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3화
“다들 모여줘서 고맙구나.”
피곤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녀가 마족들과 뱀파이어, 그리고 그들에게 호의적인 모든 종족을 둘러보며 말했다.
“응당 폐하께서 부르셨다면 참석하는 것이 이치이옵니다.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대공 아스타로트를 시작으로 많은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해왔다.
그런 마족들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보고를 받아야겠지…….”
“예, 우선 기술분야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과거 인간들의 문명에서 숨겨진 기술분야나 마법 서적, 그 외에 수많은 가치 있는 서적들을 찾아 이곳 본성으로 후송시켰습니다. 차후 마족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젊은 마족의 보고에 이어 여성 마족이 나섰다.
“명령에 따라 아직 저항하고 있는 오크 저항군들의 요새를 7곳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사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땅은 고작 천연요새 세 곳과 오크 왕의 성 한곳이 남아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얼마든지 진격할 수 있사옵니다.”
기술, 전쟁상황보고에 이어서 자금과 이주 등등 여러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타로트가 나서며 모두의 얼굴에 혼란을 심어줄 만한 보고를 올렸다.
“폐하……, 참모장 닉스와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무슨……”
“허어……”
놀란 마족들의 웅성거림에도 불구하고 아스타로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분명 그림갈(흑룡부대)과 함께 죽어가던 세계수의 목숨을 끊어내고 폐하의 옥체에 큰 무례를 끼친 인간을 잡으러 갔었지요.”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뭔가가 잘못된 듯 보입니다.”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닉스가 죽었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봉인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녀의 정신을 침투하여 멋대로 조종하던 역겨운 기분이 개운하게 사라졌으니 말이다.
“대공 아스타로트.”
곱디고운 미성이 흘러나오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가 보기엔 어떠한 것 같은가.”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참모장을 단신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불사자와 다르게 진정한 불사자 그 자체이니까요.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참모장 닉스가 흑룡부대를 이용해 비밀임무에 돌입했다고밖에……”
상식적으로 그가 죽을 리 없으니 죽은 척을 해서라도 무언가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참모장 닉스는 죽었다.”
“무슨……”
“그게 아니면, 그에 준하는 봉인을 당했겠지.”
페르세르크는 한 손으로 두통이 찌르르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닉스의 정신력이 침투하는 불쾌함은 사라졌는데 역시 무리를 많이 한 탓인지 머리가 찌르르 울렸다.
“폐하! 그 무슨?! 아직 보고된 바가 없사옵니다!”
아스타로트가 당황하여 소리친다.
다른 마족들도 그녀의 말을 쉬이 믿지 못하는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들에게 닉스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참모장이 죽었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그렇사옵니다!”
“그대들은 닉스의 신하인가, 아니면 본녀의 신하인가.”
그런 혼란을 보던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어전 내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짐의 말과 닉스의 독단, 그중에서 그대들은 후자를 맹신하는구나.”
“그, 그것은……”
위계가 철저한 마족 사회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주, 죽여주시옵소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아스타로트의 모습에 페르세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용의주도한 영감쟁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대들은 모를 테지. 참모장 닉스가 본녀를 부활시키면서 본녀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게 무슨……”
“그는 마족의 위계를 위반하고 반역을 저질렀다.
닉스가 죽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용하리라. 차후 얻게 될 이 끝없는 전쟁을 종식해버리기 위해서라도.
더는 안된다.
이 이상 인간을 멸족시켰다간 대적자와 마왕의 관계가 어그러지게 된다.
그리되는 순간.
괴물들이 눈을 뜨리라.
페르세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반역이라니요. 그 무슨……”
“왕의 육신에 금제와 제약을 걸어 자신의 입맛대로 왕을 조종한 자가 반역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럴 수가.”
“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싸늘한 그 질문에 어전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다만 아주 찰나의 순간 급진파 뱀파이어의 수장인 글러트니의 표정에 짜증이 어린 것이 보였다.
‘저놈이로구나.’
