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5화
상위 마족이건 하위 마족이건 결국 지금에 이르러선 어느 쪽 할 것 없이 똑같은 결과만 낳을 뿐이다.
뜨겁고 비릿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제 죽음을 직감했던 아스타로트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의식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무슨?!”
내 검은 그의 목을 베지 않았다.
대신 초단이의 검은 그의 앞을 막아선 한 여성의 가슴을 관통했다.
“아, 아아아!! 리리네!!”
격한 외침을 토해내며 그가 몸을 버둥거렸다.
반사적으로 풀린 염동력에서 해방된 그는 피를 울컥 토하며 쓰러지는 여성을 끌어안은 채 피를 토하듯 외쳤다.
“어찌, 어찌 이리 온 게야! 내 돌아가라 하지 않았느냐!”
“끅…… 끄윽…… 아, 아버님.”
죽어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서큐버스의 행동에 아스타로트는 이성을 놓은 것처럼 절규했다.
이미 모든 것은 무너져 내렸다.
나는 말없이 리리네 올로와쥬라는 이름의 여성을 바라보다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전 페르세르크의 육신을 안착시킬 때 내게 낫을 들고 대항해왔던 그 서큐버스였다.
아스타로트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제법 서로를 아끼는 듯 보였다.
“아, 아버님……”
“아, 안된다! 네가 죽으면 아니 된다!”
급기야 눈물까지 떨어뜨리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리리네라는 이름의 서큐버스는 그저 미소만 지은 채 눈을 감았다.
멍한 얼굴로 리리네의 시신을 바라보던 그는 곧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이내 괴성을 내질렀다.
“그아아아아아아!!!”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휩쓸린 그는 발작을 일으키듯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 바닥을 내리쳤다.
거대한 충격파가 퍼져나가지만 나는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인간…… 인간!!”
“네가 자초한 거다.”
내 말에 그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네놈…… 그 눈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힘이 증폭되며 일부분만 남아있는 내 몸 안에 마왕의 힘까지 덩달아 상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레 그 영향은 내 눈동자 쪽으로 몰렸고 현재 내 붉은 눈은 평소보다 더 붉어져 인간보다는 마족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힘의 한계치가 약한 마기였기에 그것이 새어 나오며 존재감을 드러내니 그로선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지는 뻔했다.
말없이 그를 보던 나는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천천히 들어 펼쳤다.
동시에 손가락 끝에 새카만 화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서로 어우러지며 거대한 구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섬뜩할 정도로 고요한 구체는 곧 내 손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아스타로트를 흘끗 본 나는 말없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천천히 들어 올렸다.
우우웅…… 우우우웅!!!!
동시에 검은 구체가 맹렬하게 자전하며 스파크를 튀기기 시작했고 이내 그 크기가 수십 미터에 달해 불어나기 시작했다.
메가로드리아를 아작낼 때 사용했던 마법과 비슷하지만, 본질은 달랐다.
[9서클 흑마법]
[초월계]
[갈망하는 자의 구혼]
“그만…… 그만!!!!”
격하게 외치는 그를 무시한 채 나는 손에 떠오른 구체를 가볍게 던졌고.
그것은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쿠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일대가 모조리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구체는 지면과 충돌했고 반경 수백 미터를 감싸며 하늘 끝까지 퍼져나가는 거대한 검은 기둥을 만들어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아직 살아남은 마족들.
새카맣게 적들이 몰려오던 협곡과 평야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광범위 마법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레바스와 새카만 불의 기둥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와 어마어마한 벼락.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재앙 속에서 아스타로트는 절망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은 허망함이었다.
* * *
무너져 내린 채 주변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아스타로트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인가.
도저히 쉽게 믿기지 않는 상황이지만 현실이었다.
항복을 권했던 인간 소년을 향한 의혹은 모두 사라졌다.
그의 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것이었고, 도저히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고서에나 있는 신의 모습이 이러할까.
마족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모든 것은 저 한 인간에게 전혀 닿지 못했고, 모든 것이 부질없이 바스러져 갔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처럼 바스러진 것이다.
끔찍한 지옥도의 한복판에서 그는 자신을 도와주던 슬리지아가 왜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슬리지아는 강한 존재가 분명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느낌이 들었고 저항하기 어려운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반대로 이 소년은.
