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0화
“왕이 되어주게. 자네는 젊고 강하고 영리하지. 게다가 명분도 충분……”
“그딴 귀찮은 자리, 안 합니다.”
내 말에 아크튜러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인간은 구심점이 되는 존재가 필요하네.
아크튜러스는 그 말을 남기곤 떠나갔다.
현재 인류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다름 아닌 나라는 존재였다.
실제로 저항군이 다시 결성되어 승전고를 울리기 시작하자 죽은 듯 숨어있던 이들조차 하나둘 고개를 들어 이곳을 주시하고 동조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인류의 왕이라 퍽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관조자의 말이었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직접 보는 게 좋겠지.]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우연히 축제 현장을 벗어나는 나를 발견한 에이리아가 후다닥 뛰어와 내게 따라붙었다.
이 세상을 함부로 간섭해선 안 된다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쩌면 나름대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어디 다녀올 겁니다.”
“위험한 곳인가요?”
“네.”
망설임 없는 내 답변에 그녀는 말없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 이건 아바마마께서 어릴 적에 제게 주셨던 반지에요, 황실 수호의 힘이 깃들어있다고 해요.”
그 효과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고 별로 기대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 씀씀이가 퍽 고마웠다.
“이곳에서 기다리세요. 황녀의 기억을 되찾고 여기 일을 끝내는 대로 황궁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데이비 님은 정말 자상한 분이세요.”
옅게 웃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내게서 물러났다.
“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당황한 그녀가 눈동자를 대굴대굴 굴리며 변명을 해왔다.
“무례했나요?”
“아, 아뇨 그건 아니지만…….”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해요! 먼저 돌아가 볼게요. 꼭 안전하게 돌아오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며 도망치는 에이리아의 발걸음은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 * *
에이리아는 축제 현장에서 벗어나 데이비와 그녀에게 제공된 숙소로 빠르게 달려갔다.
얼마 전엔 마족 병사들이 쓰던 건물이었지만 마족들을 몰아내며 이제는 인간들의 숙소가 된 곳이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제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쉬지 않고 뛰는 심장 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단순히 손을 머리에 얹어 쓰다듬어주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안정되는 기분이 드는 것인가.
그녀에게 데이비라는 인물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겉보기엔 그가 그녀를 납치해왔다고 해도 믿을법한 상황이다. 어느 것 하나 현실적이지 않은 설명들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를 믿고 의지했다.
어째서일까. 분명 머리는 거부하라 하는데, 마음 한편에선 그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관심을 주고, 손을 뻗어주는 것에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행복이 몰려왔다.
대체 어째서일까.
그는 믿을 수 있을 만큼 배려심이 넘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그동안 남들을 경계해온 에이리아는 알고 있었다.
배려심이 넘친다고 꼭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황실은 웃는 얼굴, 부드러운 태도를 고수하며 칼을 가는 이들이 많은 곳이니까.
하지만 그는 달랐다.
분명, 속으로 경계를 해야 하는데.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를 볼 때마다 무언가 아릿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빨개졌다. 확실히 이상했다.
‘심장이 고장 났나 봐. 언제 진찰을 받아봐야 할까.’
언젠가 데이비가 지나가며 했던 부정맥이라는 게 정말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닐까 괜히 걱정되는 그녀였다.
* * *
요새를 떠나 관조자가 말한 방향을 향해 나는 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수단으로써는 역시 가장 빠른 존재인 창공의 폭풍 용왕 메가로드리아를 선택했다.
흑룡도 제법이지만 환수왕 만한 속도를 가지고 있진 않으니 말이다.
속도로 따지면 사실 워프만한 것이 없긴 하지만 관조자가 말한 위치는 정확한 좌표를 특정하기 힘들어서 직접 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화산지대는 생명이 살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기류를 내뿜었다.
이곳은 본래의 티오니스 대륙에선 아름다운 초목과 수천 년 가까이 휴화산으로 존재해온 거대한 산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말 그대로 바닥은 마그마의 바다였고, 하늘은 화산재로 가득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 근처일세. 아, 발밑은 조심하게. 이 마그마들은 이미 오염되었어, 괜히 잘못 밟았다가 큰일 치를지도 모르네.]
그의 말에 나는 말없이 다가가 마그마를 내려다보았다.
온도가 수천 도에 달하는 마그마는 보통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태워버릴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마그마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간 것도 모자라서 한 손을 마그마에 담가보기까지 했다.
[자, 자네! 손을 뼈다귀로 만들려고 작정했나!]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마그마 속에 손을 담그고 있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확실히 온도부터가 다르네. 별로 좋진 않아.”
마그마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마그마에서 손을 빼내자 시뻘건 마그마가 후두둑 흘러내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손이 빠르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수 만도에 달하는 화염 속에서도 버티던 내게 이깟 수천도 밖에 안되는 마그마는 목욕하기 딱 좋은 온도일 뿐이다.
빌어먹을 정령 여제 유리아나는 내게 인간의 극한을 뛰어넘는 체험을 시켜주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살수왕의 보고 중 하나가 있는 곳이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보고고 나발이고 모조리 녹아내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여기 화산 활동 시작한 게 슬리지아가 저지른 일입니까? 제법 수수하기 그지없는데?”
