧게 뻗은 중지를 들어 보여주었다.
당연 이 뜻을 모르는 슬리지아가 눈을 찌푸리며 경계한다.
“그건…… 뭐지?”
그런 행동에 말없이 자신의 팔을 주무르던 그녀가 물어오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친절하게 답했다.
“엿이나 먹으라고.”
“뭐?”
“눈에 띄지 마라. 지금 상황에 와서 너희들만 나를 찾고 있던 게 아니야.”
스팡!!
두 개로 쪼개진 의식이 한순간에 돌아온다.
말 위에 올라 조용히 걸어가던 나는 의식이 하나로 합쳐지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영감님.”
[놀랍군, 그녀의 존재는 자네와 같이 이 세상 외의 것이로군.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혼란스러운 존재야…….그녀를 처리하는 데에는 자네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없을 걸세.]
“듣던 중 반가운 소리.”
[하지만, 그녀가 있는 곳이 마족의 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지지.]
뭐 이렇게 까다롭게 따지는 것도 많아.
짜증스레 혀를 차보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저렇게 멋대로 찾아온 불청객인 주제에 슬리지아는 심연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먹을 것이다.
바로 세계의 규칙에서 치외법권이라는 개 사기적인 효능을 말이다.
치외법권이고 나발이고 내 멋대로 규칙을 독립시키는 금기의 업과 비슷하지만, 그 방향성과 영향력이 살짝 다르다.
슬리지아라는 적발의 심연 공주는 엄연히 강적이다.
회랑의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가 없다고 해도 세 마리의 환수왕을 제압하고 잠식시킨 울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당장 울드조차 이기기 힘들던 내 스펙으로는 그 한참 상위의 존재인 슬리지아는 그야말로 좋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래.
현재 본래 세계에서의 내 상태로는 말이다.
이곳은 평행선의 세계.
나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있기에 육신보다 혼의 힘이 강하고, 그 덕에 혼과 육신의 동기화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재밌겠네.”
힘에 자신이 있는 저쪽과 마찬가지로 힘에 자신이 있는 현재의 나였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하게 힘만 휘두르는 저쪽과 이쪽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저들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