달랐다.
슬리지아와는 뭔가 설명하기 어렵게 다른 모습이었다.
“당신만 남았어.”
이윽고 고요한 침묵 끝에 소년이 그에게 말했다.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시간이 소모가 상당한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대한 빛의 날개가 서서히 가닥가닥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년의 목소리에 거부하기 힘든 무언가가 스며들어 아스타로트를 짓눌렀다.
“네놈……”
“뭐?”
“네놈을 저주한다.”
말없이 품에 안긴 서큐버스 리리네를 끌어안은 채 그가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죽어서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놈의 곁에 따라붙으리라!! 마족의 숙원이었다! 그 숙원을 네놈이 망쳐놓았다!”
그는 발작이라도 온 듯 소리 질렀다.
“우리 마족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어째서 인간에게 패배해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야 했나!!”
절절한 외침 속에 소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로트는 마치 동정하는 듯한 시선에 더욱 울컥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놈은 악마 그 자체이니라! 리리네는…… 리리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
대체 두 마족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기에 저렇게 절절히 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짧게 침묵한 뒤 혀를 찼다.
스릉…….
그리고는 그의 목에 겨눈 검을 슬쩍 움직이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 전쟁은 너희 선조가 먼저 시작했고, 그 대가가 그것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중간에 전쟁을 멈추라, 분명 경고했을 텐데.”
“……”
“마지막으로 잘살기 위해서 인간을 말살한다고? 개소리하지 마라, 아스타로트. 인간이 모두 죽으면 남은 건 사이좋게 파멸하는 것뿐이다.”
촤악!!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그의 목이 허공을 갈랐다.
페르세르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장을 이탈한 마족 5만여 명을 제외하고 아스타로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나머지 모든 마족이 이곳에서 뼈를 묻었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고, 원귀가 되어서 달라붙고 싶으면 그쪽이 쌓은 업보부터 청산하고 와.”
쓰러진 아스타로트의 시체를 보며 소년은 화염을 피워올려 그의 시신과 리리네의 시신을 조용히 불태웠다.
이후 무표정한 얼굴로 초단이의 검신을 가볍게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마족 뒤에 숨어있어서 내가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몰라.”
담담하게 말한 소년의 전신으로 숨 막히는 기세가 터져 나왔다.
소년이 바라보는 방향은 거대한 크레바스 아래.
바로 슬리지아가 떨어졌던 그 구멍 속이었다.
그리고 새카만 그 어둠의 균열 속에서 검은 촉수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건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괴물이었다.
외향은 적발에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미인이었지만.
그녀의 치마 아래로는 정체 모를 촉수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너…… 대체 뭐야.”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가 소년을 향해 말했다.
“대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온 거야?”
슬리지아에겐 그것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인간을 포기하던지, 종양을 포기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했는데.
이 정체 모를 소년은 그것을 둘 다 이뤄내 버렸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 거대한 상처를 남겨 이렇게 형태 유지조차 쉽지 않게 만들었다.
“모르겠고. 넌 좀 많이 귀찮을 것 같으니까 여기서 정리해두는 게 두고두고 편할 거 같다.”
“네까짓 벌레가!!!”
여유를 잃어버린 슬리지아는 본능적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괴물처럼 일그러진 그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촉수 가닥들이 뭉쳐지며 거대한 뱀의 하반신을 만들어냈다.
반인 반뱀의 형태를 가진 라미아와 흡사한 형태로 변한 그녀가 시뻘겋게 변한 흰자위를 번뜩이며 손뼉을 친다.
쩌정!!
동시에 일대 공간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네놈은 차후로도 위험하겠어. 울드 그 쓸모없는 년이 당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구나.”
“알아채는 게 너무 늦으셨네.”
“넌 날 죽이지 못한다. 어떻게 내 힘을 이겨내는 출력을 쏟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내 생명의 근원은……”
“아 모르겠고!”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소년이 한 손을 가볍게 땅에 짚었다.
투웅!!
동시에 새하얀 잉크 같은 것이 바닥에 퍼져나가며 거대한 문양을 만들어냈다.