한 지역을 불지옥으로 만든 것을 두고 수수하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지만, 상대의 힘을 생각하면 정말 수수한 편이었다.
[아닐세,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이곳에 종양을 심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도 실시간으로 끔찍한 것들이 태어나고 있지. 그리고 그 여파로 휴화산이 자극되어 지금처럼 급작스러운 화산폭발이 일어났네.]
그 말에 나는 손가락을 뻗어 시뻘건 마그마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저놈이 그겁니까?”
내가 가리킨 것은 마그마의 중앙에서 나를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였다.
언뜻 보면 못 보고 지나칠 정도였지만 나는 정확히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처음 볼 때보다 월등히 커졌구나! 더 크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하네!]
관조자의 외침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용암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퍼엉!!!!
거대한 폭발과 함께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거대 꼬리였다.
거대한 꼬리는 그대로 나를 낚아챘고 내가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대로 잡아당겨 용암 속에 빠뜨리려 했다.
쩌억!!
내 손에서 번뜩이는 홍단이의 붉은 잔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구오오오오오오!!!]
순식간에 꼬리가 잘려나가고 괴물의 굉음이 울려 퍼지자, 자는 놈의 머리통을 향해 홍단이를 잡아당기고 그대로 허공에 일검을 수 놓았다.
[초 중검]
[일도양단]
[태산 쪼개기]
쩌억 소리와 함께 마그마 채로 잘려나간 것은 기괴한 형태의 생명체였다.
물고기 같은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존재했고 끔찍하게 길고 가느다란 촉수들이 수백 가닥이 돋아나 있다.
얼굴은 어류와 비슷하면서도 털이 가득했고, 눈은 8개에 달했다.
돌연변이 수준의 문제로 변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런 기괴한 형태를 지닌 괴물들은 심연의 존재가 전부였다.
[이곳이네! 마그마의 아래! 하지만 마그마를 다 치워버리지 않는 이상 내부를 확인하기 쉽지……]
“들춰봅시다.”
그 말과 함께 나는 홍단이의 검신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조용히 말했다.
“홍단이 잘할 수 있지?”
-홍단이 막막 잘해!
이제 어느 정도 어눌한 발음은 해결된 것인지 홍단이의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그대로 눈을 번뜩였다.
[중검]
[바다 가르기]
검신 하레스가 했던 대양을 갈라버린 수준은 아니지만.
고작해야 반경 수십 미터의 용암 바다를 검기로 잘라버리는 데엔 충분하다.
쩌억! 소리와 함께 그대로 용암이 마치 모세의 기적마냥 갈라지며 내부의 모습을 드러냈다.
짜악!!
이윽고 갈라진 용암이 다시 주변을 덮으려 하자 나는 양손을 부딪쳐 일대 지형을 멋대로 바꿔버렸다.
용암이 중앙으로 들이닥치지 못하게 벽을 세워 막아버린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용암 이산가족을 만들어버렸지만 상관없었다.
타닥.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금까지 용암이 가득 차 있던 곳을 바라보던 나는 그 바닥의 아래에 깔린 커다란 살점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살점 덩어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태동하고 있었다.
[저 살점 덩어리는 지면 아래로 수백 가닥에 달하는 뿌리를 박아넣고 있네.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지. 현재 이 땅 곳곳에 그런 종양들이 설치되고 있네. 전쟁도 전쟁이지만……, 이것들이 세계의 규칙을 어지럽히기 시작한다면 불안정한 간섭 신물인 은율의 솔방울의 효과가 약해져도 이상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홍단이를 들고 살점을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살점이 반으로 갈라지자 보랏빛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이내 땅속에 박아넣었던 뿌리들이 빠져나오며 살점이 빠르게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샤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런 살점의 변화를 눈치챈 듯 무언가가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좀 전 내가 베어버린 괴물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심연의 생명체였다.
도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넘어온 건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몸 안에서 나왔네. 이 살점 덩어리를 지키라고 말이야.]
“몸 안에서?”
아무리 그래도 이 거대한 녀석을 보관할 만큼 거대한 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알 같은 걸 품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관조자의 설명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말하지 않았나 괴물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팔을 변형시키더니 그 변형시킨 팔을 떼어내 이곳에 뿌렸네. 그 팔의 일부가 저 괴물이 된 게야.]
요지는 그녀의 육신 파편이라는 소리였다.
[그녀가 대체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아직 아는 바가 없네만. 적어도 이런 것들을 그냥 두면 그 에이리아라는 여아의 상태는 호전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판단일세.]
“흐음……”
[마족과의 전쟁으로 바쁜 건 아네. 실제로 본성에서 50만에 달하는 대군이 이곳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아 슬슬 움직입니까?”
내 물음에 그가 긍정을 표해왔다.
“누구든 말입니다.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어요.”
거기에 대고 내가 반박해줄 이유는 없다.
다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 심연의 공주에 대해 정보를 얻을 겸 그녀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다.
“여긴 종양이 끝입니까?”
[다음 장소로 안내하지.]
관조자의 말에 나는 조용히 허공을 넘나들듯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