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4화
“대답은?”
크게 쪼아댈 것도 없었다.
애초에 위험성을 잘 아는 그녀와 나 사이에 협의만 잘 이루어지면 전쟁의 방향을 비틀 수 있으니 말이다.
“묻겠다. 그대는 인간이 이토록 많이 죽어 나갔는데에도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이냐?”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떨 거 같아.”
“본녀의 눈에 비친 그대는 절대 그냥 넘어갈 인물은 아닌데.”
“바로 봤어. 솔직히 당장 너희들을 다시 인공마계로 쫓아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
담담하게 말하는 내 장담에 마족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레이나는 내 세상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흐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허용되지 않은 루트로 유입된 외부의 존재가 끼어들어서 뒤틀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에이리아 황녀와 나는 엄연히 불청객이니 말이다.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폐하! 지금이라도 이자를 죽이고……”
“아니, 그의 신변을 구금하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자세한 사안이 결정될 때까지는 그를 구금시켜.”
그 말에 마족들, 특히 급진파 뱀파이어인 글러트니나 아스타로트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몇몇 마족은 페르세르크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내비쳤다.
“저하! 아니 되옵니다! 이제 와서 화친이라니요! 고지가 눈앞인데!”
다급한 글러트니의 외침이 쏟아져 나왔지만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건 내가 아니라 그녀가 내릴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 * *
외부에서 온 인간, 스스로를 데이비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인간이 구금되었다.
이후 마왕 페르세르크는 차후 다가올 위협에 대해 아주 조금만 언급한 후 이 이상 무의미한 전쟁보다는 화친을 제의했다.
“아버님, 어떤가요?”
“인간은 증오스러운 존재다. 리리네.”
“네…….”
“하지만 폐하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닌 거야.”
짧게 중얼거린 그가 리리네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더냐. 인간도 인간이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저항에 죄 없는 마족 청년들도 다수 죽어 나갔다. 그것은 분명 그냥 넘기기 어려운 문제인 게지.”
무엇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모장 닉스가 저지른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허면……, 폐하의 뜻에 따라 이제라도 전쟁을 멈추시는 건가요?”
“아니,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멸절해야 하는 게다.”
단호한 그 외침에 리리네가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버님……,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나실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리리네. 나의 소중한 며늘아가.”
“아버님.”
“넌 내 딸과 다름없다. 그러니 이 시아비를 슬프게 하지 말아다오.”
“……뜻에 따르겠습니다, 아버님.”
천천히 물러나는 리리네의 모습에 아스타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쾅!!!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험악한 인상의 뱀파이어가 걸어들어왔다.
“글러트니 공.”
“아스타로트 대공.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저희 뱀파이어가 고작 이딴 상황에서 인간과 화친이나 하고자 마족의 편에 다시 선줄 아십니까?!”
그의 노호에 아스타로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는 리리네를 바라보았다.
“나가보려무나. 리리네.”
“예, 아버님.”
그 말에 리리네가 두려운 듯 글러트니를 보며 조심스레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스타로트를 향해 소리치던 글러트니의 시선에 잠시 그녀가 담겼고, 아주 잠깐 음욕으로 가득 찬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섬뜩한 기분에 리리네는 손을 파르르 떨었지만 아스타로트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입조심하시게. 내 비록 무력 면에선 닉스 참모장 수준은 아니라지만 자네 하나 처리하는 데엔 어렵지 않아.”
“큭……, 이건 규정 위반입니다.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인간을 뿌리 끝까지 멸절시키고 노예로 잡아들여 저희에게 넘겨주시겠다고.”
그 말에 아스타로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자네가 할 텐가?”
“예?”
“닉스 참모장을 단신으로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이네. 처음, 죽어가던 세계수를 죽였다고 했을 때도 조금 의문이었네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극도로 위험한 인간이야.”
“지금은 저희 손에 있지 않습니까! 그를 여기서 암살한다면!”
글러트니의 말에 아스타로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네가 보기에 그 인간이 그런 판단도 못 하고 이곳까지 찾아올 만큼 애송이로 보였는가?”
“아니라는 보장은 또 없지요.”
“자네의 의견에는 나도 동조하네. 화친은 현실적이지만 우리들의 숙원과는 거리가 멀지. 이는 옳지 않아.”
“맞습니다!”
“허면, 어찌할 텐가. 마왕 폐하께선 화친을 염두에 두고 계시네. 갑자기 나타난 저 데이비라는 인간은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큼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지. 전쟁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 저자가 전면에 나설 테고, 그로 인해 생길 수많은 희생은 누가 감당할 텐가.”
그의 설명에 글러트니가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인간 하나입니다.”
“그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과거 3천 년 전 마족이 대륙에서 인공마계로 쫓겨났었네.”
검신 하레스.
그의 존재였다.
아스타로트는 그것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그때 당시 역사의 산증인인 페르세르크 마왕과 참모장 닉스의 증언은 일치했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도 있네.”
“그러면……”
“게다가 나는 그 점이 걸리는군. 그 인간과 마왕 폐하께서 동시에 언급한 위협.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침묵하는 글러트니를 바라보며 아스타로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의 무력이 사실이라고 치게. 그렇다면 기회를 엿봐야지.”
페르세르크의 명령도 어기지 않고 미심쩍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것.
“휴전을 요청할 것이네. 종전이 아닌 휴전. 언제고 다시 검을 들 수 있게.”
휴전은 종전과 다르다.