정신을 완전 제어 당하는 동안 그녀는 그 어떤 자유의사도 보일 수 없었다. 닉스 혼자서 이 모든 흉계를 꾸미진 않았다. 급진파 뱀파이어 수장 글러트니.
그 또한 한몫했으리라.
간단한 식사부터, 수면, 그 외에 모든 것이 닉스의 통제하에 놀아났다.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일이지만 이미 그는 사라졌으니 사후의 일을 고민해야 했다.
“뱀파이어 글러트니공.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
“아니옵니다. 마왕 폐하.”
짧게 답하는 그를 말없이 노려보던 페르세르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허면 정말로……”
“하지만 폐하. 닉스 참모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희 마족을 굳건하게…….”
그렇게 말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어전의 문이 열리며 급하게 들어온 한 서큐버스 여성이 보였다.
다른 서큐버스들이 뇌쇄적인 외관에 색기가 가득하다면 그녀는 서큐버스 중에서도 특이하게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리리네!”
여성의 등장에 깜짝 놀란 아스타로트가 그녀를 향해 소리치며 그에게 뛰어갔다.
대공 아스타로트.
정말 마족 사이에서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존재로 불리지만 그는 유별나게 며느리였던 서큐버스, 리리네 올로와쥬만큼은 끔찍이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리리네 올로와쥬는 서큐버스 중에서도 상위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태생적인 성정이 온화한 탓에 종족답지 않은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폐, 폐하 죄송합니다! 급히 보고를 드릴 것이 있어서……”
잔뜩 위축된 듯 말하는 리리네의 모습에 다른 마족들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페르세르크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말해보려무나.”
“그것이……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뭐라?”
그 보고에 좌중이 침묵했다.
“본인이 닉스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단신으로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폐하의 명령 이외에 듣지 않는 흉폭한 흑룡을 대동한 채로요.”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페르세르크도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인간이 찾아왔다고?”
“네, 마왕 폐하를 만나겠다고……”
“지금 그는 어디 있는가.”
“그는 저항하지 않고 구속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곳으로 압송하고 있습니다만…….”
그 말에 마족들이 대거 들고일어났다.
“위험합니다! 폐하!”
“신을 보내주시옵소서! 신이 가서 그 건방진 인간 놈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겠습니다!”
거구의 마족 장군이 소리치자 사방에서 그와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이 같은 의견이었다.
닉스는 현재 마족 중 가장 최고의 전력을 지니고 있다.
비록 페르세르크가 엄청난 마법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곳의 그녀는 과거의 위명을 떨치기엔 육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마족들이 그녀를 따르는 것은 마족에 한해서 아직도 페르세르크가 압도적인 힘을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찌 되었건 그런 닉스조차 죽인 존재라면 이곳에 저항 없이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 판단이었다.
“아니, 그를 불러오려무나.”
하지만 페르세르크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내렸다.
닉스의 제어가 사라진 이상 그녀는 인간이 찾아온 이 현상이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무의미한 전쟁을 이제 끝낼 그런 기회 말이다.
“폐, 폐하!”
“인간 한 명에게 겁을 먹겠다고? 그대들은 반역자 닉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허수아비였던가?”
그 말에 마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어버렸다.
살짝 자존심을 건드려주는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낸 페르세르크는 곧 숨을 헐떡이고 있는 리리네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무력을 확인해보았느냐.”
“그것이…… 확인이 안 되고 있는지라…….”
“들여보내거라.”
그 말과 함께 리리네가 다시 어전을 빠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마족이 모인 어전으로 유일하게 다른 존재.
젊은 인간 소년이 느긋하게 걸어들어왔다.
검은 쇠사슬로 몸을 포박당해있지만, 소년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느긋해 보였다.
너무 어리다.
인간은 노화하는 종족이다.
환골탈태를 겪으면 노화가 멈춘다지만 소년은 환골탈태를 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20대도 되지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페르세르크.”
페르세르크는 자신을 묘한 감정을 담아 부르는 소년을 향해 복잡한 시선을 보냈다.
“닉스가 죽었으니 이제 널 멋대로 쥐고 흔드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찾아온 거다.”