주신 프리아의 문장이었다.
“그놈의 불사는 이제 지겹다.”
* * *
슬리지아의 생명력은 상당할 것이다.
금기의 업을 발현했으니 불사는 막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진 방어능력은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이 많았다.
그런 내 귓가에 초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초단이를 쓰세요!]
“아바마마라고 하면 안 돼?”
[시, 싫어요!]
당황한 목소리에 피식 웃은 나는 반투명한 초단이의 검신을 옅게 훑었다.
내 손끝을 따라 잉크처럼 번진 청적색의 빛깔이 아름답게 검신 전체로 퍼져나갔다.
홍단이는 물질계를 베었고, 청단이는 비물질계를 베었다.
그렇다면 초단이가 가진 권능은 무엇인가.
페르세르크에게 감정을 부탁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으니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아마 베는 계통의 힘이리라.
이윽고 슬리지아의 손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따라 주변의 공간이 모조리 부서져 나간다.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부수는 힘이라니 터무니없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아마 저기에 닿으면 대번에 닿은 부위가 분해되어 사라지리라.
자체적인 블랙홀이 만들어진 꼴이다.
이에 나는 한 손을 땅에 짚고 그대로 신성력을 모조리 끌어내기 시작했다.
내 그런 모습에 슬리지아는 손에 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창을 천천히 움직이다 일순간 내게 휘둘러 들어왔다.
닿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섬뜩한 힘이었다.
본 힘을 죄다 찾아서 활성화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영향을 줄 정도면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를 알만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긴 몸통의 힘을 이용해 파고들어 오는 슬리지아의 창날이 내 목을 정확하게 겨누고 파고들어 왔다.
주신 프리아 여신님.
[방어를 부탁합니다.]
상남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꽈아아악!!
한 손을 말아쥐고 내 마나의 과반수를 끌어낸다. 슬리지아가 만들어낸 균열의 바스러짐이 내게 닿으려 하지만 내 몸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은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며 공간 균열의 접근을 막았다.
“말도 안 돼!!”
“돼, 이년아!”
하늘에 뜬 달 사이러스와 크리아스의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작디작은 소행성들이 공전하고 있다.
그것들은 달의 힘을 받아 강력한 단단함을 지니고 있고.
그 신비로운 힘에 의해 무서울 정도의 독립성을 지닌다.
[9서클 초월계]
[월석 낙하]
너로 정했다, 사일러스. 공전하는 소행성 두 개만 빌려줘라.
지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체가 마치 섬광처럼 떨어진다.
하늘을 새카맣게 메우는 공격에 나는 절로 피를 울컥 토해냈다.
역시 천체 제어는 내 수준으로는 힘든 모양이다.
“크윽?! 이 무슨 중력?!”
다만 그 소행성들 자체가 가진 힘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하다.
월석이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중력에 놀란 슬리지아가 반사적으로 거대한 창을 내게서 빼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쩌억!!!
부서진 공간의 틈조차 부수지 못한 월석들이 그녀의 공격에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어우야, 저거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
아주 찰나의 순간.
그것으로 충분히 시간을 번 내 손에 초단이가 빛을 발했다.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검술을 단 한방에 담아 넣었다. 폭발적인 중량이 검에 담기며 내가 딛고 있는 지면에 거대한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지만 이만한 중량이 아니면 파괴력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심연표 뱀으로 담근 술은 어떤 맛이냐.
[초 중검]
[개벽식 일도양단]
[태양 가르기]
베는 게 아니라 내리치는 일검술.
금기의 업으로 내 육신의 힘들을 모조리 독립시켜 슬리지아가 가진 저항력을 무시하고 파고들게끔 변형한다.
이미 수차례 심연에서 기어 나온 것들을 상대로 연구를 해왔기에 그 점에 대해선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이 있다.
초단이의 장검이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검기로 변했고 월석의 중력에 당황해 움찔거리고 있던 슬리지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어떻게 벌레가……”
“적어도 내 스승 중 단 한 명이라도 지상에 강림했다간 심연도 좋은 꼴 못 봤을 거다.”
내가 내려와서 다행인 줄 알아, 이년아.
그 눈동자에 어린 순간적인 감정은 공포였다.