언제고 다시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바로 휴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닉스의 반란에 이어 페르세르크 마왕 폐하의 의중도 이 늙은이에겐 혼란스럽기 그지없군.”
“답답하군요. 솔직히 역대 최강의 마왕이라기에 기대했었습니다만, 정말 실망투성이입니다. 기백도 없고 연약한 계집아이일…… 커헉!!”
그리 외치던 글러트니가 눈을 부릅뜨며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아스타로트의 주먹이 그의 목젖을 후려친 것이다.
“입은 조심히 놀리게.”
짧게 중얼거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다못해 그 인간을 제거할 수단만 생긴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고민할 것도 없을 텐데.
그때였다.
“꺄악!!!”
아스타로트의 귓가에 익숙한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고요한 이 성내에 있는 여성 마족은 단 하나뿐이다.
소중한 며느리인 리리네 올로와쥬.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튀어나간 아스타로트와 그를 따라 뛰어나온 글러트니는 곧이어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시야에 비친 것은 한 여인이었다.
늘씬한 몸매와 큰 키, 붉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조금 기이하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예쁜 여성이었다.
“오호. 벌레들이 한가득하구나.”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는 리리네의 팔목을 잡아 벽으로 몰아붙이며 그녀의 뺨을 혓바닥으로 스윽 핥았다.
도마뱀처럼 길고 얇은 혓바닥이었다.
“으, 으읏! 아, 아버님.”
눈물이 고인 얼굴로 도움을 요청하는 그 모습에 아스타로트의 눈에 불이 튀었다.
“네 이년! 그 손을 놓아라!!”
동시에 그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그는 엄연히 마족 대공이다.
어지간한 마족은 그대로 굳어버릴 만큼 강한 마기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의 마기가 그녀를 짓눌렀지만, 그녀는 마치 욕망에 충실한 듯 그저 리리네의 뺨을 쓸어내리고 핥을 뿐이었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 계집이구나. 앞면의 세계는 이리 좋은 것을.”
“네년의 정체는 무엇이냐!”
아스타로트가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위험하다!
좀 전에 만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의 몸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몸에선 섬뜩할 정도로 무겁고 어두컴컴한 힘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게 하는 그런 힘 말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재밌는 걸 봤지 뭐야.”
담담하게 말한 여성은 곧 흥미를 잃었는지 리리네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아스타로트에게 다가왔다.
아스타로트는 분명 큰 키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아스타로트와 눈을 마주할 만큼 큰 키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
본능적인 두려움에 아스타로트는 자신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히 공포였다.
“너무 겁먹지 마. 늙은 벌레야. 나는 슬리지아라고 한단다.”
곱게 웃어 보인 그녀가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다.
“대, 대공 아스타로트요.”
그 말에 그녀는 더욱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 세상에선 너희들이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 보였는데. 사실 귀찮지만 벌레 한 마리를 찾으러 왔거든.”
그 말에 아스타로트는 숨을 쉴 수 없는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지독한 압박감이었다.
식은땀이 절절 흐르는 건 그뿐만이 아닌 듯 보였다.
눈을 부릅뜬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급진파 뱀파이어의 수장, 글러트니의 표정만 봐도 답이 나왔다.
“버, 벌레라 하심은……”
본능적으로 존대가 나가는 공포심 속에서 아스타로트는 아찔한 정신을 붙잡았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아직은 마족을 향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닉스를 죽인 인간도 나타났는데 갑자기 정체 모를 여자가 또 나타났다.
파괴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포를 유발하는 그녀는 인간도 마족도 아닌 정체 모를 힘을 발현하고 있었다.
마치…… 마왕 폐하가 마족들을 한 번씩 훑어볼 때처럼 말이다.
마왕?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슬리지아의 손이 아스타로트의 턱을 잡았다.
“그래…… 그래…….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정신을 잃지 않은 것으로 칭찬은 해주마. 벌레치곤 제법이야.”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빙그레 말했다.
“너희가 나를 도우렴. 그러면 내가 손을 보태어 벌레 같은 너희들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지 아니?”
빙그레 웃는 그 미소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내 동족이 한 인간에게 큰 부상을 입었단다. 비록 쓸모없는 년이지만 일단은 같은 직급이니 어쩌겠니. 그 쓸모없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서열이 높은 내가 그 벌레에게 직접적인 교육을 시켜주는 수밖에.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공주들의 힘을 고작 미개한 벌레 따위가 어떻게 해볼 게 아니라는 것을.
직접 새겨주어야 한다.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스타로트와 글러트니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허풍이 없는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벌레라는 말에도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압도적인 포식자 앞에서 굴종한 비굴한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이 사실이라면, 무엇이 되었건 염원을 이룰 수 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아스타로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족도 아닌 극도로 위험한 존재이지만 그녀를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마왕 페르세르크는 미지의 위협에 대해 두려움을 표했었다. 그러니 그 위협마저 해결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엿 같은 화친도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기회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아스타로트에게서 관심이 사라진 슬리지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겁에 질려 주저앉은 채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리리네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위험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눈빛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후 그녀는 아스타로트를 향해 고개를 돌린 뒤 빙그레 웃어 보였다.
"듣자 하니, 너희들을 귀찮게 하는 벌레가 있다더구나. 어차피 내가 찾아 죽이려는 그 벌레를 찾으려면 힘을 조금 보충해야 하니 그동안 심심풀이 겸 그 인간을 내가 직접 죽여주마."
그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