“그대……”
“항복해라, 페르세르크.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마치 그녀를 잘 아는 듯한 소년의 말투에 주변에서 분노한 마족들의 외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저, 저 건방진! 감히 폐하를!”
“폐하! 저 건방진 인간을 당장 죽이시지요! 닉스 참모장이 저깟 어린 인간에게 죽었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격한 외침이 쏟아진다.
그들의 눈에 내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분신체에는 최소한의 유지 마나만을 담아둔 탓에 감지하려 해도 미약한 정도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지독한 살기가 쏟아지지만 나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목숨 잃을 일도 없으니 아쉬울 게 없다.
하지만 저들의 생각을 가볍게 찍어눌러 버릴 수단은 내게 존재했다.
텅그렁!!!
나는 익숙하게 품 안에서 꺼내 든 작은 완드를 바닥에 툭하고 던져 버렸다.
“저, 저것은!”
“심연의 홀!!”
참모장 닉스의 애장 무기 중 하나였으며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무기였다.
“이제 좀 믿나?”
빙그레 웃으며 한걸음 내디딘 나는 양팔이 포박되어있다는 점도 가볍게 무시한 채 조용히 말했다.
“항복하면 살려는 드린다니까?”
“인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쿠웅!!!!
내 말에 거구의 마족이 빠르게 달려들어 내 멱살을 틀어쥐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인간이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폐하께 그런 망언을 내뱉는단 말인가! 네놈의 피는 무슨 색이더냐!”
“빨간색이니까 궁금해하진 말고.”
툭…….
분명 강대한 힘으로 틀어쥐고 있는 아귀였지만 가볍게 그의 팔을 몇 번 짚는 것으로 제압을 풀어버린 나는 페르세르크를 향해 말했다.
“닉스는 몰랐을 거다. 이 이상 전쟁이 지속하면 안 된다는 걸.”
“……”
“하지만 너는 알고 있겠지?”
내 말에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그녀는 정말 생동감이 넘쳤다.
아마 체념으로 지치긴 했지만, 닉스의 힘에 제어 당하던 시절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륙의 마족, 인간 할 것 없이 모조리 죽는 걸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전쟁을 끝내. 너희들이 먹은 대륙의 반절은 너희가 사용하든 마음대로 하고.”
“그대……, 대체 정체가……”
“내 정체가 궁금해? 아니면,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해.”
나와 페르세르크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 마족들이 우왕좌왕하는 그 순간이었다.
“이 이상 전쟁은 무의미하다. 너도 잘 알겠지만, 심연 놈들은 보통 독종이 아니거든. 만약 여기서 너희들이 전쟁을 지속하겠다면.”
물론, 그냥 혓바닥만으론 쉽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럴 땐 뻥카를 치는 수밖에.
“내가 인간의 편에 서서 너희들 모두를 다시 그 인공마계로 내쫓아버리는 수밖에.”
“감히!!!”
콰앙!!
분노를 참지 못한 거구의 마족이 검을 빼 들고 휘두르려 했다.
“그만!!”
하지만 페르세르크의 외침에 그의 검이 내게 닿기 직전에 멈췄다.
조금만 늦었어도 약하게 만들어진 내분신체는 그대로 부서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죽는 건 의도와는 맞지 않기에 품에 보유하고 있던 한가지 보험을 사용할까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도 페르세르크 덕분에 쓰지 않고 아낀 꼴이 되었지만.
“폐, 폐하!”
“그의 말이 맞다……. 이 이상의 전쟁은 양측 종족 모두에게 너무 위험해.”
그녀의 말에 마족들의 얼굴에 혼란이 서렸다.
“그대들은 몰라. 진짜 적이 머리를 들이밀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과거의 원한은 여기서 청산하는 것이 맞겠지. 무엇보다.”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심연의 힘으로 보려고 해본들,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새카만 노이즈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까 봐도 모를 거다.
다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가 나를 경계하는 것은 정신을 장악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녀의 기억에 나와의 첫대면이 워낙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그녀의 곁에 호위대로 서 있는 다크 엘프는 나를 보자마자 사시나무 떨듯 두려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장내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